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간 수요일] 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2-26)

2022. 2. 16. 오후 3: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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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2월 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무엇이 보이느냐? (마르 8,22-26)

 


제1독서<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야고 1,19-27)

19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이것을 알아 두십시오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20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6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15(14),2-3.3ㄴㄷ-4ㄱㄴ.5(◎ 1)

◎ 주님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누가 지내리이까?

○ 흠 없이 걸어가고의로운 일을 하며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 친구를 해치지 않으며이웃을 모욕하지 않는 이라네그는 악인을 업신여기지만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존중한다네

○ 이자를 받으려 돈놀이 않으며죄 없는 이를 해치는 뇌물 받지 않는다네이 모든 것 행하는 그 사람영원토록 흔들림 없으리라

 

복음<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보게 된다.> (마르 8,22-26)

22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 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야고1,19-27)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19~21)


야고보서 1장 2~18절에서는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바른 믿음의 자세에 대해 권면하였다.

이어지는 1장 19절~2장 26절은 야고보 서간의 전체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실천으로 입증될 수 있는 믿음, 곧 '행위와 믿음'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가운데 첫 단락이 1장 19절~27절인데, 말씀의 들음과 실천 및 오로지 실천으로만 입증되는 참된 신심(경건)에 대해 설파한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19)


구약 성경은 물론 유다교 문헌에서 이런 의미의 격언은 너무나 풍부하다 (잠언10,9; 13,3; 15,1; 29,20; 코헬7,9; 집회4,29; 1꿈란문헌5,25 등등). 일찍이 믿는 자들의 모임은 흔히 어떤 한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 졌고, 이 모임에서는 말씀이 선포되며 성경의 진리에 관한 토론들이 있어 왔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거나 토론하는 자세에 대해 바른 지침을 주고 있다.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을 가지고 귀기울여 경청한 다음, 충분히 생각한 후에 서서히 자기 의사를 드러내라는 것이다(잠언18,2). 그리고 '분노하기를 더디 하라'고 말한다.


여기서 '분노'라고 번역된 '오르겐'(orgen)의 원형 '오르게'(orge)는 ① 타고난 '성질', 기질', '성격'이란 뜻  마음의 움직임 또는 동요에 대한 '충동', '욕구'라는 뜻 ③ 온갖 격렬한 감정을 의미하는 '분노', '화', 진노'란 뜻이 있다. 본문에서는 세번째 뜻으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화를 안낼 수는 없겠지만(에페4,26), 성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며,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므로 할수만 있다면 화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분노에 더딘 이는 용사보다 낫고,  자신을 다스리는 이는 성을 정복한 자보다 낫다." (잠언16,32)


이 외에도 잠언 19장 11절, 12장 16절, 15장 1절, 25장 11절.15절 등에서는 분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식견이요, 대화시 합당한 말과 유순한 대답과 부드러운 혀를 통해 상대방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고 말한다.

19,11 ; "사람을 관대하는 만드는 것은 사람의 식견이고, 남의 허물을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은 그의 영광이다."

12,16 ; "미련한 자는 불쾌함을 바로 드러내지만 영리한 자는 모욕을 덮어 둔다."

15, 1 ;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괘한 말은 화를 돋운다"

25,11 ; "알맞게 표현된 말은 은 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와 같다"

25,15 ; "끈기는 판관을 설득하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

야고보서는 이같은 믿음에 대한 실천적 권면을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약의 잠언'이라 불리워진다.

그 다음, 야고보는 사람이 분노하는 것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대조시키면서 왜 사람이 화내기를 더디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분노의 감정 표출을 더디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로움'(디카이오시넨 테우; dikaiosinen theu)이 무엇인가?

① 하느님의 속성이며 세상을 통치하는 기본 원리인 공의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옳은 것; 시편 89,15)

②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③ 인간 행동 규범으로서 하느님의 기준인 이웃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분노하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한다. 분노하면, 마음의 판단력이 흔들리고 평정심이 무너져 하느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분노로 인한 마음의 황폐함이 사탄이 일하는 터를 만들어 줄 뿐 아니라하느님과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분노하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분노는 옛 사람의 그릇된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결과로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이루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 야고보의 이같은 명령의 직접적인 배경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고 저주하는 것을 금지한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마태5,22).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21)


'그러므로'로 변역된 접속사 '디오'(dio)로 시작함으로써 앞절의 분노하는 것과본절에 나오는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이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더러움'으로 번역된 '파산 뤼파리안'(phasan rypharian)에서 '뤼파리안'의 원형 '뤼파리아'(rypharia) '불결', '더러움'이란 뜻으로서 때로는 상처의 불결함이나 몸이 땀으로 얼룩지고 오물로 더러워진 것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본문에서 단 한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은유적으로 도덕적 더러움을 의미하면서 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특히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입으로 나가는 악한 말을 가리키고 있다(에페4,31).

