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토요일]주님의 이름 (루카 10,17-24)

바룩 예언자는 유배자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며, 하느님의 위로와 권고를 전한다. (바룩 4,5-12.27-29)
5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내 백성아, 용기를 내어라.
6 너희가 이민족들에게 팔린 것은 멸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너희가 하느님을 진노하시게 하였기에 원수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7 사실 너희는, 하느님이 아니라 마귀들에게 제사를 바쳐 너희를 만드신 분을 분노하시게 하였다.
8 너희는 너희를 길러 주신 영원하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너희를 키워 준 예루살렘을 슬프게 하였다.
9 예루살렘은 너희에게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들어라, 시온의 이웃들아!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 슬픔을 내리셨다.
10 나는 영원하신 분께서 내 아들딸들에게 지우신 포로살이를 보았다.
11 나는 그들을 기쁨으로 키웠건만 슬픔과 눈물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12 과부가 되고 많은 사람에게 버림받은 나를 두고 아무도 기뻐하지 말아 다오. 나는 내 자식들의 죄 때문에 황폐해졌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멀리하였다.
27 아이들아, 용기를 내어 하느님께 부르짖어라. 이 재앙을 내리신 주님께서 너희를 기억해 주시리라.
28 너희 마음이 하느님을 떠나 방황하였으나 이제는 돌아서서 열 배로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한다.
29 그러면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신 그분께서 너희를 구원하시고 너희에게 영원한 기쁨을 안겨 주시리라.”
화답송 시편 69(68),33-35.36-37(◎ 34ㄱ)
◎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신다.
○ 가난한 이들아, 보고 즐거워하여라. 하느님 찾는 이들아,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 주님은 불쌍한 이의 간청을 들어 주시고, 사로잡힌 당신 백성을 멸시하지 않으신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과 땅아, 바다와 그 안에 사는 모든 것들아. ◎
○ 하느님은 시온을 구하시고, 유다의 성읍들을 세우신다. 그들이 거기에 머물며 그곳을 차지하고, 그분 종들의 후손이 그 땅을 물려받아, 그분 이름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곳에 살리라. ◎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루어졌다고 하시며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루카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제1독서(바룩4,5~12.27~29)
바룩서 4장 5절에서 5장 9절은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를 담고 있다. 바룩서의 마지막 부분은 격려와 위로의 시로 짜여 있는데, 그 문체가 제2이사야서와 매우 가깝다. 이 부분의 원어가 히브리 말인지 그리스 말인지 하는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에 쓰인 '솔로몬의 열한 번째 시편'이 바룩서의 이 부분과 매우 가까우나, 두 작품을 비교해 보면 바룩서의 이 부분이 솔로몬의 시편보다 오래 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유배 생활 초기로 잡고 이민족과의 화평정책을 권장하는 역사적 서문이나 참회 기도와는 달리, 이 부분은 이민족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곧 돌아올 것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처음의 두 부분과 전혀 다른 시대적 상황과 세계를 배경으로 하며, 기원전 63년 이전, 아마도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셀레우코스 왕조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하스몬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성공으로 용기를 얻게 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저술했으리라고 본다.
한편 예루살렘을 위한 이 권고는 별 어려움 없이 참회 전례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 같다.
"나는 평화로울 때 입던 옷을 벗고 기도할 때 입는 자루옷을 둘렀다. 나는 영원하신 분께 한평생 부르짖으리라."(바룩4,20)
여기서 '기도의 자루옷'은 참회 전례의 가장 두드러진 의식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이라는 호칭이 독립된 형태로 쓰인 곳은 성경에서 바룩서 말고는 없는데, 하느님과 그분 계획의 불변성을 강조하고자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바룩4,10.14.22.24.35; 5,2).
이 부분은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적 탄원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신탁 형식으로 주신 응답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익명의 예언자는 신명기 32장에서 영감을 받아 유배자들에게 권고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유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상기시킨다(바룩4,5~9ㄱ).
그 다음 애가 1장에서처럼 인격화된 예루살렘이 말을 이어 가는데(바룩4,9ㄴ~29), 예루살렘은 시온의 이웃들에게 하소연을 쏟아 놓고 나서(바룩4,9ㄴ~16)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라고 유배자들을 위로한다(바룩4,17~29).
끝으로 예언자가 다시 말을 받아 예루살렘에 권고의 메시지를 보낸다(바룩4,30~5,9).
