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수요일]참포도나무 (요한 15,1-8)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자,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예루살렘에 모인다. (사도15,1-6)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3 이렇게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견된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 가면서, 다른 민족들이 하느님께 돌아선 이야기를 해 주어 모든 형제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4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 사도들과 원로들의 영접을 받고,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보고하였다.
5 그런데 바리사이파에 속하였다가 믿게 된 사람 몇이 나서서, “그들에게 할례를 베풀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참포도나무라고 하시며, 당신 안에 머무르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요한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사도15,1-6)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1-2)
사도행전 15장은 사도행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당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심각하게 대두된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도들과 원로들이 역사상 최초의 그리스도교 종교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를 열게 되었다.
사도행전 저자가 이 사건을 특히 바오로의 제1차 이방 선교 여행을 기록한 13장과 14장 직후에 기록한 것도 의의가 있다.
바오로의 선교를 통해 믿은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외의 것 즉 유다인의 전통과 같은 것은 구원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까지는 대략 1년여의 시간이 흘렀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개최시기는 A.D.49년경으로 추정된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1)
여기에서 '관습에 따라'로 번역된 단어는 '에테이'(ethei)이다. 이 단어의 원형 '에토스'(ethos)는 성문 율법을 가리키는 '노모스'(nomos)와 달리 법적인 구속력이 없이 사람들의 관습과 관례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들 유다인들이 '노모스'라는 단어를 쓰지않고, '에토스'라는 단어를 쓴 것은 할례라는 행위가 십계명 같은 곳에 법조문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지 하느님께서 제정하셔서(창세17,10-14) 유다인들이 계약 백성의 표시로 전통적으로 행해 오고 있는 관례이기 때문이다.
사실 할례가 유다인들에게 법적 구속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계약 백성에서 끊어지기 때문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남자, 곧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그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잘려 나가야 한다. 그는 내 계약을 깨뜨린 자다." (창세17,14)
그러나 이런 할례는 하느님의 계약 백성이 되었다는 외적 표시일 뿐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절대 조건은 될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게 된(로마1,17) 이방인들의 경우 할례의 과정이 필요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협한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이 유다인들은 방편적으로 주어진 계약의 표징을 절대시하여 이방인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잘못된 가르침을 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으로 자유롭게 하신 자들을 다시 종의 멍에로 얽어 매는 것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무익하게 하는 것이었다(갈라5,1-2).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1)
'구원을 받을'로 번역된 '소테나이'(sothenai)는 원형 '소조'(sozo)의 부정(不定; Indefinite) 과거 수동태 부정사이다. 사실 '소조'는 죽음이나 위험이나 병 등에 놓임을 받은 때에는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본절에서처럼 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 쓰인 경우는 성경에서 본절에서 말고 7번 나오는데, 모두 메시아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였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성혈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며 반 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다.
한편 '~수 없습니다'로 번역된 '뒤나스테'(dynasthe)는 현재 직설법이다.
구원을 받는 것이 장차 결정될 미래의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부정어 '우'(u)와 더불어 현재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주의자들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너무나 확실하게 주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그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할례받음과 구원을, 조건과 결과로 규정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그릇된 주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다인 출신의 개종자들의 주장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돌아와 안티오키아에 머물러 있던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충격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출범하기 시작한 이방인 교회의 정체성을 흔들고 유다주의로 회귀하게 하는 위험천만한 주장이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이 안티오키아 교회 내에 큰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할례를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 사이에 분쟁과 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방인 할례에 관한 문제가 안티오키아 교회 자체에서 해결되지 않아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및 다른 몇 사람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형제들이 ~ 하였다(작정하였다)'로 번역된 '에탁산'(etaksan)이 '결정하다'는 뜻이 있는 '탓소'(tasso)의 3인칭 복수 부정(不定) 과거형이란 점에서 잘 보여진다.
즉 이 단어에는 교회의 회중들이 확고하게 결정을 내렸다는 뉘앙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예루살렘 모교회가 모든 교회의 모체로서 사도들과 원로들이 있어 교리적인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루기에 적합하다고 여겼으며, 또한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어서 그들의 의견을 듣기에도 용이했기 때문에 내려졌을 것이다.