또한 '넘치는 악' (페릿세이안 카키아스; pheriseian kakias)은 마음속에 있는 악이 솟구쳐 올라 밖으로 표출되어 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안에서 악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악의 속성이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 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모든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기만 하고 새로운 것으로 덧입지 않는다면, 그에게서는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본문은 '마음에 심겨진 복음의 진리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다'는 적극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손함'(온유함)에 해당하는 '프라우테티'(phrauteti)의 어근은 본래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진 상태, 고열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가 약으로 인해 진정된 상태, 갈증이 냉수로 인해 해갈된 상태 등을 말한다(마태5,5).

그런데 공손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즉 '마음에 심어진 말씀' 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 '로곤' '로고스'(logos; 말씀; word)의 목적격이며, '마음에 심어진'으로 번역된 '엠퓌톤'(emphiton)의 원형 '엠퓌토스'(emphitos)는 '가르침을 통해 심기워진'이란 뜻으로서 이미 사도들을 통하여 수신자들에게 심기워진 가르침(18절의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야고보는 심겨진 말씀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실을 "복음은 ~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고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는 사도 바오로의 진술(로마1,16)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복음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원리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삶 속의 윤리적 교훈도 포함되어 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22~25)

야고보는 19~21절에서 말씀을 신중히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서 들은 바를 실행하는 자세의 중요성 대해 언급한다.


아마도 야고보는 마태오 복음 7장 15~27절의 산상설교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이러한 원리는 로마서 2장 13절의 바오로에게도 나타난다.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행함으로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뿐더러 야고보가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속이는 자(사람)'으로 번역된 '파랄로기조메노이'(pharalogizomenoi)의 원형 '파랄로기조마이' (pharalogizomai) '위반','정도(正道)이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파라'(phara) '계산하다'란 뜻의 '로기조마이'(logizomai)가 결합된 동사로 '잘못 세다','잘못된 추론에 의해 기만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사람들 의식속에 내재되어 있는 잘못된 자기 합리화가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은 듣고도 행하지 않음으로서 단순히 지적인 깨달음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게 되는데도, 본인은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존재가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결국 영혼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야고2,14~26).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사람은 분명 자신의 얼굴을 통해서 주의 깊게 보기는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금방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 버린다. 더군다나 당시 거울은 동(bronze)으로 만들어져서 거기에 비추어지는 물체의 모습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의 깊게 보지만 정확한 모습을 보기 힘들고, 또 보고서 돌아서면 거울로 본 기억마저 희미해졌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발견했지만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지 않음으로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본 것이 무효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 18절의 '진리의 말씀'과 21절의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 (마음에 새겨진 말씀)과 일치한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곧 진리의 말씀인 복음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복음의 거울은 모든 성경의 진리를 다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어지는 27절과 2장 1~13절의 진술로 보아서 특히 이웃 사랑의 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유의'(자유하게 하는)로 번역된 '엘류테리아'(eluthdria)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통해 주실 자유(갈라5,1), 하느님의 영이 역사하는 곳에 임하는 자유(2코린3,17)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원죄 아래 있는 사람을 명백히 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복음은 이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자유를 구가하는 축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 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26~27)


여기서 '신심이 깊은', '신심'에 해당하는 형용사 '트레스코스'(threskos)와 명사 '트레스케이아'(threskeia) '떨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트레오'(treo)라는 어근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떠는', '신들에 대한 경외', '종교적인'이라는 의미이다(사도26,5; 콜로2,18).

그러나 여기서 앞서 나오는 '트레스코스' '종교적인', '신앙심 깊은', '경건한'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뒤에 나오는 '트레스케이아'는 1세기 당시 기도나 금식등으로 표현되는 종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종교적 행위들을 가지고 자신이 신심이 깊고 경건하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종교적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자신의 혀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을 속이면서 신심깊고 경건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의 종교적 행위는 헛된 것일수 밖에 없다.


'깨끗하고 흠없는 신심'에서 '카타라 카이 아미안토스'(kathara kai amiantos;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는 본래 구약의 제의적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으로서(에제22,26),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제물 또는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사제가 지녀야 할 필수 요건이다.

따라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경건)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경건이며, 이 경건의 모습은 먼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 보는 것으로 증거된다.


당시 종교, 사회적 배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부양해줄 사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법적 권리를 대변해 줄 자를 갖지 못한 가장 비참한 위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사랑의 실천 대상이 고아와 과부의 두 대상으로 한정되는 것은 아니고, 우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나그네 등 훨씬 포괄적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에서 '세상'(세속)에 해당하는 '코스무'(kosmu)는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악된 옛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속 사상, 가치관, 비도덕적 삶, 불경건한 심령 등을 두루 지칭한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거룩'이며 '경건'이다.


