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속 보물찾기: 제1~4계명

2008. 12. 1. 오후 3:05:09

글자

십계명 속 보물찾기: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는 제1계명에는 우상을 섬기지 마라 는 것이 포함돼 있다. 참고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이를 따로 떼어내서 두 번째 계명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제1계명은 야훼는 하나뿐인 하느님 곧 유일신(唯一神)이시니 오로지 이 분만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이 소중한 하느님을 미신과 우상숭배에 빠져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야훼 하느님만 섬겨야 하는가? 그것은 야훼께서 든든한 빽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 바로 다윗 왕이었다. 그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대결 그 전임 왕 사울의 집요한 질투 최측근에 의한 쿠데타 등 절체절명의 궁지에서 하느님이 빽이시라는 것을 극적으로 체험했다.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하면 야훼를 자신의 바위 (시편 31 2) 성채 (시편 71 3) 피난처 (시편 27 1) 등으로 고백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분께 몸을 피하는 자 모두 다 복되어라 (시편 2 12).
 다윗뿐이 아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신 도움을 겪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도 증언한다.

  복되어라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받는 사람! 자기 하느님 야훼께 희망을 거는 사람! (시편 146 5).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개울가로 뿌리를 뻗어 아무리 볕이 따가워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사귀는 무성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예레 17 7-8).
 야훼를 믿고 의지한다 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그리하면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아무리 가물어도 걱정 없이 열매를 맺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좋으신 하느님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산다. 이것은 비극이다.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각별한 연민(憐憫)과 안타까움을 구상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 경보가 들려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구상 「인류의 맹점(盲點)」).
 시인은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도 잘 그려내고 있다. 웰빙이니 뭐니 하며 호의호식하는 삶을 살고들 있지만 자유에 취해 요란을 떠는 세계는 영락없이 나침반이 고장난 배 꼴로 방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배가 표류하고 있다는 비극적 사실도 모르고 모두가 태평 하게 전율할 밤 을 탐닉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지경이 됐을까? 한 마디로 하느님을 등지고 하느님 없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20세기 초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은 자신의 시 하늘의 사냥개 에서 기막히게 노래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중략)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중략)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들려 오는 한 목소리 /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

 신으로부터 도망치고픈 심정이 어찌 이 시인에게만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는 감미로운 유혹에 덜컹 빠져들고 있는가. 하느님 존재를 곧잘 믿었던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동시대인들이 그(=하느님)로부터 도망치는 도망자로 이 거리 저 골목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죄가 너무 크고 절망이 너무 깊어서 감히 하느님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사람들 마음이 너무 굳어서 불행한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여기저기 배회하고 있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또 실제 삶에서 하느님을 등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하느님을 살해해 매장해 버리고 하느님 없는 세상 에서 스스로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영적 반란(=신흥영성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느님은 마치 하늘의 사냥개처럼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꾸 따라온다. 멀리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도 따라오고 뒤쫓아오니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하느님이다. 톰슨이 고백하듯이 하느님을 저버린다는 것은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다시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복되어라. 허수아비 우상에 속지 않고 야훼만 믿는 사람이여 (시편 40 4).
 우상에 속지 않는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상은 허수아비이기 때문이다. 허수아비가 뭔가. 가짜 형상이다. 거짓이다. 아무런 내용도 힘도 없는 눈속임이다.

 그러므로 헛된 우상이나 잡신 등을 신격화해 섬기거나 공경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또 하느님이 아닌 것에 의지해 점술이나 사주 등으로 무엇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거짓 기적이나 예언 등에 현혹되는 일과 인간 권력을 절대화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모두가 허수아비요 헛것이다.

 야훼만이 참 하느님이시다. 야훼만이 실제로 존재하며 살아 계시며 참 도움의 손길을 베푸시는 유일한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전심전력으로 사랑해야 마땅하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신명 6 5).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께 마땅한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께 드린 약속과 서원을 지키는 것은 첫째 계명을 준수하는 경신 행위들인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35항).

