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제단과 십자가의 도(道)**

2011. 6. 18. 오후 7: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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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단과 십자가의 도(道)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고전1:18.)  모든 사람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습니다. 무릇 사람이란 재앙을 위해 태어나니 불꽃이 위로 치솟는 것과 같다네”(욥5:7) 사람의 생애, 이 세상에 출생은 고난을 위한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인생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조물주의 심술인가. 아니면 고난이 필요해서 그런 것인가.

참으로 사람의 일반화된 상식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난해한 구절들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이 고난이 유익이라고 본다면 고난을 벗어나기 위한 연구와 노력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어야 할 것인데 그리하지를 않거든요.

 고난을당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상식이요, 일반화 되어 있습니다. 고난은 저주에서 온 것이요, 빗나간 운명에서 온 것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 그대로라면 하느님은 인생을 저주로 만들었다는 것 밖에는 해석이 없는 것이지요.  인생은 조물주의 저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축복으로 빗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 사람’ 이라는 것이 그를 뒷받침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왜 고난을 받게 하시는가. 인생은 고난을 통하여 영광의 길에 들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생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까지는 십자가와 같은 참혹한 고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낯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필2:5-11)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도 주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고난으로 인하여 순종함이 배워지고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신 것입니다.  고난은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발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주실 축복을 위하여 모든 인생 앞에 두신 것이 고난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인생이 태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이란 인생에게 있어 실로 가장 큰 복주머니요, 가장 귀한 보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고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시종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바는 그가 성실한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을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4:1,2).   인생에게 고난이라는 게 없으면 회개에 대한 의미도 없을 것이요, 죄에 대한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평안의 의미도 없고 행복의 의미도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저주의 의미도 없고 축복의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구별시키기 위하여 있는 것이 고난이요, 죄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 고난입니다.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서 아담이 범죄(불순종)하기 전에는 아무 고난도 수고도 없었습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 과실을 따 먹고 에덴에서 쫓겨난 그 때부터 사망(고난)이 들어 왔고 그 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불순종 죄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고난은 죄의 댓 가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영원히 받아야할 형벌(고난)을 육체에 짊어져 주시고 그 고난의 저주를 짊어지고 죽어지게 만드신 것이 육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셔도,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과 함께 단죄받지 않도록 우리를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32)  이와 같이 죄의 댓가를 미리 치르므로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 세상과 함께 정죄를 당하지 않게 하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댓가를 치룬 자가 또한 죄를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죄의 무서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난은 인간의 편에서는 참으로 야속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며 기뻐할 사람도 없고, 고난당하는 것을 보면서 동정하려 하지 않을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고난을 받으라고 할 사람도 없고, 고난 받는 자를 축복이라고 할 자도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복이라고 설교를 하다가 즉석에서 항의를 받은 기억은 언제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충격을 담고 있는 나로서는 이 고난에 관한 설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신경이 쓰이는지 모릅니다.

교인들의 반응이 그러하니까 고난을 면하게 하는 설교는 해도 고난을 짊어지게 하는 설교는 아예 엄두도 못내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나와 함께 멍에를 메자, 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 고난의 멍에가 지금은 슬퍼 보이고 즐거워 보이지 않지만 그로 연달된 자에게는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잠시 잠간 받는 고난은 장차 닥아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없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고난의 짐을 지고가게 만들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필1:29.)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

