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만나다 15 - 예수는 왜 하느님을 ‘아빠’라 불렀나
이스라엘 예루살렘 올리산 위에 있는 주기도문 교회.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꽤 있었다. 더구나 바리새인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기도를 올렸다. 길을 가다가도 정해진 시간만 되면 멈춰서서 기도를 했다. 그때는 왕이 인사를 건네도 소용이 없었다. 기도가 우선이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에야 왕에게 절을 했다. 유대교에 정통한 유대인이자 개신교 신학자인 알프레드 에더스하임(1825~1889)은 저서 『유대인 스케치(Sketches of jewish social life) 』에서 “바리새인들이 기도를 할 때는 심지어 뱀이 발목을 타고 올라와도 내버려 두어야 했다”며 “하루에 100번의 축복기도를 올리면 탁월한 신앙심을 보이는 표준으로 여겨졌다”고 말했다.

마르크 샤갈의 1914년작‘기도하는 유대인’ 시카고미술관 소장.
어쩌면 우리도 ‘바리새인’을 닮아가고 있다. 특히 ‘기도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따질 때 말이다. 그 기준은 유창함이다. 매끄러운 말투로 막힘 없이 흘러갈 때 우리는 “그 사람 기도를 참 잘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긴 기도’를 ‘긴 축복’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바리새인들도 그랬다. 기도의 격식과 양을 중시했다.
국내 교회에서는 ‘40일 특별 새벽기도’‘100일 특별 새벽기도’를 종종 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 도장을 받고 나면 왠지 뿌듯해진다. 무언가 ‘특별한 종교적 공로가 쌓이는’ 느낌이다. 일부 교회는 단 하루도 결석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개근상’으로 성서를 준다. 표지에 ‘40일 특별새벽기도’라는 문구가 ‘꽝’ 찍혀 있는 성서다. 일종의 ‘훈장’이다. 우리는 그런 성서의 표지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적은 없을까. 다른 사람 눈에 띄라고 표지를 바깥으로 돌려서 들고다닌 적은 없을까. 남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친 적은 없을까. 그건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들’과 무엇이 다른 걸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찾아와 논쟁하고 있다. 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율법을 예수가 깨트렸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럼 의문이 생긴다. ‘살다 보면 뿌듯함이 생길 수도 있지,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할 수가 있나.’ 맞는 말이다. 뿌듯함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대신 그때 그때 ‘포맷’하면 된다. 마음에 뿌리를 내려서 ‘에고’를 키우는 사료가 되기 전에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포맷’이 이루어질까. 하느님을 향해 영광을 돌리면 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해 생겨났으니까. 그게 ‘신을 향한 위탁’이다. 그때 ‘포맷’이 이루어진다.

마르크 샤갈의 작품 ‘기도하는 유대인’.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수도자들도 꽤 있다. 그래서 언론 인터뷰도 하지 않고, 바깥에 이름을 알리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소극적 해석이 아닐까. 오히려 문자주의적 해석이 아닐까. 핵심은 ‘세상에 알리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내 마음에 남느냐, 남지 않느냐’다. 세상 사람 다 몰라도 내 마음에 ‘뿌듯함’이 남으면 어쩔 건가. 그게 뿌리를 내리면 어쩔 건가. 그걸 먹고 에고가 자라며 어쩔 건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할 때의 왼손은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몰라야 한다. 기억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대신 기억에 달라붙어 있는 ‘뿌듯함’을 털어내라는 말이다. 예수는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복음 6장4절)고 했다. 자선은 언제 숨겨질까. 내 마음이 틀어쥐고 있지 않을 때 자선이 숨는다. ‘뿌듯함’이 포맷 될 때 비로소 자선이 숨겨진다.
예수는 왜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을까. 그리고 문까지 닫으라고 했을까. 왜 그냥 ‘아버지께’가 아니라 ‘숨어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을까. 바리새인들은 ‘회당’이나 ‘광장’에서 기도했고, 예수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 회당이나 광장은 바깥이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바깥을 향한다. 예수의 기도는 다르다. ‘골방’을 향한다. 그 골방이 어디일까. 그렇다. 나의 내면이다. 내 안을 향해 깊이, 더 깊이 닻을 내리는 일이다. 그럼 “문을 닫으라”는 건 뭘까. 바깥을 봉쇄하란 말이다. 기도의 방향은 내면을 향해야 하니 말이다. 그게 예수가 설한 기도다.
