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다 17 - 이슬람 영성가 루미가 말하는 ‘예수의 부활’
[중앙일보] 2016.06.08
갈릴리 호수 뒤편의 산으로 올라갔다. 왕복 2차로의 포장도로가 깔려 있었다. 올라갈수록 산촌 풍경이다. 울창한 나무들과 오래된 오솔길, 비탈진 언덕에서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갈릴리 호수는 저 아래 아득하게 보였다. 당시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의 북쪽 마을인 가버나움에 주로 머물렀다. 거기서 산길을 타고 여기저기 산골 마을을 다니며 가르침을 펼쳤다. 그곳에는 2000년 전 예수 당대의 마을 유적도 있었다.
인간의 삶은 ‘오보십보’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재에 집착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삶. 그게 인생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단순한 “Don’t worry, be happy(걱정하지마, 행복할 거야)”가 아니다. 예수의 “걱정하지 마라”에는 인간의 존재 원리에 대한 깊은 시선이 녹아 있다. 이 산 어디쯤이었을까.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마태복음 6장25절)
우리는 따진다. “무슨 옷을 입을까?”“무엇을 마실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예수의 눈’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뿌리’다. 예수는 우리에게 ‘뿌리’를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음식을 먹고, 무엇을 위해 옷을 입는가. 그걸 물었다. 예수는 목숨과 몸이 주인공이지, 음식과 옷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를 예로 들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마태복음 6장25절)
우리는 따진다. “무슨 옷을 입을까?”“무엇을 마실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예수의 눈’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뿌리’다. 예수는 우리에게 ‘뿌리’를 묻는다. 무엇을 위해 음식을 먹고, 무엇을 위해 옷을 입는가. 그걸 물었다. 예수는 목숨과 몸이 주인공이지, 음식과 옷이 주인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새’를 예로 들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복음 6장26절)
아름드리 나무 아래 누웠다. 잎들이 하늘을 덮었다. 나무 속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다. ‘삐~오~옥, 삐~오오~옥’. 궁금했다. ‘우리는 왜 내일을 걱정할까. 새들에게는 왜 걱정이 없을까. 예수는 왜 걱정하지 마라고 했을까.’ 눈을 감았다. 나도, 너도 한 장의 잎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떨어져야 한다. 그게 인간이 갖는 삶의 유한성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말이다. 잎이 떨어지면 나의 삶도 떨어진다.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렵다. 그래서 걱정한다. 내일은 뭘 먹을까, 모레는 뭘 입을까. 그 다음날은 또 뭘 마실까. 걱정은 끝이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낙엽’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복음 6장28~30절)
아름드리 나무 아래 누웠다. 잎들이 하늘을 덮었다. 나무 속 어딘가에서 새가 울었다. ‘삐~오~옥, 삐~오오~옥’. 궁금했다. ‘우리는 왜 내일을 걱정할까. 새들에게는 왜 걱정이 없을까. 예수는 왜 걱정하지 마라고 했을까.’ 눈을 감았다. 나도, 너도 한 장의 잎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 떨어져야 한다. 그게 인간이 갖는 삶의 유한성이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처럼 말이다. 잎이 떨어지면 나의 삶도 떨어진다.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두렵다. 그래서 걱정한다. 내일은 뭘 먹을까, 모레는 뭘 입을까. 그 다음날은 또 뭘 마실까. 걱정은 끝이 없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낙엽’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복음 6장28~30절)
강이 흐른다. 예수의 눈과 우리의 눈. 그 사이에는 큼직한 강이 흐른다. ‘예수의 눈’은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들에 핀 나리꽃도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말한다. “사는 게 장난입니까? 걱정을 해도 살기가 빠듯한데, 어떻게 걱정도 없이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깊은 눈으로 말한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울라나 젤랄렛딘 루미(1207~1273)는 이슬람의 영성가다. 수피교단의 창시자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영성의 눈’이 담겨 있다. 루미는 이렇게 노래했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래야 예수가 다시 숨을 쉬시니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자라는 게 별로 없으니
평평해지게나 부서지게나.