십계명 속 보물찾기: 제2계명

 

 
자고로 우리 민족은 이름을 소중히 여겨 왔다. 그래서 이름을 아무렇게나 짓지 않고 작명법(作名法)에 따라서 지었다. 이름에 담겨 있는 의미와 기운이 그 사람의 한평생 운명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설령 이름을 대충 짓는다 해도 그 이름에는 어떤 것이 됐건 의미가 담겨 있다. 한자 이름이건 한글 이름이건 이름에 담겨 있는 의미가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 이름 소유자의 무의식에 저장된다. 그리고 무의식에 저장된 이름의 의미는 암암리에 그 이름 소유자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오죽했으면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고 했을까. 이 말은 언어가 존재를 담아낸다 는 뜻인 동시에 언어가 존재에 영향을 끼친다 는 의미로 알아들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니 날마다 수없이 부르는 언어 인 이름을 지을 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방금 진술들은 이름은 곧 인격이다 라는 말로 요약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에 대해서도 존칭어를 붙여 사용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분의 이름을 우리는 존함(尊銜) 또는 함자(銜字)라는 높임말로 표현해 왔던 것이다.

 사람 이름을 이렇게 높일 줄 알았거늘 하느님 이름을 우리는 얼마나 높여 부를 줄 알아야 하겠는가.

 제2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 이름을 귀하게 여기라 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실제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 자체를 하느님 처럼 여길 줄 알았다. 그래서 야훼 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도 송구스러운 나머지 그 모음을 따서 다른 자음을 붙여 아도나이 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주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잘못을 범한다.

 첫째 하느님 이름을 남용 또는 오용한다. 예컨대 어떤 일이나 상황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곧잘 하늘에 두고 맹세 하거나 하느님 이름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거나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을 저주하거나 욕할 때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영어로 갓댐(God damn) 은 저주나 받아라 는 욕이며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 는 재수 없다 또는 제기랄 이라는 의미의 욕인데 이런 불경한 욕설에도 하느님과 예수님 이름이 남용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참고로 우리말에 하느님 맙소사! 라는 말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일상 언어에 신앙적 측면이 깃들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느님 이름을 건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기도하거나 전례에 임할 때 집중하지 않고 마구 하느님 이름만 불러 대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전례 행위가 의미 없이 열정 없이 형식적 의식의 연속으로만 하느님 이름을 부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하느님 이름 야훼는 축복을 주는 귀한 이름이다. 하느님 이름을 불러야 하는 대표적인 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궁지에서 도움을 청할 때에 부른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너는 나를 불러라. 내가 대답하리라 (예레 33 3). 야훼를 찾아라 그의 힘을 빌어라 (시편 105 4).
 둘째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부른다. 베푸신 도우심에 감사드릴 때 우리는 의당 하느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다음 시편은 그 좋은 예를 보여준다.

  야훼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혜 /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구원의 감사잔을 받들고서/ 야훼 이름을 부르리라./ (중략) 내가 당신께 감사제를 드리고/ 야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편).
 셋째 복을 빌어줄 때 하느님 이름을 부른다. 하느님은 복을 빌어주는 권한을 사제들에게 맡기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으로 복을 빌어주면 내가 이 백성에게 복을 내리리라 (민수 6 27).

 요컨대 야훼 이름은 축복(구원 보호 은총)을 청할 때 그리고 그 축복에 감사드릴 때 부르는 이름이다. 야훼의 이름 을 부르면 대답하시고 찾으면 힘을 주시고 복을 빌어 주면 축복을 내려 주신다. 결국 제2계명은 이처럼 귀한 이름을 거짓 맹세나 농담으로 훼손치 말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느님 이름과 관련된 아름다운 약속이 하나 있다. 신명기에는 성전(聖殿)을 가리키는 말로 다음과 같은 약속의 말씀이 기록돼 있다.
  야훼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 (신명 26 2).
 이 말씀처럼 성전은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이다. 즉 성전에 가면 하느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이는 누구든지 하느님 이름을 부르고자 하면 성전으로 가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응답하시며 축복을 주시는 거룩한 이름을 성전에 두셨다.

 성전에 가서 하느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 거기 하느님이 계시다. 성전에서는 미사 때마다 다음과 같은 축복의 말씀이 울려 퍼진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러분에게 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미사 전례서).
 그리고 매번 고해를 할 때마다 사제 사죄경이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준다.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사하나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이토록 좋으신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리기 위해서 그분 이름을 불러야 할 것이다.

십계명 속 보물찾기: 제3계명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 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 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사 58 13-14).
 파국을 겪고 나서야 유다인들은 철이 들었다. 영원불패하리라 믿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하루 아침에 함락당하고 나라의 인재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종살이하는 처참한 수모를 당하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뉘우쳤다.

