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속의 보물찾기: 제5,6,9,10계명

2008. 12. 1. 오후 3:07:53

글자

십계명 속의 보물찾기: 제5계명

 

 
비엔나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있을 때 윤리신학 시험을 구두시험으로 치렀다. 그때 교수님에게서 받았던 물음들 가운데 15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아주 재미있는 물음이 하나 있었다.

  지금 당신이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갑자기 한 괴한이 나타나 총기를 들고 인질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돼 이미 몇 사람이 희생당했고 분위기가 더욱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당신에게 그를 제거할 기회가 옵니다. 당신은 호신용 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당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당신의 움직임을 보지 못합니다. 자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필자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자를 쏘겠습니다.

 교수님이 다시 물었다. 살인은 제5계명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필자가 대답했다.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동등한 가치가 서로 대치 국면에 있을 때 우선적 선택의 원리를 따를 것을 권장합니다. 곧 생명과 생명이 대립돼 부득이 한쪽을 희생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할 때 다수의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원리 말입니다. 미치광이 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선량한 여러 사람이 산다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입니다.

 교수님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어주셨다. 그 때 필자는 정당방위론 은 피력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질문 의도가 불가피한 우선 선택의 원리 를 묻고자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생명과 관련된 사안은 참으로 미묘하다. 때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양난 상황에 빠뜨리기도 한다. 요즘 세간에 떠들썩한 배아복제 문제도 우리에게 냉철한 식별과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인가?

 상식 수준의 정보만 가지고는 이 물음에 올바로 답할 수가 없다. 이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 있으려면 정확한 정보와 올바른 가치관이 요구된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어설픈 정보와 혼란스런 가치관으로 여론몰이에 휩쓸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 이어야 할 것이다.

 제5계명 살인하지 말라 (마태 5 21; 탈출 20 13 참조)는 계명을 글자 그대로 알아들으면 상식적 삶을 사는 사람들과는 별로 상관없는 계명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계명의 본래 의도를 바꿔 표현해 보면 생명을 존중하라 또는 생명을 사랑하라 는 의미가 된다.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제5계명은 우리 일상 삶에 가장 긴밀히 연관돼 있는 계명이라는 말이 된다.
 실로 예수님은 제5계명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던 율법학자들을 겨냥해 그 함의를 밝히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을 상기시키시며 여기에 분노와 증오와 복수하는 일까지 금지하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뺨을 내밀 것과 원수를 사랑할 것을 당신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는 계명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라 는 깊은 영성을 끄집어내셨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비약에 가까운 가르침이 가능할까? 이를 성서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 으로 창조됐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 1 26-27).
 사람의 생명이 이처럼 하느님의 모상 을 지녔다는 말은 사람이 절대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녔다는 얘기가 된다. 히브리어에서 닮았다 는 것을 표현해 주는 단어로 데무트(demut) 와 셀렘(selem) 이 있다. 데무트는 겉모습만 닮은 것을 의미하고 셀렘은 안팎이 닮은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모상을 뜻하는 단어로 셀렘 이 사용됐다. 즉 인간은 하느님을 안팎으로 다시 말해서 내용과 성질까지 닮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 생명에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생성 시초부터 하느님 창조 행위에 연결되며 또한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한 창조주와 영원히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무죄한 인간의 목숨을 직접 해칠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258항).
 사람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특히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미약한 생명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태아 노약자 장애우 등 모든 나약한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고 일체의 훼손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자살 안락사 등도 결국은 살인 행위로 간주된다.

 우리가 소홀히 여기기 쉬운 욕설과 폭력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미움도 작은 살인이라 할 수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5년 반포된 회칙 「생명의 복음(Evangelium Vitae)」과 2000년 성탄 메시지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다양한 양태의 죽음의 문화 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교회가 이에 대항해 생명의 문화 창달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실로 카인의 범죄 이후 인류 역사에서 자행된 살인 전쟁 집단 학살 가난 영양실조 기아 낙태 안락사 대규모 출산 통제 등 생명 파괴는 첨단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해 마침내 반생명적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비극적 현실에서 다시 생명의 문화 를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하느님을 생명의 창조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생명의 충만 영원한 생명의 중재자로 성령을 모든 생명의 동력(動力)으로 체험하는 것을 핵심 신앙으로 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생명의 외경과 수호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부르심이라 할 수 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 4).