또한 '올라가기로'로 번역된 '아나바이네인'(anabainein)은 '올려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나바이노'(anabaino)의 부정사로서 '올려보낼 것을'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이 안티오키아보다 고지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루살렘을 높이 표현하는 당시 보편적인 어법 때문이기도 하다.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복음(요한15,1~8)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3~4)
요한 복음 15장 1절에서 당신 자신을 포도나무로, 성부 하느님을 농부로 비유하신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15장 2절에서 그 관심을 당신 자신과 일치해야 할 사람들에게도 돌리신다.
즉 이 비유의 최종적인 관심인 열매를 맺어야 할 가지에 대해 언급하신다.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에 해당하는 '아이레이'(airei; He cuts off; He takes away)는 '아이로'(air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여기서 현재 시제는 변함없는 진리를 나타낸다. 이 동사는 '치우다', '없이 하다', '제거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 즉 '이것을'(새 성경에서는 번역을 안했음)에 해당하는 '아우토'(auto)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이다'이다.
그런데, '내 안에 있으면서도('엔 에모이'; en emoi'; in me)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가?
첫째는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구원사의 주역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포도나무였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야를 자신들 가운데 보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 가운데 오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열매를 내지 못하는 무익한 가지처럼 되어 버리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거부한 그들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로마11,21)
그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을 가진 자신들에게만 하느님의 약속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껍데기 유대인이 아니라 참된 유대인,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갈라3,7.9)
둘째는 껍데기 그리스도인, 즉 실천(행함; 행실)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예수님 안에 있다고 여기고 믿음이 있음을 자랑하면서, 실천이 없는 이들은 실상 믿음이 없는 자이며(야고2,26;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에 참여하지 못한다.
믿음은 실천을 통해서만 증거된다. 입술 안의 고백은 믿음의 잣대가 될 수 없다.
말만 신자, 무늬만 신자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아니며, 믿음의 생활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열매맺는 가지는 모두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요한 복음 15장 2절은 원문을 보면, 쉼표가 있는 두 가지 다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앞과 뒤의 두 문장이 내용상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깨끗이 손질하시어'(깨끗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카타리레이'(katharirei; He prunes)는 앞의 '다 쳐내시고'에 해당하는 '아이레이'(airei; He takes way) 와는 다른 동사이다.
이것은 요한 복음 15장 3절에 나오는 '깨끗하게'에 해당하는 '카타로이' (katharoi)와 같은 어근이다.
요한 복음 15장 2절의 전반절은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쳐냄을 당하는 (잘리어 지는) 비참한 가지에 대한 언급을 한 반면에, 요한 복음 15장 2절의 후반절은 반대로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기 위해 정결케 하는 가지에 대한 언급을 했다.
한편, '깨끗이 손질하시어'에 해당하는 '카타리레이'(katharirei)는 '카타이로' (kathair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이며, 물리적인 의미 뿐 아니라 도덕적, 종교적으로 '깨끗하게 하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가지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취하시는 조치를 말한다.
포도밭 주인(포도밭지기)이 열매 맺는 가지들을 잘 손질해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열매맺는 자녀들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사실 이 단어의 의미가 문자적으로 나무를 다듬거나 가지치기를 의미하고, 영적으로 심신 정화를 의미한다면, 이러한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때로는 고난이나 시련일 수 있다.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야고1,2~4)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3)
이것은 이미 깨끗하게 된 상태,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의화(義化; justification)의 상태를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이 요한 복음 15장 1~2절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선포해온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말하는데, 이 모든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믿게 되어 의로움의 상태가 되었다는 말이다.
반면에, 앞의 요한 복음 15장 2절은 이렇게 의화(義化)된 이후,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성화(聖化; anctification)를 말하는데, 성화(聖化)의 삶이 필요하고 요구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토마토 씨는 작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그 씨 자체가 토마토라고 믿으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망상’입니다. 씨를 심고 잘 가꾸면 토마토가 열리는 튼실한 줄기로 성장하리라고 희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으면 믿는 것을 성취하려는 노력이 따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분에게 행복하게 머무를 때 열매를 맺으며 이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하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가 영그는 동안 인내심 있게 그분께 머물며 열매를 가꾸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아기는 부모를 믿고 발을 떼면서 걷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를 신뢰할 때 두 발로 걷기 위한 노력이 시작됩니다. 믿음은 이렇게 작은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나의 변화가 내가 예수님께 붙어 있어 조금씩 열매를 맺어 간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하루가 어제와 변한 것이 없다면, 나는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날마다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야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기도 시간이나 성경을 읽는 시간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를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참믿음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일 년을 어떻게 살아야 하고, 한 달을, 일주일을, 그리고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어 명확한 변화가 일어나게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