 그 뉘우침의 중심부에서 방금 인용된 예언(預言)이 메아리쳤다. 돈벌이 하느라고 여행 하느라고 상담 해주느라고 안식일을 짓밟았던 그들이었다. 세상의 일 사람의 일 제 앞가림할 일 우상숭배하는 일에 골몰하느라고 안식일을 뭐 다 사람 먹고 살자고 하는 노릇인데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가장 치욕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말았다. 오죽했으면 이미 2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때 일에 치를 떨며 바빌론의 후예인 이라크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있겠는가.
 그런데 안식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길래 저런 비극이 초래됐을까?

 간단하다. 안식일을 거르면 하느님을 잃게 된다. 하느님과 연결 고리가 끊기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가 말라 죽게 돼 있듯이(요한 15 6 참조) 하느님으로부터 이탈하면 그것은 곧 끝장을 의미한다. 하느님을 떠나면 기도 곧 예배의 끈을 놓으면 점점 영적 생명력이 고갈되게 돼 있다. 그것이 단기가 아니라 장기로 들어가게 될 때 그 다음 기다려야 할 순서는 영적 고사(枯死)이다.
 주일은 안식일과 약간 다르다. 당시 사람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원래 일주일은 월(月)요일이 아니고 일(日)요일에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7일째 되는 토(土)요일이 안식일에 해당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님 부활이 안식일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일요일에 이뤄졌기에 이날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기념한다는 취지에서 이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主日)로 삼았다. 그러면서 주일을 안식일의 의미로 지내기도 하게 된 것이다.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탈출기와 신명기는 각각 다르게 전한다.

 우선 탈출기에 따르면 주일은 거룩하게 예배드리며 쉬는 날이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탈출 20 11).
 하느님의 행동은 인간 행동의 모범이다. 하느님께서 이렛날 쉬시며 숨을 돌리셨으니 (탈출 31 17) 인간도 역시 쉬어야 한다. 쉬되 거룩하게 쉬라고 하셨다. 이런 정신이 예배(禮拜)라는 말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예배는 실제적으로 거룩한 쉼 의 효과를 가져다 준다. 이는 마치 엄마 품에 안겨 재롱을 떠는 어린 아이가 엄마에 대한 절대적 경외심과 함께 편안한 마음을 갖는 것과 같다.

 다음으로 신명기에 따르면 주일은 식솔들을 일에서 해방시켜 주는 날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신명 5 14-15).
 이집트 종살이할 때 하루도 쉬지 못했던 고달픔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자신 뿐 아니라 남들도 쉬게 하는 날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슬하 사람뿐 아니라 부리는 짐승 그리고 땅까지 쉬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탈출기 내용을 개인적 복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신명기의 의미는 사회적 복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주일은 나와 남을 위한 예배와 충전의 날이다.
 자동차 회사에서는 자사 제품인 자동차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려고 서비스 센터를 설치해 애프터서비스를 한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인간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놓고 서비스 센터 를 동네마다 세워놓았다.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성당은 공인된 영적 주유소요 서비스 센터이다. 거기 가면 하느님이 직접 채용한 직원(성직자 수도자 사도직 봉사자들)들이 애프터서비스를 해준다. 거기서 우리는 안락한 휴식 축복 평화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그런데 주5일 근무제 도입으로 사람들은 들로 산으로 가서 에너지 충전을 하고 영적 정비를 하려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 결과 월요일은 블루먼데이(blue monday) 곧 우울한 월요일 눈가에 피로 기색이 역력한 월요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숨겨져 있다.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니는 동안 점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 마침내는 하느님과 연결 끈이 삭아서 끊겨버린다는 것이 비극 중 비극인 것이다. 처음에는 마치 그것이 자유요 행복이요 평화인 듯하여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겠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된다. 그것이 자살행위였음을. 서두에 인용한 예언 말씀은 바로 이러한 비극의 한 복판에서 선포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처방이었던 것이다.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했던 것은 하느님의 능동적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을 잃은 민족이 겪은 약육강식의 쓰라린 체험이었다.

 주일은 예배와 충전의 날이다. 주일 날 거룩하게 쉬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살 길이다. 억지로 지켜야할 규정이 아니라 즐겁게 누려야 할 축복이다. 미사참례와 영성체는 우리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케 해준다. 우리는 그 힘으로 일주일의 신앙생활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꾸려간다.

