2022년 2월 18일 금요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르8,34-9.1)

제1독서<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14-24.26)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112(111),1ㄴㄷ-2.3-4.5-6(◎ 1ㄷ)
◎ 행복하여라, 주님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 부귀영화 그의 집에 넘치고, 그의 의로움 길이 이어지리라.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 ◎
○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복음<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4-9.1)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야고2,14~24.26)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4-17)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외모로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거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고보는 1장 1~13절 단락에 이어지는 14~26절 단락에서 믿음은 반드시 실천(행함,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사실과 실천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논증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윤리적 실천 의무를 모든 성경가운데 가장 명시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본 서간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 메시지가 바로 오늘 독서이다.
믿음을 통한 의로움(구원)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를 강조하는 바오로의 주장 (로마3,21.22; 갈라2,16)과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야고보의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행동'(행위, 행함, 실천)에 해당하는 '에르가'(erga)란 용어를 바오로와 야고보가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오로와 야고보가 사용하는 '에르가'의 의미를 규명한다면, 이러한 오해가 풀리며 결코 두 사람의 메시지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바오로는 로마서 3장 28절에서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행위는 할례의 준수와 같은 '율법적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이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의 공로를 제쳐놓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선행이나 공로도 하느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지 못한 자로서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야고보에게 있어서의 '행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거듭난) 자가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행위(실천)를 의미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은혜로 믿었다면 믿고 난 후에는 당연히 믿음에 합당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웃을 돌아보며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등은 참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나 야고보는 모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다만 야고보가 그 믿음이 거짓 믿음이 아니라는 것은 실천(행위)으로써 증명된다는 사실을 보다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강조점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에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5~16)
야고보서 2장 15~16절은 야고보가 이 서간을 쓰던 당시초대 교회내의 실제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본문의 '형제'에 해당하는 '아델포스'(adelphos)와 '자매'에 해당하는 '아델페'(adelphe)란 표현은 그리스도로 맺어진 공동체, 즉 교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여자 교인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이기 때문이다(1코린12,12~27).
그리고 '헐벗고'로 번역된 '귐노이 휘파르코신'(gymnoi hyparchosin)은 문자적으로는 벌거벗은 상태(be naked)이지만, 사실은 거의 옷을 입지 못한, 또는 남루하여 적절한 의복을 입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날 먹을 양식'으로 번역된 '에페메루 트로페스'(ephemeru trophes)는 '매일의 양식'을 의미한다. 또한 '없는데'로 번역된 '레이포메노이'(leiphomenoi)의 원형 '레이포'(leipho)는 '결핍하다', '없다'란 뜻으로서 음식의 결핍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야고보가 속한 교회내의 지체들 가운데는 충분한 의복 뿐만 아니라 음식 또한 먹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던 형제, 자매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교회 안에서도 인간으로서 생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갖추지 못한 채 극도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비극적 상황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이제 야고보는 2장 15절에서 제시한 비참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실제적으로 돕지 않고,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아무 유익도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평안히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테 엔 에이레네'(hypagete en eirene)는 서로 헤어질 때 유다인들이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다.
이것은 원래 마음으로부터 상대방의 행복을 소망하는 깊은 사랑의 의미가 담긴 인사였다( 마르5,34; 루카7,50).
여기서는 헐벗고 굶주린 형제들에게 '하느님께서 너를 평안하게, 즉 결핍에서 채워주실 것이니 그냥 가라'고 하는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여기서 스스로 돕지 않고, 단지 입술로 평안함을 빌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잠언 3장 28절에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게, 내일 줄 테니." 하지 마라" 고 했다.
도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손으로 보내면서 평안함을 비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자기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따뜻이 녹이고'에 해당하는 '테르마이네스데'(thermainesthe)는 '테르마이노'(thermaino)의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덥게 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배불리 먹으시오'에 해당하는 '코르타제스테'(chortazesthe)도 중간태 명령형으로 '스스로를 배부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런 단어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대책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교회 공동체 내에 가난한 자들이 궁핍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교인들이 그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공급해 주기보다는 값싼 동정의 무책임한 말로만 떠들어대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로만 반응하는 그들의 반응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베풀어 주어야 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행위조차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이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은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58,6~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
이 구절은 실천(행동, 행함)이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구절로서 본 서간의 주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야고보는 2장 15절과 16절에서 예를 들어 설명한 사실에 대해 이제 중간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다.
'죽은'으로 번역된 '네크라'(nekra)는 무익할 뿐 아니라 해롭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나타내고 있다(루카15,24.32).