십계명 속의 보물찾기: 제6계명

 

 
독일어권 사목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이며 필자의 지도교수인 쮸레너(P.M. Zulehner) 교수는 이혼자들을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는 이혼자들의 신앙생활 실태에 대한 통계 분석을 바탕으로 그들을 위한 교회의 사목적 돌봄(pastoral care)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해 왔다. 그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지난날 유럽 사회가 높은 이혼율로 진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위 공부를 하고 있을 때만 해도 한국 사회는 아직 이혼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지 않고 있던 터라 쮸레너 교수의 고민이 크게 실감나지 않았다. 독신 동거 이혼 등 현상이 한국의 특징적 사회문화 현실이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 이혼율은 세계 1 2위를 다투고 있는 실정이다. 이혼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요즘은 좀 그 기세가 수그러들었다지만 너무 경솔하게 이혼하고 있다. 물론 저마다 사정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라볼 때 필자에게는 쮸레너 교수가 연구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 가슴 아프게 상기된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혼은 아무리 아닌 척하고 무시하려 해도 그 당사자에게 인생 최대의 상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심층분석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남들도 다 하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 결정했어도 그 당사자와 자녀들 가슴에는 가장 깊은 상흔을 남기는 것이 이혼이라는 얘기였다. 아무리 큰 소리 쳐도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이혼이 무의식 속에 남겨놓은 상처만은 감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방금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만큼 가정이 소중하다는 얘기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가정은 모든 사람의 실존적 둥지다. 가정이 흔들리면 실존 자체가 흔들린다는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 는 제6계명은 가정이라는 소중한 보물과 관련된 계명이다. 우리는 이 계명을 가정을 파괴하지 말라 는 계명으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가정의 소중함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오늘 한국 사회는 이 당연한 진실을 너무나 소홀히 여긴 나머지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이 시대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모든 병폐의 기저에서 가정 해체 라는 심각한 증상이 그 근원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금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가정은 모든 인간 관계의 출발점이자 수렴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과격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가정이 건전하면 사회가 건전하게 되며 가정이 타락하고 파괴되면 사회가 타락하고 파괴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모든 심각한 문제들은 가정에서 비롯되고 있기에 가정에서부터 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가정이야말로 세계와 교회의 장래 (「가정 공동체」 75항)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정은 보호되고 유지될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정은 사랑과 생명이 가장 충만히 드러나는 곳으로 존재의 근거이며 보금자리이다.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생존 근거를 허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음 으로 총칭된 모든 유형의 성적 문란이나 타락으로 인해 가정 이 파괴되는 불행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조 의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정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려면 각 개인의 노력이 매우 필요하지만 동시에 문화적 노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인간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하며 특히 인간생활의 도덕적 정신적 차원을 존중하는 정보와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전제로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44항 참조).
 가정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 사회가 당면한 최대 과제임에 틀림없다. 가정을 온전히 보전하려면 성(性)의 거룩함을 보전할 줄 알아야 한다. 구약 토빗기에 나오는 토비야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에서 우리는 그 실제적 이상(理想)을 발견한다.

  부모가 방에서 나가 문을 닫자 토비야는 침상에서 일어나 사라에게 말하였다. 여보 일어나구려. 우리 주님께 기도하며 우리에게 자비와 구원을 내려 주십사고 간청합시다. 사라가 일어나자 그들은 자기들에게 구원이 이뤄지기를 간청했다. 토비야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협력자며 협조자로 아내 하와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둘에게서 인류가 나왔습니다.
 당신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와 닮은 협력자를 우리가 만들어 주자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욕정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저의 이 친족 누이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저와 이 여자가 자비를 얻어  함께 해로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들은 아멘 아멘 하고 함께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날 밤 잠을 잤다 (토빗 8 4-9).
 여기서 성(性)은 부부간 사랑의 표현과 자녀 출산을 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선물(「가톨릭교회교리서」 2363항)이라는 사실이 아름답게 고백되고 있다. 이런 의미의 성은 아름답고 거룩하기까지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혼인으로 이뤄진 부부의 순결과 결혼의 신성함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정결을 유지하고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아야 하며 다양한 매체와 인터넷의 수많은 선정물에서부터 그리고 혼외 성관계 동거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늘 깨어 기도하는 신앙인의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400항 참조).

십계명 속의 보물찾기: 제9 10계명

 

하느님을 뵈오리라

 
사람은 보는 것에 의해 지배받는다.