 갑자기 병마가 밀려왔을 때 IMF의 시련으로 치명타를 입었을 때 예상치 못한 적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하느님과 연결된 생명줄이 튼튼하면 거뜬하게 물리칠 수 있다. 주일을 거룩히 지냄으로써 우리는 이 생명줄을 더욱 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주일은 기쁜 날 이요 귀한 날 이 아닐 수 없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모든 주님의 가족들에게 산등성이를 타고 개선하는 축복과 야곱의 유산 이 차고 넘치는 축복이 함께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일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다.

십계명 속 보물찾기: 제4계명

 

 
오늘날 우리는 무시무시한 시대를 살고 있다. 뉴스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였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고 부모가 자식을 죽였다고 해도 무덤덤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효를 고리타분한 옛날 가르침으로 치부하고 위아래 없이 사는 오늘날 세태는 참으로 문제가 있다.

 효는 시대를 초월해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시인 임보의 효자손 이라는 시(詩)가 우리에게 따뜻하게 일침을 가한다.    가신 어머님이 쓰시던  효자손이  오늘은 내 등을 긁는다  불효자 내 대신 늘  어머님 등을 긁던 손  이제는  네 마리 내 새끼들도  뿔뿔이 다 흩어지고  늙은 아내도 손주 보러  가고 없는  오후의 빈 뜰에서  어머님이 남겨 두신  부서진 나무손이  내 등을 긁는다.
  불효자 내 대신 늘 어머님 등을 긁던 효자손을 바라보며 자신의 손으로 어머님 등을 긁어 드리지 못한 불효에 대한 회한 그리고 그 효자손에 배 있는 어머님 체취가 그리워 그것으로 자신의 등을 긁으면서 더듬어 가는 어머님 사랑의 손길에 대한 회상 이것은 오늘을 사는 비정한 시대의 우리 안에서도 꿈틀거리는 본능적 심상이다.
 제4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탈출 20 12)이다.

 부모 공경(효도)은 생명을 주고 사랑하고 수고하여 자녀들을 세상에 낳아 신체가 성장하고 지혜와 은총이 자랄 수 있게 해준 어버이께 감사의 마음에서 드리는 자녀들의 마땅한 도리이다. 이를 구약의 현자는 다음과 같이 교훈한다.

  마음을 다해 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어머니의 산고를 잊지 마라. 네가 그들에게서 태어났음을 기억하여라. 그들이 네게 베푼 것을 어떻게 그대로 되갚겠느냐? (집회 7 27-28).
 그런데 이 계명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공경만을 권장하지 않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부모는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보아야 하고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는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에 그들 자신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지키도록 교육해야 한다 (2222항).
  부모는 자기 자녀들에게 신앙과 기도와 모든 덕을 가르칠 책임을 일차적으로 지고 있다. 부모는 최선을 다하여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또 영적으로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2252항).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결국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호 사랑을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넓게 볼 때 이 계명은 또한 친족들에 대한 혈연관계와도 관련된다. 이 계명은 조부모와 조상들에게 존경과 애정과 감사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나아가 이 계명은 스승과 제자 사이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 웃어른과 아랫사람 사이 위정자와 시민 사이의 상호존경을 요구한다.

 십계명 중에서도 유일하게 그 상(償)이 따르는 계명이 제4계명이다. 탈출기 본문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탈출 20 12).
 부모를 공경해야 주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산다고 했다. 주 하느님이 주는 땅 은 축복을 의미한다. 곧 복된 삶을 말한다. 오래 산다 는 것은 자손 대대로 번창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부모를 공경해야 자손이 축복 속에서 번창하게 된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다. 이를 구약의 현자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집회 3 2-6).
 왜 그럴까? 부모는 창조주 하느님의 창조 행위의 협조자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부모를 생명의 수로(水路)로 삼으셨다. 또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첫번째 도구로 삼으셨다. 이 생명과 사랑의 수로에 문제가 생기면 자손이 부실해지게 돼 있다. 수로가 막히거나 새거나 튼튼치 못하면 피해를 입는 것은 그 후손이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나 장애가 있더라도 부모를 공경해서 윗대를 튼실하게 하고 수로가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원리를 거역하면 저주의 대물림을 면치 못한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중략) 아버지를 버리는 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와 같고 자기 어머니를 화나게 하는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는다 (집회 3 12-13.16).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지혜로운 결단을 내려 축복의 대물림을 회복해야 자신이 살고 자손들이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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