그럼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내 안이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 하느님이 창조했던 ‘아담의 속성’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 숨어 있다. 예수는 그곳을 향해 기도의 닻을 내리라고 했다. 바깥을 향하면 기도가 흩어진다. 내면을 향할 때 기도가 모아 진다. 그래서 예수는 골방의 문까지 닫으라고 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가 ‘숨어 계신 아버지’를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통하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교회의 벽에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었다. ‘주님의기도(주기도문)’였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100개가 넘는 나라의 언어로 ‘주님의기도’가 적혀 있었다. 돌판의 개수도 그만큼 많았다. 한국어로 된 기도문을 찾았다. 한참 걸렸다. 회랑 안쪽에 있었다. 뜻밖에도 두 개였다. 하나는 가톨릭식, 또 하나는 개신교식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복음 6장9~10절)
예수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썼다. 당시 아람어는 유대인의 공용어였다. ‘주님의기도’에서 예수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아람어로 “압바(Abba)”라고 불렀다. 유대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로 치면 “아빠”쯤 된다. 예수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고흐가 좋아했던 네덜란드 화가 아리 쉐퍼의 1839년 작품 ‘겟세마네의 고뇌어린 기도’. 네덜란드 도르드레흐트 미술관 소장.
우리는 다르다. 여전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건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늘 ‘거리’가 있다. 그래서 “아빠”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저 엄격하고 거룩한 분이다. 우리가 기도를 올려야 하는 대상이다. 내가 감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예수가 기도한 공간. 창살문 사이로 카메라를 넣어 줌으로 당겼다. 공간이 좀 더 자세히 보였다. 좁다란 바닥, 저 어디쯤에서 예수는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몸소 읊던 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일러주었다. 이렇게 기도를 하라며 말이다.
예수의 눈에 하느님은 자신에게도 ‘압바’이고, 제자들에게도 ‘압바’였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압바’이다. 왜 그럴까. 인간을 지을 때 하느님이 ‘신의 속성’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런 ‘신의 속성’이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있다. 다시 말해 ‘없이 계신 하느님의 DNA(유전자)’가 우리 안에도 흐른다. 그러니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압바’이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압바)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압바)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압바)의 뜻이 이루어 지소서.” 그걸 위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다.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말이다. 왜 그럴까. 그곳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 나라다. 땅은 어디일까. 나의 나라, 나의 내면이다. 하늘이 땅이 되는 일. 예수는 그걸 위해 이 땅에 왔다.
주기도문 교회의 벽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님의기도’가 적혀 있다. 각 국의 문자를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앞에 서서 눈을 감으면 그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흐른다.
예수의 기도는 계속된다.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복음 6장12~13절)
예수는 하늘이 땅이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했다. 첫단추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일’이다. 그걸 한 다음에야 ‘하느님의 용서’가 움직인다. 여기에는 ‘용서의 이치’가 담겨 있다. 용서가 뭔가.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을 털어내는 일이다. 일종의 ‘포맷’이다. 앙금을 다 털어낼 때 우리는 ‘텅 빈 마음’이 된다. ‘하느님 나라’에는 앙금이 없다. 그러니 내게 앙금이 없어야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다. 내게 앙금이 남아 있으면 ‘하느님 나라’가 오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교회를 거닐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불교의 언어다. 아랍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이슬람의 언어다. 히브리어로 된 ‘주님의기도’도 있었다. 유대교의 언어다. 언어가 다르고, 언어에 깔린 종교적 배경이 달라도 메시지는 통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길. 그건 모든 종교의 염원이다.
순례객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예수가 기도한 곳에서 부르는 예수의 기도. 그 기도가 바위에 부딪혔다. 천장에도 울리고, 바닥에도 울리고, 순례객들의 심장에도 울렸다.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복음 6장12절)
<16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15 - 예수는 왜 하느님을 ‘아빠’라 불렀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