 학교에서 급우를 충동적으로 칼로 찌른 학생이 그 까닭을 묻자 영화 친구 를 여러 차례 봤더니 자신도 모르게 그만 모방을 하게 됐다고 답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가문 이라는 것 가풍 이라는 것을 따지는 것도 결국은 무엇을 보고 자랐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딸들은 20~30대 의욕 왕성할 때는 절대로 엄마의 단점을 안 닮겠다 고 큰소리 뻥뻥 치지만 이럭저럭 40대를 넘기게 되면 그 안 닮겠다던 엄마의 단점 을 붕어빵처럼 반복한다. 보는 것이 무의식과 잠재의식에 잠복해 있다가 시간이 흐르고 의지(意志)가 약해질 때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좋은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에 떡을 만들어 이웃집에 돌리는 자매를 봤다. 그 마음 참 넉넉하다고 칭찬을 했더니 자신이 어렸을 때 어머니 떡 심부름을 다녔던 것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떡을 하면 나눠줘야 기분이 개운하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보는 것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얘기다.

 하느님께서는 보는 것의 힘을 이용해서 믿음의 성조들을 축복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축복할 때 무수한 별과 모래알을 보여주시고 그 숫자만큼 자손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땅을 주실 때에도 꼭 가나안 땅과 동서남북을 보게 하신 후 그 약속을 실현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보는 것의 힘을 비전(vision)과 믿음에 적용하셨던 것이다.

 유혹하는 자 사탄(Satan)은 태초에 하와를 보게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유혹에도 성공했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창세 3 6).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유혹에 빠졌던 것도 옥상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2사무 11 2-4 참조).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윈도우 쇼핑 갔다가 성공하고 돌아온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유혹의 원리를 알고 계셨기에 유혹자가 도시를 보여주며 (마태 4 8; 루카 4 5 참조) 유혹했을 때 중심을 지키고 물리치실 수 있었다.

 본래 성경에는 9계명과 10계명이 한 문장 속에 묶여 있다.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탈출 20 17).

 그러니까 이 두 계명은 결국 한 묶음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계명은 그 앞의 계명들과 관계가 있다. 제9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는 제6계명과 관련되고 제10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는 제7계명과 관련된다.

 얼핏 보면 이들 두 계명은 앞의 두 계명의 귀찮은 반복인 듯이 보인다. 또 약간의 저항감도 생긴다. 행하지만 않으면 됐지 마음으로 욕심을 품는 것까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두 계명을 조금만 영성적으로 깊이 새겨보면 이 두 계명은 우리 영성생활에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다. 곧 우리 마음이 육체와 물질에 탐욕을 품고 우리 눈이 그것들에 사로잡히게 될 때 우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는 원리를 가르쳐 준다. 이 두 계명의 요지는 마음이 탐욕(貪慾)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 마음이 보다 소중한 가치를 볼 수 있다 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선언하실 때 바로 이 점을 파고드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 5 8).
 신앙생활의 목적을 단 하나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을 뵙는 것 이다. 하느님을 뵙게 되면 모든 것이 이뤄진다. 기도의 응답 사랑의 나눔 지복직관 등 모두 가능해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이며 하느님을 닮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뵙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지금부터 벌써 하느님께서 보시는 대로 모든 것을 보고 타인을 이웃 으로 받아들이며 우리의 육체와 이웃의 육체 곧 인간의 육체를 성령의 성전으로 하느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감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519항).

 결국 탐내지 말라 는 9번째와 10번째 계명은 우리의 참 행복을 보장해 주기 위한 계명인 것이다. 참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은 현세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애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뵙고 참 행복을 누리게 될 때 그 갈망이 충족된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그의 「진복팔단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약속은 모든 행복을 초월합니다. 성서에서 본다고 말하는 것은 곧 소유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뵙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것을 모두 얻은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548항).

 그러므로 하느님을 뵙는 데 방해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당장 물리쳐야 한다.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도 남의 재물을 탐내는 것도 결국 자신의 마음을 더럽힌다. 탐욕은 기도할 때 분심 잡념이 들게 하는 주범이 된다. 마음에 때가 덕지덕지 묻으면 기도할 때 도무지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우리 마음이 탐욕으로 점령되지 않도록 주의할 일이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 (마태 15 19). 그러니 우리 마음을 이를 대체할 대안(代案)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필리 4 8).

 요즘 세상에는 온통 9계명과 10계명을 거스르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기에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리스도교적 정결에는 사회 분위기의 정화가 요구되며 또한 대중 홍보 수단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신중한 보도를 내는 것이 요구된다.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만연된 선정적 풍토에서 해방되고 변태적 호기심과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연을 피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525항).

 그렇다고 환경 탓만 하는 것도 금물이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잠언은 우리게 권고한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 (잠언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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