그러면 그대로부터 들꽃들이 피어날 테니.'(루미의 시 ‘내면에는 가을이 필요하다네’중에서)
마울라나 젤랄렛딘 루미(1207~1273)는 이슬람의 영성가다. 수피교단의 창시자이자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영성의 눈’이 담겨 있다. 루미는 이렇게 노래했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래야 예수가 다시 숨을 쉬시니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자라는 게 별로 없으니
평평해지게나 부서지게나.
그러면 그대로부터 들꽃들이 피어날 테니.'(루미의 시 ‘내면에는 가을이 필요하다네’중에서)
루미의 시는 “죽어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는 가을이 두렵다. 겨울이 두렵다. ‘낙엽(落葉)’이 되는 게 두렵다. 그런 우리에게 루미는 말한다. “때로 죽어감이 필요하다네.” 그렇게 ‘영성의 팁’을 일러준다. 심지어 “그래야 예수가 숨을 쉰다”고 말한다. 이슬람교에서도 예수를 말한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음도 인정한다. 다만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선지자일 뿐 메시아로 보진 않는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역시 한 사람의 선지자로 본다. 이슬람교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굳이 자식을 지상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고 본다.
루미가 말한 예수는 ‘내 안의 예수’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내면의 예수’다. 그 예수가 잠들어 있다. 그래서 다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죽어감’이 필요하다. 울퉁불퉁한 바위 같은 에고가 가을과 함께 무너질 때 비로소 ‘내면의 예수’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바오로)은 그런 ‘가을’을 체험하고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고 말했다. 거기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루미는 그런 예수의 부활을 위해 “내면의 가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무엇도 자랄 수가 없다. 그렇게 ‘걱정으로 가득 찬 땅’에서는 씨앗이 땅을 뚫고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바위를 부수어야 한다. 땅이 평평해야 하니까. 루미는 그걸 ‘죽어감’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0장38~39절)
루미가 말한 예수는 ‘내 안의 예수’다.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내면의 예수’다. 그 예수가 잠들어 있다. 그래서 다시 숨을 쉬어야 한다. 그러려면 ‘나의 죽어감’이 필요하다. 울퉁불퉁한 바위 같은 에고가 가을과 함께 무너질 때 비로소 ‘내면의 예수’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바오로)은 그런 ‘가을’을 체험하고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갈라디아서 2장20절)고 말했다. 거기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루미는 그런 예수의 부활을 위해 “내면의 가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울퉁불퉁한 바위에서는 무엇도 자랄 수가 없다. 그렇게 ‘걱정으로 가득 찬 땅’에서는 씨앗이 땅을 뚫고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바위를 부수어야 한다. 땅이 평평해야 하니까. 루미는 그걸 ‘죽어감’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그걸 ‘자기 십자가’라고 표현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10장38~39절)
잎새는 눈이 좁고 얕다. 자신의 진정한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그저 바람에 팔락이는 ‘잎새’가 자신의 전부라고 여긴다. 자신과 연결된 나뭇가지는 보지 못한다. 그 가지가 이어진 몸통도 못 본다. 그 몸통을 떠받치는 뿌리도 못 본다. 그래서 ‘잎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모른다. 자신의 주인공이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임을 모른다. 그래서 걱정한다. 폭우가 내릴까봐, 돌풍이 불까봐, 가을이 올까봐 두렵다.
