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제26주간 월요일]가장 큰 사람 (루카 9,46-50)

2019. 9. 30. 오전 4:4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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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26주간 월요일]가장 큰 사람(루카 9,46-50)


즈카르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즈카  8,1-8)
1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온에 커다란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니고 있다.
3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4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5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
6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이것이 이 백성의 남은 자들 눈에 신기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내 눈에까지 신기하게 보이겠느냐? 만군의 주님의 말이다.
7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 뜨는 땅과 해 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8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화답송 시편 102(101),16-18.19-21.29와 22-23(◎ 17)
◎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리이다.
○ 민족들이 주님 이름을, 세상 모든 임금이 당신 영광을 경외하리이다. 주님은 시온을 세우시고, 영광 속에 나타나시어, 헐벗은 이들의 기도를 굽어 들어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리라. ◎
○ 오는 세대를 위하여 글로 남기리니, 새로 창조될 백성이 주님을 찬양하리라. 주님이 드높은 성소에서 내려다보시고,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니, 포로의 신음을 들으시고, 죽음에 붙여진 이들을 풀어 주시리라. ◎
○ “당신 종들의 자손은 편안히 살아가고, 그 후손은 당신 앞에 굳게 서 있으리이다.” 주님이 시온에서 당신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당신 찬양을 전하시리라. 그때에 백성들과 나라들이, 주님을 섬기러 모여들리라. ◎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 (복음/루카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즈카8,1-8)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리라.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3)



즈카르야서 8장 3절8장 2절에서 제시된 것과 같이 하느님께서 시온에 대해 격렬한 열정을 지니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시온에 돌아와 그곳에 살 것임을 지적한다.


여기서는 두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 하나는 '내가 돌아가'에 해당하는 '샤브티'(shabthi)이고, 다른 하나는 '살리라'에 해당하는 '웨샤카느티'(weshakanthi)이다.


새 성경의 번역을 통해서는 각각의 동사의 시제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상 이 두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먼저 '샤브티'는 완료 시제로서 이미 하느님께서 시온에 돌아와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에 '웨샤카느티'는 계속적 용법의 접속사 '와우'(wau)와 더불어 완료형 동사가 사용되어 지속과 계속, 미래의 상태를 나타낸다.


즉 본문은 하느님께서 이미 시온에 돌아오셨다는 것과 장차 앞으로 영원히 예루살렘 한가운데 살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은 동일한 이름이며, 성전이 재건될 곳으로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성읍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이미 그곳으로 돌아오셨다는 것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켜 그곳으로 귀환케 하셨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알아들 수 있다.

그리고 접속사 '와우'(wau)가 계속적 용법으로 사용될 경우에 이어지는 완료 동사는 미완료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예루살렘에 살 것이라는 약속은 성전의 재건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사신다는 것, 즉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한다.

따라서 성전의 재건은 하느님 임재의 확실한 증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더불어 친교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구약의 제2성전이라고 할 수 있는 쯔룹바벨 성전과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먼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께서 새 예루살렘에 머무실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것이다.


특히 '웨샤카느티'(weshakanthi)의 원형 '샤칸'(shakan)원래 유목 사회에서 양을 치기 위해 풀밭을 찾으며 장막(tent)을 치고 머무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다(창세9,27).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께서 성소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실 때에도 사용되었다(탈출25,8).

구원사적 맥락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는 진술이 제시된다.

또한 요한 묵시록에서도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묵시21,3)라는 진술이 나온다.


여기서 '사시고', '거처하시고', '계시고'라는 표현에 사용된 희랍어는 모두 '스케노오'(skenoo; live; dwell)이다. 이처럼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구절들에 동일하게 사용된 동사 '스케노오'는 모두 다 본문에 사용된 동사 '샤칸'(shakan)과 관련된 표현이다.


이상의 관련된 성경 구절들과 거기에 반복사용된 표현들은 본문에 제시된 약속이 장차 구원사적 발전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통해 완전히 성취될 것임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은 '진실한 도성'이라고,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리라." 



본절 후반절은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 머무시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먼저 그곳은 '진실한 도성'이란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거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곳에 '진리'가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멸망 이전의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진리가 아닌 거짓 예언자들이 마음으로 지어낸 헛된 말을 좇았으며, 백성들이 서로에 대해 거짓을 일삼고, 심지어 진실과 진리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법정에서조차 뇌물과 정치적 알력, 개인의 이기적 동기로 인해 진리를 외면하였다.


실로 예루살렘은 거짓과 불의, 속임이 난무하는 도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 성읍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은  다만 성전이 세워지고 성벽을 굳건히 쌓고,  성읍의 거주민들이 늘어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다.


하느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은 다름아닌 진리를 회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진실한 도성'으로 번역된 '이르 하에메트'(ir haemeth; the City of Truth)바로 그곳이 '진리'를 행하는 성읍. '진리'를 세상에 널리 드러내는 성읍으로 불릴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만군의 주님의 산은 거룩한 산으로 불리리라'에서, 시온이 '거룩한 산'('하르 학코데쉬'; har haqodesh; the Holy Mountain)으로 불리움을 받는다는 말은 그곳에 성전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거룩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세워진 산이기 때문에 거룩한 산으로 불리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진술은 '거룩한 산'에 거주하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 오셔서 당신의 계명과 율법을 모세를 통해 주실 때에 모세에게 이틀 동안 백성들을 정결케 하고, 그 옷을 빨아 준비하게 한 후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셨다.

그리고 그처럼 정결케 한 이후에도 함부로 하느님의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셨다(탈출19,5-12).


과거 모세 시절에도 그러했다면, 하느님꼐서 직접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시온에서는 어떠할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하느님께서는 시온이 예표하는, 정차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관련해 "그러나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21,27)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룩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자만이 '거룩한 산'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당시 정황과 관련해, 성전 재건으로 예루살렘이 하느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산'이 된다는 의미에 더하여, 신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지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면모를 예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제자들은 논쟁했습니다.

  ‘누가 높은 사람인가?’ 우리 역시 가끔은 따집니다. 모임이나 식사 때 ‘자리 배정’에 신경을 씁니다. 말은 안 해도, 제대로 되었는지 관심을 가집니다.

  권력과 이권이 개입된 자리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능력 있고 ‘자격 있는’ 사람이 윗자리에 앉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런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한 명을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이런 어린이를 제대로 받아 줄 수 있겠는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눈치 보지 않고 사랑으로 가까이 갈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 당시 어린이는 ‘약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자격의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말 없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껴안으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를 늘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앞에서 ‘튀는 사람만’ 붙잡으면 점점 옹졸해집니다. 눈앞의 사건에만 매달리면 멀리 보지 못하게 됩니다.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릅니다.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릅니다. ‘ 속 깊은 사람’은 깊은 강을 닮기 마련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 합니다.







오늘의 묵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오로지 하느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행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비 자체이신 주님께서 선악과가 아까워 그들을 내쫓으셨을 리 만무합니다.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인간이 하느님 행세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처럼 사람을 심판한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이 주님 앞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도 심판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아담은 하와 탓을 하였고 하와는 뱀 탓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죄는 결국 마음이 좁아지게 만들어 서로를 심판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은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은 포용력과 직결됩니다. 가장 작은 이를 받아들인다면 하느님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깊은 계곡이 물을 받아들이듯 깊은 겸손이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힘입니다.교만하면 죄를 짓고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다른 사람을 심판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죄가 없으니 이웃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을 심판하면서 동시에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판단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도 죄도 따라서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안아 줄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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