즉 실제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본인과 이웃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측면에서 해롭기까지 한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5장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오직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 만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7절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2장 8~10절에서도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 하셨습니다."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19)
야고보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멸망할 마귀들이 가진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헛된 믿음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야고보는 신앙 문답과 같은 양식으로서 유일신론을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마귀들'(타 다이모니아; ta daimonia)도 유일신론을 인정하고 있다. '떱니다'로 번역된 '프릿수신'(phrisusin)의 원형 '프릿소'(phriso)는 '떨다','극한 공포에 사로잡히다','소름끼치다'란 뜻으로서 마귀들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매우 크게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는마귀처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도 있지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실천(행동,행함)이 배제된 믿음만으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1)
야고보는 이제 실천있는 믿음만이 하느님 대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유다인의 조상이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한다(요한8,39).
본문에서 야고보가 아브라함을 '우리 조상'(파테르 헤몬; pater hemon)이라고 언급한 것은본 서간 수신자들의 대부분이 유다계 그리스도인이거나 유다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3)
여기서 야고보는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한 창세기 15장 6절을 이용하고 있다. 야고보는 먼저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후사가 없었을 때에도 하느님께서 그의 씨로 하늘의 무수한 별과 같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다(창세15,5). 그리고 그 믿음을 하느님께서는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15,6).
그러나 그 후 이사악을 기꺼이 제물로 드린 <'아네넥카스'(anenegkas)의 원형은 '아나페로'(anaphero)로 '제단에 놓다', '제단에 가져가다'는 뜻> 사건을 통해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이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 사건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의 가장 두드러진 증거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순종의 행위일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하느님께서 명하신 대로 산 제물로 드릴지라도죽음으로부터 하느님께서 능히 그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히브11,19).아브라함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들을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그 약속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이처럼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는 구약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계속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믿음과 행함(실천)의 일치를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이 창세기 22장의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이루어졌고'로 번역된 '에플레오데'(eplerothe)의 원형 '플레로오'(pleroo)는 '충만하게 하다', '완성하다', '온전하게 하다'는 뜻이다.
즉 창세기 15장 6절의 '칭의'(의로움의 선언)도 법정적 선언이고(로마4,3) 창세기 22장은 그 '의로움의 선언'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명백한 증거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는 본절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위없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로써 그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26)
야고보는 서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행위(실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결론을 2장 26절에서 맺고 있다. 실천(행함, 행동, 행위)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이것은 2장 17절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한 말이다.
즉 야고보는 실천없는 믿음은 숨을 쉬지 않는 육체에 비교하면서 믿음을 육체에, 그리고 실천(행함)을 영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영'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pneumatos)의 원형 '프뉴마'(pneuma)는 '호흡','숨', '생명'이란 일차적인 뜻이 있으나 구약에서부터 보편적으로 '호흡이 있는 생명'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영혼'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인간 생명의 삼중 구조(1테살5,23)에 입각해서 새 성경은 '영혼'안에 있는 '영혼의 핵'인 '심령'(영)으로 번역되어 있다.
숨쉬지 않는 육체는 시체일 뿐이다. 이처럼 행동(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호흡이 끊긴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육체와 영이 하나이듯이 믿음과 실천(행함)도 하나이다.
육체와 영이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영이 없는 몸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믿음은 실천 없이는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다.

2022년 02월 18일 금요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에서 ‘야고보 서간’을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은 무엇보다 신앙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는데,
행동과 실천이 붙따라야만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 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이 주제의 핵심 단락이 바로 오늘 제1독서의 내용입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곡을 찌르는 오늘 말씀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집니다.
저는 지금껏 이웃을 향한 자비와 사랑에 관한 수많은 말을 늘어놓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말들을 참으로 실천하며 살았는지 돌이켜 보면,
적지 않은 경우 그저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을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초주검이 된 사람을
온 정성으로 돌본 착한 사마리아인처럼(루카 10,29-37 참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나’와,
정작 길에서 비슷한 처지의 궁핍한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쳐 버리는 ‘나’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셨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당신의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됨’이란 결국 말과 행동의 거리를 줄이는 삶,
곧 행동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삶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당신의 피신처가 ‘십자가’ 맞습니까?