또한 '물들지 않도록'으로 번역된 '아스필론'의 원형 '아스필로스'(asphilos)는 부정 불변사 '아'(a) '점'(2베드2,13), '티'(에페5,27)로 번역된 '스필로스'(sphilos)의 합성어로서 원래 '흠없는','점없는','비난할 점이 없는' 이란 뜻으로 제의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1베드1,19).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 도덕적으로 순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2022년 02월 16일 수요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사이다의 어느 눈먼 이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치유가 단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점이 좀 특이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뚜렷하게 보지 못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셨고,

그제야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 눈먼 이의 치유가 매우 까다로운 것이어서

예수님께서도 애를 좀 먹으신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보다는 그의 시력이 단계적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제자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곁에서 쭉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그분을 아직 제대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꾸짖으셨지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오늘 복음에서 눈먼 이가

예수님의 첫 번째 시도로 어렴풋이 보게 된 이야기에 빗대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눈먼 이가 뚜렷이 볼 수 있도록 다시 눈에 손을 얹으셨듯이,

제자들의 몰이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올바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고는 있지만,

아직 어렴풋이 보는 상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당신 손을 우리의 두 눈에 얹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천 사도 요한 신부)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좀 특이한 모습이다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7,33b=8,23b)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옛날 어른들이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아픈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예가 있었다잠침을 발라준다고 하는데자고 일어난 후 어머니들이 침을 아픈데 발라주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다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에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눈을 가지고 있으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하느님의 뜻구원의 약속이 보이십니까?. 


(마르 8,22-26) 

22ㄱ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벳사이다주님께서 불행하다 말씀하신 지역입니다아람어 뱃새이(사냥꾼어부)에서 온 말이랍니다.

 

(마태11,21) 21 “불행하여라너 코라진아불행하여라너 벳사이다야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회개를 못해 불행한 곳입니다잘못(때문이 아닌 회개를 못해 불행한 그곳에 회개그 복을 주시려 들어가십니다.

 

22ㄴ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의 기적그 일하심을 죄의 용서로 깨닫지 못한(보지 못한눈먼 이입니다.

그리고 그 눈먼 이를 위해 기적의 손으로기적의 치유를 청하는 그들 또한 회개해야할 눈먼 이들입니다.

그래서 벳사이다가 불행한 곳입니다.

 

2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 귀먹고 말 못하는 이들처럼(7,31) 먼저 분리시키십니다그리고 그 보지 못하는 눈에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침곧 말씀을 주시고 물으십니다.

인간의 눈이 아닌 주님의 말씀을 통해 보게 하신 후 하시는 물으심 입니다.“무엇이 보이느냐?‘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사람들이 보입니다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말씀은 늘앞에 희망(용서)을 보게 하십니다지난 절망()을 보게 하시지 않습니다.(히브10,16참조)

그래서 복음(기쁜소식)입니다그 희망의 눈으로 보겠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남자(제라-후손여자(테무트-그릇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었을 때 그릇이 씨를 받아 드렸을 때 -사람입니다다시피조물인 땅여자가 하늘의 씨를 받아 드렸을 때사람입니다후손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눈먼 이가 아직 그 예수님과 하나 되지 못해 나무처럼 보입니다그런데 나무는 하느님의 구원의 계명계약을 뜻합니다.(탈출15,25) 계약(스타오로스)- 기둥(나무)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하느님의 구원의 계약(십자나무)으로 존재한다는 그 깨달음의 눈을 아직 갖지 못한 눈먼이입니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기적의 손그 창조의 손을 얹으시니곧 보지 못하는 그 잘못을 덮으시니 똑똑히 볼 수 있는말씀으로 볼 수 있는 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계약(나무)을 그 어렴풋이 아닌 구원의 약속계약(스타오로스-십자나무)을 진리로 똑똑히 보는 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주님의 말씀을 인간의 뜻그 길로 말하는 마을(공동체그 불행한 곳악한 곳으로 들어 가지 마라 하십니다그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시편1,1-2)  행복하여라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사람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되새기는기억하는 것 착한정결한 올바른 기도입니다.(레위11,3참조)

 

(마태6,9-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느님의 이름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찾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오늘 벳사이다의 말씀은 어부(벳새이)인 제자들에게 회개해야할 눈먼 이임을 깨달으라고보라고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뜻을 위해 말하고 듣고 기도하는 공동체-불행입니다.

주님당신의 침(말씀)을 원합니다오늘 땅인 여자들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지소서~~!

그러면 우주 만물과 내 삶 속에서 또한 구원의 약속 그 말씀을 보게깨닫게 될 것입니다.(로마1,20참조)

그러면 내 삶이 희망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 아멘 -*^^*-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2022년 2월 16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지금 살아있음은 내일의 생명(구원)을 위한 소중한 기회(機會).