때때로 ‘죽어감’을 겪는 잎새는 다르다. ‘내면의 가을’을 체험하는 잎새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을 안다. 자기 자신이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임을 안다. 그때는 가을이 두렵지 않다. 낙엽도 두렵지 않다. ‘마지막 잎새’가 되는 운명을 걱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잎이 다 떨어져도 나무가 남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도 나무는 그대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리꽃을 보라”고 했다. 들꽃처럼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슨 음식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한 장의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루미는 ‘내면의 가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죽어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때때로 ‘죽어감’을 겪는 잎새는 다르다. ‘내면의 가을’을 체험하는 잎새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주인공을 안다. 자기 자신이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임을 안다. 그때는 가을이 두렵지 않다. 낙엽도 두렵지 않다. ‘마지막 잎새’가 되는 운명을 걱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잎이 다 떨어져도 나무가 남기 때문이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도 나무는 그대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나리꽃을 보라”고 했다. 들꽃처럼 무슨 옷을 입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슨 음식을 먹을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한 장의 잎새가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 나무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 ‘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루미는 ‘내면의 가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죽어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주인공 존디는 폐렴으로 투병했다. 존디는 자신과 잎새를 동일시했다. 붉은 벽돌담의 담쟁이 넝쿨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의 생명도 떨어질 거라 믿었다. 밤새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는데 담벼락에 그려놓은 잎새는 남아 있다. 그걸 보며 존디는 삶의 용기를 얻는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녘의 나리꽃이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 수없이 돌고 돌아도 무너지지 않는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루미는 ‘내면의 가을’이라 했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라 했다.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게 뭔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잎새와 나무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의 눈’에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존재 원리가 명쾌하게 보인다. 그의 눈에는 이 우주를 떠받치는 ‘무한한 담벼락’이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 모두의 바탕에 ‘우주의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루미는 ‘내면의 가을’이라 했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라 했다. 그걸 통과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게 뭔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잎새와 나무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의 눈’에는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존재 원리가 명쾌하게 보인다. 그의 눈에는 이 우주를 떠받치는 ‘무한한 담벼락’이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 모두의 바탕에 ‘우주의 담벼락’이 있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왔다. 갈릴리 호수로 갔다. 호숫가 얕은 물에 말라버린 나무가 꽂혀 있었다. 물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또 한 마리가 날아왔다. 예수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저 새들. 저 꽃들. 그 속에 깃든 ‘우주의 담벼락’을 보아라. 그런 담벼락이 너희 안에도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선(禪)불교에도 ‘담벼락’에 대한 일화가 있다. 중국 서촉땅에 덕산이란 선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강사(講師)였다. 『금강경』이 주특기였다. 『금강경』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만큼 콧대가 높았다. 그는 당시 남쪽 지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 일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덕산은 걸망에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길을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일합을 겨루기 위함이었다.
남방으로 길을 가다가 하루는 떡장수 노파를 만났다. 덕산은 요기를 할 요량이었다. 짊어진 걸망을 내려놓았다. 노파가 물었다. “걸망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덕산이 답했다. “『금강경소초』입니다.” 그 말을 듣고 노파가 내기를 제안했다. “스님이 맞추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맞추지 못하시면 돈을 준다해도 떡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때는 다른데 가서 사 드시지요.” 덕산이 좋다고 하자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선(禪)불교에도 ‘담벼락’에 대한 일화가 있다. 중국 서촉땅에 덕산이란 선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강사(講師)였다. 『금강경』이 주특기였다. 『금강경』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할만큼 콧대가 높았다. 그는 당시 남쪽 지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 일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덕산은 걸망에 『금강경소초』를 짊어지고 길을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일합을 겨루기 위함이었다.
남방으로 길을 가다가 하루는 떡장수 노파를 만났다. 덕산은 요기를 할 요량이었다. 짊어진 걸망을 내려놓았다. 노파가 물었다. “걸망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덕산이 답했다. “『금강경소초』입니다.” 그 말을 듣고 노파가 내기를 제안했다. “스님이 맞추시면 떡을 그냥 드리고, 맞추지 못하시면 돈을 준다해도 떡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때는 다른데 가서 사 드시지요.” 덕산이 좋다고 하자 노파가 물었다. “『금강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겠습니까?”
노파의 물음은 선문(禪問)이었다. “‘마음’이란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사라지는 존재다. 그게 마음의 정체다. 그래서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그게 마음의 실체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떡을 드시려 한다. 그건 어떤 마음인가?”하고 물은 셈이다. 이 말을 듣고 덕산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경전에만 능통할 뿐, 선(禪)에는 미숙했다.
‘점심’의 한자는 ‘點心’이다.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로 적은 양의 식사를 말한다. 옛날에는 점심을 그만치 적게 먹었던 모양이다. 주막의 노파는 고수였다. 마음도 하나의 ‘잎새’다. 세상의 모든 잎새는 순이 돋았다가, 자라서 물이 들고, 낙엽이 돼 떨어진다. 마음도 그렇게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소멸한다. 그러니 ‘과거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잎새’도 얻을 수 없다. 그게 ‘잎새’의 정체다. 노파는 묻는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당신이 쓰는 마음은 어디에 점(點)을 찍고 있나.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 그 바탕은 무엇인가.”