 실로 인생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죄인데, 이 죄 문제 해결사가 고난의 보따리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즉 사람이 힘들어서 그렇지 짊어지면 질수록 유익한 것이 고난의 보따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그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뭡니까. 돈이나 명예나 권세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사도 바울에게 주신 것은 또 뭐고요.외부로부터 오는 위험과 핍박은 고사하고 라도 그의 몸에는 육체의 가시 사단의 사자를 박아두고 자고하지 못하도록 하고 죽을 때까지 그를 납작코 만들어서 끌고 다니셨잖아요.  그 사랑하시는 자 사도 요한에게는 어떻게 하셨고요. 그것이 그 받으시는 아들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목표는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데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교회)들은 어떠하뇨. 말로는 주님과 함께 간다고 하면서 실체로는 주님의 길을 가는 자가 과연 있나요. 설교는 찬송은 기도는 순교니 십자가의 길을 가느니 하며 열심히도 떠들어 대지만 실체로 주님의 길을 간 사람은 바울 사도 때에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안다고 주장하지만 행동으로는 그분을 부정합니다. 혐오스럽고 순종하지 않으며 어떠한 선행에도 적합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말이야 지식인이면 누구나 다 할 수가 있습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생각들은 다 가지도 있다 해도 누가 가서 그 위험을 무릎 쓰고 방울 다는 일을 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길을 가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원만한 교회들이면 다 압니다. 다 그렇게 말들도 하고요. 찬송도 열을 내서 그렇게 하고요. 기도도 부르짖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행동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주님의 길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러는 것이지요. 멋쩍고 재미없어서 그러는 겁니다. 사람들에게서 인기도 없고 명예도 없으며, 미련하게 취급당하니까 그러는 것이지요.   십자가(고난)는 벗는 것이 아니라 지고 가는 것,  지고가야 하는 것,  지고가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시어서 자기를 따르는 자(제자)들에게 그것을 씌워 주셨습니다. 육체의 십자가(고난)는 영혼의 면류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태도가 어떤가요. 벗으려 하나요,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주와 함께 가려고 하나요. 말과 혀와 지식으로가 아니라 실체로 그러하냐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교회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하느님 말씀의 전달(설교)과정에서 발생한 오류 때문이라고 봅니다.   고난은 회개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하느님의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자고하지 못하도록 납작코 만드는 하느님의 제조기입니다. 이렇게 필요해서 만드시고 뒤집어 씌워 놓는 것인데요즘 선포되어지는 설교에서 보면 과연 그것을 축복으로,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드릴 수가 있도록 만들어 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지금 교회는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요. 화(고난)를 면하는 것이 하느님의 은혜인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입으로는 모두 다 아멘 인데 마음은 받아들이지 아니하고,행위로는 그것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는 길에 정신을 쏟아 붇고 있는 저들 현장에 가서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면, 할 일 없어 지껄이고 돌아다니는 사람같이 여깁니다. 이성 없는 맹종, 지식 없는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같은 목사의 이름을 가진 자라도 사는걱정 해주고,  사는 축복해주며,  사는 정보 알려주면 지능 있고 똑똑한 목사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하려면 바쁜데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로 귀찮게 하느냐는 반응이지요. 만일 우리에게도 그런 감각적 느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나도 멸망 받을 자 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 받기를 싫어합니다.고난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멀리 떠납니다. 예수님과 그 당이 아니라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그 처럼, 골고다 언덕 십자가 지고 가시는 길에 하나도 없이 다 도망가 버렸던 그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접근조차 못한 채 멀리서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던 그 여인들처럼,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 십자가의 도(道)에 함께 하려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즉 그 도를 어떻게 가르치며,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 도를 어떻게 알며, 알지 못하는 도를 어떻게 믿으며, 믿지 아니하는 도를 어떻게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많아요. 예수 믿으면서 고난당하는 사람, 주님의 일을 하다가 고난의 길에 빠진 사람은 많은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어쩔수 없이 빠져버린 고난의 길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많아도 주님과 함께 그 길에서 메어주신 멍에를 메고 묵묵히 따라가려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입니다.하다가 보니까 실수하고 실패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여 있는 사람은 많아도 ‘나의 원하는 것을 버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면서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없다 는 말입니다.  고난이 주님 주시는 은혜, 고난이 유익이라는 가치관이 없는데 어떻게 고난을 지고가려 하겠어요. 의식 전환을 시켜주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참으로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 집어넣고 한 세대 동안을 가게 하신 것은 고난의 멍에로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해서 마침내 복(가난의 복=천국의 복)을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광야는 실로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그들은 거기서 참아내지도 못하고 견뎌내지도 못한 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거의 모두가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거울로 삼으라고 고전 10장에서 말씀합니다.  원망하며 불평하며 짊어지고 가는 고난의 멍에는 지고 가는 그에게 넘어지게 하거나 혹 벗어나게는 하여도 위로부터 오는 유익은 얻어 누리지는 못합니다. 원망하다가 넘어지고 불평하다가 멸망을 당한 광야의 이스라엘과 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 할 때 두 종류의 부류로 나뉘어집니다. 광야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이 원망하며 불평하며 남을 탓하며 화풀이 하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고, 이런 고난쯤은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5:41)