 

독서(야고1,19-27)

19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이것을 알아 두십시오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20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의 말씀은 빨리 듣고사람의 말과 분노는 더디 하라.’는 말씀인데.... 곧 하느님의 뜻지혜계명을 사람의 뜻지혜계명으로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티토1,14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하늘의 의(), 거룩자유희망평화생명안식을 주는 선()이지만인간의 의()를 위한 도덕과 윤리의 인간의 말은 속박과 판단두려움으로 분노(忿怒)하게하는 악()이기 때문이다.

 

(로마3,19) 19 우리가 알다시피율법(제사윤리)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로마10,3)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코린5,21)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1코린2,5)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공손(恭遜)(플라테우스)-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단어하느님의 말씀으로 죄인(짐승)인 자신을 구원의 길로 길들이라는 것이다.

 

사도(使徒바오로의 옥중(獄中서간(書柬)을 보자~

(2티모1,8) 8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福音), 곧 하늘의 선(), 그 복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로마1,16)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코린1,18)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실행행위 이전에 말씀 안에 하느님의 선(), 지혜(智慧), 힘을 믿는 그 실천(實踐)을 먼저 해야 한다그 깨달음 없는 실행(實行)은 하느님의 뜻을 잊은곧 구원과 상관없는 자기 의로움의 실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6,33) 33 그러니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세상의 모든 죄()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시며 하늘의 의로움을 죄인(罪人)인 우리가 전가(傳家)받아 거저 의롭게 된다그 시쁜 소식새 계약의 복음을 깨달아 믿는다면 핍박(逼迫)을 각오하고 반드시 이웃에게 전()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1요한3,16)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시간마음)을 내놓아야 합니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당시의 거울은 구리로 만든 것으로 확실히 볼 수 없었기에 돌아서면 곧 잊어버린다그것은 말씀을 비유(比喩)한 것이다곧 말씀에 비추어보면 자신의 짐승(죄인)됨을 깨닫고 잊지 않아 용서(容恕)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께 돌아서는 그 실행(實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그것이 회개(悔改).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말씀은 심판(審判)의 법이 아닌 완전(完全)한 자유(自由)를 주는 법()이다그러니 그 기쁜 소식복음(福音)을 어찌 자신만 간직하고 있겠는가그러나 먼저자신이 그 복음 안에 머무는 실행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복음으로 자유기쁨을 체감(體感)해야 하느님의 자유기쁨을 주는 그 올바른 복음을 선포(宣布), 실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면 이웃과 함께 하느님의 자유로 서로 행복(幸福)해 진다곧 큰 계명의 실천인 이웃 사랑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26 누가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아 자기 마음을 속이면그 사람의 신심은 헛된 것입니다.

제 혀자신의 말을 하지 말아야 ,곧 인간의 뜻을 위한 인간의 지혜인 도덕과 윤리의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느님의 뜻하느님의 지혜(智慧)인 하늘의 대속(代贖), 그 구원의 말씀을 진리(眞理)로 말할 수 있고그 진리를 전()하는 것이 올바른 신심(信心)이다그 진리의 말씀과 하나 되지 못한 것이 고아(孤兒), 과부(寡婦)인 것이다.

 

27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다사도는 하느님을 주는 이웃사랑을 강조(强調)하고 있다세상의 재물(財物), 명예(名譽), ()과 짝하여 하느님의 뜻(말씀)과 짝하지 못한그래서 구원의 하느님을 아버지(남편)로 짝하지 못한 그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들에게 하느님을 짝으로 알려주어 살리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신(自身)이 세상(世上)과 짝하지 말라는 것이다곧 자신의 뜻(소원)을 위해 기도(祈禱)하지 말라는 것이다.

 

(1베드4,2) 2 *그러니 남은 지상 생활 동안더 이상 인간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1요한2,17)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생명(生命)을 주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 실천(實踐)....

 

(1데살5,16-18)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온갖 시련(試鍊), 풍랑(風浪)인 이 세상 삶에서 어떻게언제나 기뻐하며 감사(感謝)할 수 있을까? - 할 수 있다는 것이다곧 하늘을 희망(希望)하는 이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세상()에는 영생(永生)을 주는 희망(希望)이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記憶)하는 기도(祈禱)로 그 말씀이 주시는 희망(希望)으로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히브6,16-19)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이 두 가지로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지성소하늘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아멘!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지금()의 삶이 내일(하늘)의 삶을 살기 위한 귀하고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나이다땅에 숨겨진 하늘을 깨달아 자유기쁨의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살 수 있도록 말씀 안에 머물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이끌어 주소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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