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다 23 -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만든 하느님
중앙일보 2016.7.20
유대인 청년이 경문곽을 머리와 손에 대고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성경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조그만 상자에 넣는다. 이어진 검정 가죽끈으로 손은 세 번, 팔은 일곱 번 둘러서 감는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착용했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루 종일 착용했다.
그들이 누구일까. 다름 아닌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행위’를 믿었다. 행위가 구원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에 대한 이야기가 한 토막 있다. 2000년 전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를 했다.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믿었다. 그건 오래된 전통이었다. 유대인들이 정해진 거처도 없이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구약 시대에는 성막을 쳤다. 일종의 천막이다. 그 안에 모세가 받은 십계명 돌판을 넣었다. 소떼와 양떼를 몰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수레에 싣고 성막도 함께 옮겼다. 그들의 생활과 삶, 그 중심에 성막이 있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웠고 성막은 성전이 됐다. 천막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건축물이 세워졌지만 기능은 똑같았다. 성전은 신을 만나는 장소였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걸 ‘매우 각별한 경험’으로 여겼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랬다. 가만히 뜯어보면 우리의 기도와 똑 닮았다. “저는 교회에 출석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갈 때도 있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무엇보다 ‘믿지 않는 자들’과 다르지 않습니까. 제가 그들과 다름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런 식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와 무엇이 다른 걸까. 우리는 생각한다. 내게는 예수가 있지만, 저들에게는 예수가 없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저들에게는 불행이지만 내게는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해롤드 코핑(1863~1932)의 작품 ‘바리새인과 세리’. 자신을 내세우며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달리 세리는 멀찍이 떨어져 회개하고 있다.
두 사람의 기도에 대한 예수의 판정은 어땠을까. 예수는 그들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이 역시 누가복음에 기록돼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누가복음 18장14절) 왜 그랬을까.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는 건 쉽지 않다. 배고픔은 물론, 그로 인한 이런저런 불편함도 감수해야 한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은 주 2회 단식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그리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놓았다. 십일조라고 하지만 요즘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이는 많지 않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회계사의 공증 아래 정확하게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교회가 있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러니 그 바리새인처럼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게 쉽진 않다. 그럼에도 바리새인은 그걸 지켰다. 그러니 그가 보여준 ‘신에 대한 충성도’가 얼마나 큰 것일까.
예수가 말한 ‘높아짐’은 달랐다. 우리가 생각하는 ‘높아짐’과 차원이 달랐다. 그건 ‘행위’를 쌓아서 올라가는 높아짐이 아니었다. 왜 그럴까. 행위를 쌓아서 올라갈 때는 에고도 쌓여서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체다카’가 작동하지 않는다. 세리는 달랐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자신을 무너뜨렸다. 늘 그렇다. 에고를 무너뜨릴 때 ‘체다카’가 작동한다.
누가복음 18장을 펼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나온다. 바리새인와 세리의 일화를 말한 사람은 예수였다. 그럼 예수는 누구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었을까. 예수 주위에 빙 둘러앉아 있던 이들이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장9절) 그러니 예수가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 주위에는 바리새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들처럼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앉아 있지 않았을까.
바리새인의 사고 방식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방식과 통한다. 총과 칼을 앞세우고 신대륙을 개척할 때 뱃머리에는 늘 사제나 선교사들이 탔다. 왜 그랬을까. 나에게만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예수. 그런 예수를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전달 방식은 제국주의적 정복 방식과 여러모로 맞아 떨어졌다. 그들이 전하려 한 예수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늘 내가 무너진 곳으로 찾아온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말에서 떨어져 눈이 멀고서야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났다. 간디는 식민지 인도를 떠나가는 영국인에게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경 속의 예수는 두고 가라”고 했다. 바리새인의 눈은 멀 수가 없다. 꼿꼿이 서서 기도하는 그들은 ‘나의 눈’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내가 만든 하느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을 만난다.
유대인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다. 지금 남아 있는 건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일부 성벽뿐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곳에 가서 기도를 한다. 단지 옛날의 영화를 그리워해서가 아니다. 성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생각이 아직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성전에 가장 가까운 게 ‘통곡의 벽’이다.
바리새인들도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사실 그들은 오랫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형식적인 존경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이었다. 이스라엘은 고대로부터 주변 국가의 침략을 수시로 받았다. 그 와중에 오랜 세월 식민지가 되기도 했다. 기원전 171년 수리아(시리아)는 이집트를 물리쳤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았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그리스신 조각상이 세워지고 돼지의 피로 제사가 행해졌다. ‘하느님의 구원을 약속받은 민족’이란 징표인 할례도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받았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까.
유대인들은 항거했다. 그 저항의 중심에 바리새인이 있었다. ‘바리새인’이란 당파가 등장한 것은 이스라엘이 수리아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칠 때였다. 2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이스라엘은 수리아를 물리쳤다. 당시 바리새인은 제사장 집안인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마카베오 가문은 곧 변질됐다. 사치를 일삼고 세속적인 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건 성서의 지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어긋나는 조치였다. 바리새인이 보기에는 신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가문에 맞서 싸웠다.
당시 마카베오 가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반기를 들었다. 유대인들이 다들 무서워서 고개를 숙일 때 바리새인들은 목숨을 걸고 저항했다. 순교한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걸 유대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어땠을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좇고, ‘유대의 정체성’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들 두려워서 아무도 “노(NO)!”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때 손을 번쩍 들고 “그건 아니오!”라고 외친 이들이 바리새인이었다. 그러니 유대 백성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들을 존경했다.