(마르 8,34―9.1)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 자신을 버린다는 것, 자신의 생각, 뜻 그 말이 구원의 십자가 없는 헛것임을 깨닫는 그 자기 부인(否認)하는 것입니다. 곧 제자나 군중이나 누구든지 구원의 파멸로 이끄는 인간의 지혜로 따르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우리는 베드로가 사람의 지혜로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잘못(죄)을 봤습니다. 지혜는 구원으로 이끄는 신비롭고 감추어져있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1고린2,9)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 사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그 사람의 생각, 뜻, 그 마음, 그 길이 구원의 가치 없음을 인정하는 그 자기 의로움의 否認- 자기 부인이며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 하시는 하느님의 방법, 곧 구원의 길은~ 인간은 생각할 수도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그런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길입니다.
(요한 14,6)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래서~
(1베드2,24) 24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십자가)로 여러분은 병(죄)이 나았습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의로움으로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지 못한다면, 곧 믿지 못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은 없습니다.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용서, 의로움은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사랑이 이루신 신비이며 기적입니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도덕과 윤리의 그 사람의 의로움은 이 세상의 것입니다. 그 자기 의로움의 자신(목숨)을 고집한다면 이 세상의 칭찬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에게는 끝(죽음)이 있을 뿐 구원-새 생명을 위한 부활(시작)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로움이 참 진리임을 깨닫고 자기 의로움을 부인하는 그 자기 목숨을 버리면, 잃으면~ 십자가가 거저 주는 하늘의 의로움으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로움으로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는 사람일수록, 십자가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억울해서 어려울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난합니다. 그러니 십자가가 주는 용서, 의로움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1코린2,8-9)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 세상의 의로움 그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은 그 비난 주님의 복음 때문이니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 비난 받아 보지도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자기의 의로움 그 명예로 온 세상의 칭찬, 영광을 받아 산다 한들~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하십니다.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세상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늘의 의로움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해 부끄럽게 여기면~
그 십자가의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하면, 심판권을 가진 그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못 알아 보십니다.
오늘은 빛이신 예수님이 어둠을 찾아 오셨지만~ 빛의 나라, 그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어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어둠)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어둠임을 깨달아 하늘의 빛을 받아들이는 기회의 땅인 것입니다. 이 땅의 삶이 기회이지 죽어서는 기회가 없습니다.
(루가16,26)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 서 있는 사람-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나라의 의로움(십자가)을 향해 서 있는 사람입니다.
곧 십자가의 대속을 진리로 믿어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지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의 라라를 사는 하늘으 자유,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마테6,33)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 아멘 -*^ㅇ^*-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마르 8,34- 9,1)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6-37)
'목숨을'로 번역된 '프쉬켄'(psychen)의 원형 '프쉬케'(psche)는 '숨쉬다', '바람불다' 라는 뜻을 가진 '프쉬코'(psycho)에서 유래한 명사인데, '목숨'(life; 요한10,17)이라는 뜻 뿐만 아니라 '영혼'(soul; 마태10,28)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이것은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 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도 가리키는 이중적인 용어이다.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 나오는 역설적인 교훈은 이러한 육적 생명과 영적 생명 간의 대조 관계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자신의 육적인 생명에 대한 애착만을 갖고 이것을 지키려는(히브2,15) 자는 끝내는 육적인 목숨과 더불어 영적 목숨까지 잃게 되지만(루카12,20), 예수님의 참 제자로서 자신의 육적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는 헌신된 삶을 살 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살 뿐 아니라 종말에 그 육체 또한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한다(야고1,19; 묵시21,4).
또한 '얻고도'에 해당하는 '케르데세'(kerdese; he gains)는 능동태인데 반해, '잃으면'에 해당하는 '제미오테'(zemiothe; lose)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태'(voice)는 본문의 의미를 더 깊이 있게 전달해 준다.
즉 이 문장은 사람이 온 세상(천하)을 얻고자 적극적으로 힘쓰는 노력은 자발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하느님께서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심은 인력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이 구절을 직역하면,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위한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what shall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이다.
한글 새 성경에서 '제 목숨을' 다음에 '주고'에 해당하는 '도세이'(dosei; shall give)가 빠져 있는데, 이것은 미래형이다.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일이 관습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격언적 미래형'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나타낸다. 결국 인간 생명의 최고 가치성과 생명의 단(일)회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앞절인 마르코 복음 8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최고로 소중히 여기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혼란을 가져오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인 진리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있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유한한 육적인 생명보다 훨씬 소중한 영생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영생의 큰 보상을 얻기 위해서는 그토록 소중한 목숨까지도 권능의 예수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는 각오를 촉구하신 것이다.
2022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사랑은 의무(義務)다.