덕산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있었을 뿐이다. 대신 루미의 시가 여기에 답을 한다. 과거의 잎새, 현재의 잎새, 미래의 잎새. 그 모든 잎새에는 ‘죽어감’이 필요하다. 잎이 다 떨어지면 ‘나무’가 드러난다. 내가 떨어져도 여전히 서 있는 나무. 그게 ‘우주의 담벼락’이다. 덕산은 왜 점을 찍지 못했을까. 그는 ‘잎새’만 봤기 때문이다. 그럼 ‘담벼락’을 보는 이들은 어디에 점을 찍을까. 아무데나 점을 찍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벼락’ 위에서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데나 찍어도 ‘우주의 담벼락’에 점이 찍힌다. 그걸 아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점심’의 한자는 ‘點心’이다. 마음에 점을 찍을 정도로 적은 양의 식사를 말한다. 옛날에는 점심을 그만치 적게 먹었던 모양이다. 주막의 노파는 고수였다. 마음도 하나의 ‘잎새’다. 세상의 모든 잎새는 순이 돋았다가, 자라서 물이 들고, 낙엽이 돼 떨어진다. 마음도 그렇게 생겨났다가 작용하고 소멸한다. 그러니 ‘과거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잎새’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잎새’도 얻을 수 없다. 그게 ‘잎새’의 정체다. 노파는 묻는다.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당신이 쓰는 마음은 어디에 점(點)을 찍고 있나.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 그 바탕은 무엇인가.”
덕산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서있었을 뿐이다. 대신 루미의 시가 여기에 답을 한다. 과거의 잎새, 현재의 잎새, 미래의 잎새. 그 모든 잎새에는 ‘죽어감’이 필요하다. 잎이 다 떨어지면 ‘나무’가 드러난다. 내가 떨어져도 여전히 서 있는 나무. 그게 ‘우주의 담벼락’이다. 덕산은 왜 점을 찍지 못했을까. 그는 ‘잎새’만 봤기 때문이다. 그럼 ‘담벼락’을 보는 이들은 어디에 점을 찍을까. 아무데나 점을 찍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벼락’ 위에서 왔다갔다 할 뿐이다. 그러니 아무데나 찍어도 ‘우주의 담벼락’에 점이 찍힌다. 그걸 아는 이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는 두려움에 떠는 ‘잎새들’을 향해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복음 7장31~34절)
예수가 강조한 1순위는 분명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것부터 찾으라고 했다. ‘하느님 나라’가 뭔가. 신의 속성으로 충만한 나라다. 그럼 ‘그분의 의로움’은 뭘까.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일까. 히브리어로 ‘의로움’은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무엇에 부합하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거다. 그게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렇게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게 ‘체다카’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내면의 가을’이다. 잎새가 다 떨어질 때 나무의 몸통이 드러난다. 우리 안에 깃든 ‘우주의 담벼락’도 그렇게 드러난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 위로 새가 날아갔다. 미끄러지듯 비행했다. 보기에도 자유로웠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그런 새를 가리키며 예수가 묻는다.
“너는 한 장의 잎새인가, 아니면 한 그루의 나무인가. 너는 어떤 마음으로 점심을 먹는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마태복음 7장31~34절)
예수가 강조한 1순위는 분명했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것부터 찾으라고 했다. ‘하느님 나라’가 뭔가. 신의 속성으로 충만한 나라다. 그럼 ‘그분의 의로움’은 뭘까.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광장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일까. 히브리어로 ‘의로움’은 ‘체다카(Tzedakah)’다.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다. 그럼 무엇에 부합하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에 부합하는 거다. 그게 ‘그분의 의로움’이다. 그렇게 나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돌리는 일이다. 그게 ‘체다카’다.
그러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내면의 가을’이다. 잎새가 다 떨어질 때 나무의 몸통이 드러난다. 우리 안에 깃든 ‘우주의 담벼락’도 그렇게 드러난다. 갈릴리 호수의 수면 위로 새가 날아갔다. 미끄러지듯 비행했다. 보기에도 자유로웠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그런 새를 가리키며 예수가 묻는다.
“너는 한 장의 잎새인가, 아니면 한 그루의 나무인가. 너는 어떤 마음으로 점심을 먹는가.”
갈릴리 호수 위로 새가 날고 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새. 새는 ‘담벼락’ 위를 날고 있는 걸까.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7 - 이슬람 영성가 루미가 말하는 ‘예수의 부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