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나를 따라라(마태 9,9-13)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한다. (에페 4,1-7.11-13)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7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11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
12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5ㄱ)
◎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음식을 드시며, 당신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신다. (마태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독서 (에페4,1-7.11-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13)
에페소서 4장 7-12절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주시는 은사에 따른 직무들을 소개하며, 각 직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13-15절에서 교회는 일치하여 그리스도의 성숙한 경지에까지 성장해야 함을 언급한다. 한편 본문에서 바오로는 성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일치를 이룬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믿음과 지식의 통일성을 말한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지식에 기초한다. 교회는 바로 이런 믿음과 지식의 일치 위에서만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하는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지식은 단순한 지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식'에 해당하는 '에피그노세오스'(epignoseos)의 원형 '에피그노시스'(epignosis)는 그 자체로서 이미 '지식'이란 뜻을 가진 '그노시스'(gnosis)에 강조의 뜻을 지닌 접두어 '에피'(epi)가 결합된 단어로서, 본질적이며 철저한 지식을 강조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페소서 1장 17절을 통해서 볼 때에도, 이 지식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만 얻어질 수 있는 본질적인 지식이다.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도 거의 모든 이단의 출발이 그리스도께 대한 잘못된 이해와 지식에서 출발했다는 과거 교회 역사의 경험은 그리스도교적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충분히 알게 해준다.
'성숙한 사람이 되며' 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안드라 텔레이온'(eis andra teleion)이다. 전치사 '에이스'(eis)는 지향을 나타내기도 하고 결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일치를 이룸으로써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이 전치사가 밝혀준다.
또한 '성숙한'으로 번역된 '텔레이온'(teleion)의 원형 '텔레이오스'(teleios)는 '온전한',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은', '완전하게 되는 데 필요한'이라는 의미이며, 이것이 '사람'에 대해 쓰이면 '성숙한'(mature), '완전히 자란'(fullgrown)이라는 의미가 된다.
코린토 전서 13장 10절과 11절에서 이 단어는 '아이' 즉 '네피오스'(nepios)와 대조적으로 쓰였다. 또한 코린토 전서 14장 20절에서는 아이에 대조되는 '어른'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본문에서는 '성인 남자'를 의미하는 '안드라'(andra)를 수식하고 있으므로, '안드라 텔레이온'(andra teleion)은 완전히 장성하고 성숙하여 더 이상 성장이 필요없는 온전한 인간 개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육체적인 측면을 가리키지 않고 영적인 측면을 가리키며, 모든 믿는 자들과 교회가 이에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메트론 헬리키아스 투 플레로마토스 투 크리스투' (eis metron helikias tu pleromatos tu christu)이다.
여기서 '헬리키아스'(helikias)는 '발달', '성장', '진보', '장성', '성숙'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영어로 하면 'stature' 이다.
따라서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성숙 분량에 까지' (to the measure of the stature of the fullness of christ)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성숙'이란 '그리스도께서 지니고 있는 완전한 충만'을 말하며, 다시말해 '하느님의 충만 그 자체'를 의미한다.
한편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제시한다. 교히 성장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까지 다다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이며, 그들은 다른 종교에서 추구하듯이 인간 자신의 道를 위한 명상이나 선(禪), 인간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해탈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모상의 온전한 모습인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람들이다. (로마8,29)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초자연적 사랑이요 도우심인 성령을, 기도와 성사를 통해 먼저 구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감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 (갈라4,19)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는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의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도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것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복음: 마태 9,9-13: “나를 따라 오라”. 그는 예수를 즉시 따라 나섰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를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런 인간임을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 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