 하느님은 감당할 만한 범위 안에서 시험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저들이 남달리 혹독한 시험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감당 할 수가 있다고 보셨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인정해 주신 것을 매우 기뻐한다는 말입니다.믿음이 없이는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주시는 고난은 믿음의 분량만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고난이란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장애물들과 같은 것입니다. 혹독한 훈련은 시켜도 죽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 것이 훈련소의 철칙입니다.  우리에게 당하는 고난은 주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요, 고난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있다는 증표입니다. 남보다 더 많은 고난이 있다는 것은, 나를 더 단련시켜서 남 보다 더 깨끗게 하시려는 것이요,

회개하고 토설해도 고난이 계속되는 것은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하다고 여기신 증거입니다.  믿음을 인정하신 증거라는 말입니다.  더 고된 훈련 속에서 더 강한 병사가 만들어 지듯이 더 많은 고난은 더 깨끗한 정금 같은 자로 만들어 내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고난에 대한 관념이 바로 되고,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바꿔져서 주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작업에 감사함으로 맡길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가치로 여겨지지 아니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의 가치는 천국에서만이 그 댓 가를 받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사람 곧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고난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므로, 고난을 가치로 여기지를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이 가치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는 되지도 못한 자요, 자기를 속이고 있는 자입니다.

사실 누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되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자가 많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교회들은 지금 자기가 분명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천국을 발견하여 그 곳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줄로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발견한 자의 모습에 대해서 분명한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취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태13:44).

그 모습이 사도들에게서 나타났지요. 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겨져서 배설물처럼 내어 버렸다잖아요.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모습이요, 천국을 향하여 가고 있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이나 세상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된(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들은 그러지도 아니하면서 자기는 된 줄로 알고 있거든요. 너무나 많은 이들이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자기가 자기에게 스스로 속고 있는 것 같아요. 따라가야 할 성경은 놓치고 사람의 말을 듣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 이제는 바로 잡을 만한 계기가 만들어 질 것 같지를 아니해서 걱정입니다.

 가난이 복 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지요. 성경봉독 때나 거치고 지나갈 뿐 교인들의 마음 가운데서 떠난 지가 벌써 오래잖아요. 그러한 사람들에게 고난당하는 것이 유익한 것이니 교회 안에서 고난을 당하며 손해를 보라고요.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좇으라, 고 해봐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너희도 가려느냐, 고 하시던 그 때와 지금 뭐가 달라진 것이 있을 까요. 그들은 후에 성령 받고서 바꾸어 졌지만,  지금은 어떻게 될런지, 그 모습이 너무도 뻔한데 누가 그런 말씀을 전할 수 있겠어요.  주님 계실 때와 같이 지금도 주님의 교훈이 먹혀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은 성령받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다 성령 받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오순절 이후이기 때문에 거의 모두다 다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스스로 자기를 속이며 스스로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의 교회들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가도 소멸하여 육체로 끝을 맺는 교회들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악령(귀신=세상신)이 빠져 나가고 성령이 들어오는 것을 성령 받았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이 빠져 나가고 영의 생각이 들어오는 것, 곧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데서 돌이켜서 영의 일을 생각하게 되면 그것이 성령 받은 증거입니다. 육신의 안일과 부귀영화에서 끌어내어 그리스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받는 것에 관하여 자칫 혼동을 합니다. 육신이 잘되고 만사가 형통하는 것 인줄로 압니다. 귀가 닳도록 그렇게 들어 왔지요.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바꿔 놓는 일을 하십니다.육신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세상의 가치에서 천국의 가치로 말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 때부터 마음의 갈등, 심리적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질 때까지는 끊임없는 갈등이 속에서 난투극을 벌립니다. 한 쪽에서는 육신의 일(세상)로 또 한 쪽에서는 영의 일(천국)로 끌고 가려고 서로가 잡아당깁니다.  그런즉 우리는 성령의 일을 도와야 합니다. 성령이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힘을 공급시키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 그리스도의 교훈(신약)에 관한 말씀을 열심히 공급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으로 하여금 힘 있게 일(육신의정욕을제어하고영을위한)하시게 하여야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고 성령님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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