제임스 티소의 작품 ‘함께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인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는 사형에 처한다’는 율법을 목숨처럼 모시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는 이단이었다.
바리새인의 꼿꼿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박제가 돼 갔다. 종교로 따지면 ‘율법주의자’가 됐다. 그들은 ‘행위’에 방점을 찍었다. 행위는 격식으로 굳어졌고, 그들의 눈에는 예수가 격식을 파괴하는 ‘위험한 인물’로만 비쳤다. 그럼 예수는 어땠을까. 예수는 행위를 강조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예수도 행위를 중시했다.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예수는 아버지 뜻에 대한 ‘행함’이라고 했다. 그럼 예수의 행위와 바리새인의 행위는 무엇이 다른 걸까.
제임스 티소의 작품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을 책망하는 예수’. 예수는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복음 23장13절)고 말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복음 7장21절) 예수는 정확하게 ‘실행’이란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리스어로는 ‘포이에오(poieo)’다. 영어로는 ‘act(행하다)’‘make(만들다)’‘produce(생산하다)’의 뜻이다. 예수는 앉아서 암송만 하지 말고, 기도만 하지 말고, 실행하라고 했다. 그래야만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생긴다고 했다.
뿐만 아니다. 그 대목에 이어서 예수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복음 7장24~25절)
이번에도 ‘행함’이다.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이라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고 했다. 그래야만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바리새인들도 ‘행위’를 강조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다. 그럼 둘은 무엇이 다른 걸까.

네덜란드 화가 혼토로스트의 ‘안나스 법정에 선 예수’. 율법주의자와 예수, 두 사람의 표정이 다르다. 오히려 심문 받는 예수의 얼굴이 더 편안해 보인다. 율법을 붙드는 사람은 스스로 창살 속에 갇히고 만다.
그럼 바리새인은 이 말을 듣고 어떻게 행동할까. 그들의 관심사는 결과물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아느냐, 모르느냐. 그것뿐이다. 그들이 들이미는 신앙의 잣대도 그렇다.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아는가, 당신은 자전거를 탈 줄 아는가” 그것뿐이다. 그게 다다. 그래서 놓친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바람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뒷좌석은 모른다. 그들은 자전거만 알지, ‘따르릉’하는 벨 소리는 모른다.
예수는 다르다. 예수가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라고 한 데는 이유가 따로 있다. 그건 결과물만 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예수가 설한 ‘자전거 타는 법’을 읽는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음을 깨끗하게 하라.” 열 번, 스무 번 읽는 사람도 있고, 백 번이나 이백 번씩 읽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타는 방법을 숙지한다. 여기서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자신이 이미 자전거를 안다고 생각한다. 탈 줄도 안다고 생각한다. “주여! 주여!”만 목이 터지게 외치면 자전거는 저절로 타는 걸로 생각한다.
네덜란드 화가 마티아스 스토머(1600~1650)의 작품 ‘가야바 앞에 선 예수’. 밀워키아트박물관 소장. 그림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세우고 있는 율법의 고집이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행하라고 했다. 직접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아보라고 했다. 그건 단순히 ‘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결과물을 겨냥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의 자전거는 바리새인들이 집착했던 ‘행위의 자전거’가 아니다. 예수는 ‘행함’을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체득하라고 한 것이다. 핸들과 안장과 페달만이 자전거의 전부가 아니다. ‘자전거의 속성’에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바람을 가를 때의 상쾌함과 이마에서 흐르는 땀까지 포함돼 있다. 고개를 들면 펼쳐지는 푸른 하늘까지 담겨 있다. 그 모두를 통해 ‘자전거의 속성’을 익히라고, 그 속성과 하나가 되라고 한 것이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작품 ‘세 발 자전거를 타는 아이’. 신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이가 세 발 자전거를 타면서 ‘자전거의 속성’을 익혀가는 것과 닮지 않았을까.
그게 바로 ‘반석(盤石)’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강물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이다. 그 반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다.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나의 삶이라는 집을 그곳에 지어야 한다. 반석이 무너지지 않아야 집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반석이 바로 ‘신의 속성’이다. 예수가 ‘행함’을 그토록 강조한 것은 반석을 찾기 위함이다. “주여! 주여!”한다고 그 반석이 찾아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페달을 밟아봐야 그 반석이 찾아진다. 그 페달이 바로 ‘행함’이다.
그렇다고 ‘행함’이 목적이 아니다. ‘행함’을 통해 반석을 찾는 게 목적이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몰랐다. 그래서 ‘행함’에만 계속 방점을 찍었다. 반석이 빠져버린 행함은 이데올로기가 되게 마련이다. ‘신의 속성’은 이치를 관통한다. 나와 삶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치다. 그런 이치를 관통할 때 우리는 지혜로워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복음 7장24절) 내가 뿌리내린 반석(신의 속성)을 통해 나의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기로워진다.
‘나만 아는 예수. 상대는 모르는 예수. 우리만 아는 예수. 저들은 모르는 예수. 그런 예수일까. 그렇다면 예수의 가슴이 너무 좁지 않을까.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느님이다.' 바람이 불었다. 성전 앞 뜰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물었다. '나의 하느님은 다른가. 바리새인이 믿던 하느님과 다른가. 내가 만든 하느님, 내 입맛에 맞는 하느님. 그것과 과연 다른가.’ 바람이 불고, 또 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