이 메시지의 주제와 내용은 이사야서 40~55장과 이사야서 60~62장의 것들과 가깝다.
여기서 에언자는 먼저 원수들에게 내릴 징벌을 알리고(바룩4,30~35), 예루살렘에게 자녀들이 개선하여 돌아와 한데 모이게 될 날을 상기시키면서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한다(바룩4,36~5,9).
첫째, 유배의 진정한 의미이다. 유배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이름과 계약을 다시 기억하고, 자신들의 죄악에서 유일한 하느님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둘째, 토라(모세오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죽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지혜의 샘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토라를 저버린 탓이다. 바룩서는 토라를 소유한 이는 다른 지혜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세째, 바룩서의 저자도 애가의 저자처럼 예루살렘을 여성으로 인격화한다. 다만 애가는 시온(예루살렘)을 딸로 표현한 데 반해, 바룩은 홀어미를 표현한다.
이 홀어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식들마저 낯선 땅으로 떠나 보내고 지금 큰 슬픔에 잠겨 있는데, 바룩서 저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낯선 땅에서 돌려보내시리라고 절망에 빠진 홀어미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를 들어 올리시고, 정의와 평화와 거룩함의 새로운 소명을 주실 것이라 선언한다(5,3-5).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0,17-24)
그때에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17~20)
루카 복음 10장 1~16절은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파견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10장 17~20절은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교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뻐하며'에 해당하는 '메타 카라스'(meta charas; with joy)는 '기쁨과 함께'라는 말인데, '메타'(meta)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기쁨에 넘쳐 있었던 구체적 이유가 다음에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것(루카9,1)과 마찬가지로, 일흔두 제자에게도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이것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를 쫓아냈다고 보고한 사실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루카 복음 사가는 제자들을 파견한 당사자를 '주님께서는'(루카10,1)이라고 기록하여 제자들이 행하는 모든 권세와 권한이 예수님께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17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여기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 kyrie)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이 마귀들의 복종을 받아낸 것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이름 때문에'로 번역된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 in your name)가 잘 말해준다.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는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 안에서'이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이름, 즉 '오노마'(onoma)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본질적 속성이나 실체 및 그 실체의 권위를 의미한다(요한5,43; 10,25; 사도10,48).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17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 구마의 이적이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든 권세의 원천은 예수님이시며, 제자들은 단시 그 권세를 받아 행하는 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합니다'에 해당하는 '휘포탓세타이'(hypotassetai; are subject; submit)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는 뜻을 지닌 '휘포탓소'(hypotasso)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복종하고 있습니다', '굴복하고 있습니다'는 뜻이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과거인데, 제자들이 현재 시제 동사로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마 행위를 한 것이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어서, 예수님 앞에 보고하고 있을 때에도 그 일이 눈앞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18절에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보았다'라고 번역된 '에테오룬'(etheorun; I saw; I behold)의 원형 '테오레오'(theoreo)는 깊은 흥미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사령관으로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시고 아주 세밀하게 영계의 모습을 지켜보신 것이다.
이 동사가 계속적이거나 반복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일흔두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묵시록 12장 7절~10절, 13절과 요한 복음 12장 31절에도 나오지만, 여기서 일흔두 제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구마 이적은 종말론적으로 사탄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 주는 명백한 표적임과 동시에,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효과를 나타낸다(루카11,18~22; 마르3,27).
그리고 루카 복음 10장 19절에 나오는 '뱀과 전갈'은 둘 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짐승들인데, 이것들은 사탄의 세력들을 상징할 때 주로 사용된다 (창세3,1~15; 시편91,13; 2코린11,3; 묵시9,3.5.10).
따라서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루카 복음 10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 일흔두 제자에게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끝으로,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이 아니고 ~으로'에 해당하는 '메~데' (me~ de; not ~but)라는 문장 구조인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문을 살펴본다.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말씀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묵시20, 12.15)에 기록되어 구원받게 된 것에 비하면 구마 이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마귀를 쫓아낸다고해서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되는 것도 아니다(루카7,22.23).
구마 이적의 능력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부가적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으로 번역된 '엥게그랍타이'(enggegraptai; are written)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그라포'(enggrapho)의 완료 수동태이다.
이 단어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 나라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된 점을 통해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가 바로 선택과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늘 나라의 봉사자로 불리운 자들은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되고, 겸손되이 모든 권세와 능력과 은사의 원천이신 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