독서(야고2,1.12-24.26)
1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12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 믿음이 있다면 차별할 수 없는 것이다. 부자(富者)든 가난(家難)한 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나를 좋아하든 미워하든, 모든 이들이 나와 같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유(自由)의 법(法),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죄를 용서받아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아들,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믿는 다면 누가 누구를 판단(判斷), 차별(差別)하겠는가. 믿음의 결과로 차별의 말과 행동이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13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큰 사랑으로 죄를 용서받는 그 예수님의 자비(慈悲)를 내가 입었다면 이웃도 하느님의 용서를 받도록 예수그리스도의 자비(慈悲)를 전(傳)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시간, 재물, 마음을 나누는 그 작은 자비의 행동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 믿음은 물과 같이 흐르게 된다는 것이다. 나누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흐리지 않는, 나누지 못하는 믿음은 가짜라는 것이다.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 믿음 없는 실천(實踐)은 자기‘의(義)’로 쌓여 구원(救援)에서 떨어지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곧 진리(眞理) 안에서 기도(祈禱), 예배(禮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4,23)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요한1,1) 1 원로인 내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인사합니다. 나는 그대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이 그대들을 사랑합니다.
= 진리(眞理) 안에서, 곧 진리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나”, 하느님의 사랑, 자비인 십자가의 대속, 그 피의 새 계약이신 그리스께서 구원, 생명의 길, 진리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의 복음, 그 새 계약을 구원의 진리, 양식, 옷으로 먹고 입고 믿는 것이 구원이다. (이사61,10 바룩5,2참조) 믿기에 영(靈)의 양식(養食), 옷과 같이 육(肉)의 양식, 옷을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을 때는 나의 자랑, 선(善), 의로움을 위해 했지만, 믿음으로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하는 참 사랑이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 마귀(魔鬼)는 도덕(道德)과 윤리(倫理), ‘선악(善惡)의 심판(審判)의 하느님’으로 ‘무섭고 두려운 하느님’으로 말하며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의 죄(罪)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容恕)하신, 그리고 의롭게 하신 그 인간의 지각(知覺)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니 그 큰 사랑, 큰 자비(慈悲)를 입었다면, 믿는다면 어찌 그 큰사랑, 자비를 이웃과 나누지 않겠는가.
20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 나누는 실천(實踐)이 없다면 가짜거나, 아직 믿음이 자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 아브라함은 목숨과 같은 자식(子息)을 바쳤다. 곧 자기 목숨을 바친 것이다.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 믿음의 결과는 자기 버림(부인(否認)이다.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신의 것, 곧 세상의 밀, 의(義), 부(富), 명예 등, 모두 구원(救援)에 부질없음, 가치 없음을 인정(認定)하는 그 자기부인(自己否認)이다. 그 자기 부인(버림)을 위한 것이 신앙생활(信仰生活)이다.
그래서 오늘복음~(마르8,34-35)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세상것)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하느님(주님)을 믿었을 때 할 수 있는 실천(實踐)이다.
23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2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 고인 물은 썩는다. 흘러야 썩지 않는다. 곧 용서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나만 간직하고 있다면 용서(容恕)가, 말씀이 썩는다는 것이다.
이웃과 나누는, 전하는 실천을 못하면 이웃이 하느님의 용서를 몰라 죽게 되는데, 그것이 곧 나의 죽음이 된다.
(1코린12,12.26-27)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히브13,1.3) 1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3 감옥에 갇힌 이들을 여러분도 함께 갇힌 것처럼 기억해 주고, 학대받는 이들을 여러분 자신이 몸으로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 예수님이 먼저 당신의 지체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罪)로 죽으신 그 새 계약의 의무(義務)를 실천하셨다. 사랑이다. 예수님처럼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사랑하고 기도(祈禱)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성경(聖經)적 의미를 올바르게 알고자 다른 분의 글에서 발췌(拔萃)했다.
< 사랑을 감상, 감성적(感性的)으로 풀면 우리는 하느님을, 이웃을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의 본질은 의로움이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로운 의무(義務)요 약속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사랑은 약속, 계약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1요한4,7-21) 그리고 그 아들을 속죄(贖罪)제물(祭物), 곧 새 계약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이 하느님의 의로움이라 말합니다.(로마3,23-26) 사랑은 의무입니다. 내 감정에 메이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죽이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 사랑입니다. 그것이 예수님 복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잃는, 버리는 사랑입니다.>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사랑은 의무이며 하느님께서 맡기신 직책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인연으로 맡겨주신 이들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힘과 지혜의 믿음을 주소서. 저희의 발과 마음을 붙드시어 그곳에 설 수 있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