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정(聖家庭)의 비밀 1 - 순종
성탄 다음 주일을 항상 ‘성가정 대축일’로 지냅니다. 성가정이란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을 일컫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굳이 재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가정이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가정일까요? 오늘부터 3일간 연속으로 ‘성가정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성가정의 비밀을 복음삼덕을 통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딸아,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네가 계집종처럼 처신한다면 남편은 너를 노예처럼 다루고, 만일 네가 너무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봉사하기를 싫어하면, 그는 힘으로 너를 하녀같이 부릴 것이다. 만일 남편이 친구 집을 방문하러 갈 때는 목욕도 하게 하여 몸치장을 잘해서 보내도록 할 것이고, 남편의 친구가 놀러 올 때는 극진히 대접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남편으로부터 귀여움을 받게 될 것이다. 언제나 가정에 마음을 쓰고 그의 소지품을 귀중히 여겨라.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 것이다.”
여성 인권주의자가 이 글을 읽으면 왜 여자의 의무만을 강조하는지, 혹은 왜 아내가 남편을 섬겨야 하는지 강한 반감을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남편보다 아내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면 조금은 다를 것입니다. 아내는 ‘안’과 ‘해’가 결합되어 ‘집안의 해(태양)’이란 뜻입니다. 왜 사탄이 아담이 아니라 하와를 먼저 유혹했을까요? 아내가 가정의 핵심이라 하와만 넘어뜨리면 아담은 저절로 넘어질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정에서의 아내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성가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는 ‘순종’입니다. ‘순종’은 ‘질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있는 곳에서 질서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삼위일체로 한 몸을 이루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고,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께 순종하여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도 순종과 질서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도 질서가 없다면 하나로 일치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성가정을 부를 때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에 가장 높고,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두 번째로 높으시고, 요셉성인은 비록 가장 훌륭한 성인이기는 하지만 이 두 분보다는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요셉성인이 가장이셨고, 성모님은 아내였고, 예수님은 아들이셨기 때문에 질서 상으로는 요셉성인이 가장 높고, 성모님이 그 다음, 예수님이 마지막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이 있으셨지만 하느님은 성가정의 중요한 모든 결정사항을 요셉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성모님과 혼인해야 할 때도 천사를 요셉에게 보내어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한 것이니 마리아와 혼인하라고 하십니다. 또 아기를 낳고 난 후에도 요셉의 꿈에 나타나 빨리 이집트로 피난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리고 헤로데가 죽었으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지시도 요셉에게 내리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도 세상에서의 가정의 질서를 존중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가정을 이끌어 가시는 뜻을 가장인 요셉성인께 드러내 보이시는 것을 아시고 요셉과 혼인하고, 베들레헴으로 만삭 중에 올라가고, 추운 겨울에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게 하여도 가장에게 절대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으며, 갑자기 집을 버리고 이국땅으로 가자고 할 때도 군말 없이 따랐고, 아기를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도 가장에게 아무런 불만도 갖지 않고 아들을 찾았을 때는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아느냐?” 하시며 가장인 요셉을 앞에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질서 상으로는 요셉성인이 가장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하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루카복음 2장 51절에도 “예수는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며 사시게 된 이유는 바로 하느님도 인간의 질서를 존중하고 깨뜨리려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느님의 뜻을 강하게 느낀다면 자녀도 당연히 부모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성인식이 끝나고 성전에 그대로 남아있어서 부모들이 애를 태우며 찾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성소의 길로 가려고 하는데 부모가 반대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임을 굳게 믿는다면 부모님께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를 제외하고는 항상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자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즉,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고 당신 모든 것을 그에게 주십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아집니다. 탈무드에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일 네가 남편을 왕처럼 존경한다면 그는 너를 여왕처럼 우대할 것이고... 남편은 기꺼이 네 머리 위에 관을 씌울 것이다.) 성자께서 아버지께 왕처럼 순종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성자께 당신과 똑 같은 지위에 있도록 관을 씌워주시는 것입니다. 그 관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자가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결국 아버지와 같아지고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아내도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남편과 한 몸을 이룹니다. 순종하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이고 그 사랑으로 서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서를 무시하고 아내가 남편 위에 서게 될 때 둘은 정말 둘로 갈라져 싸우게 됩니다. 물론 남편도, 요셉 성인이 하느님의 뜻에 절대 순종한 것처럼 자신 위에 하느님을 두어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남편에 순종함으로써 아내와 자녀도 남편에게 순종하면서 동시에 결국 주님의 뜻에 일치하여 살게 됩니다. 남편이 하느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온 가족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 가정은 같은 영광을 차지하게 됩니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면 아내는 저절로 영부인이 되는 것처럼 가족은 그 질서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은 영광을 나누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듯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신비를 살지 않는다면 온전한 사람이 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 한 몸이 되는 신비의 핵심은 바로 ‘순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가정의 비밀 2 - 정결
성가정의 비밀 두 번째는 성모님이 평생 동정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즉, 요셉성인과 성모님은 평생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가정을 이루는데 부부관계를 함께 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올바르지 않은 부부관계로 죄가 들어오고 사랑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14세 되던 1975년, 중국의 주문모 신부가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입국하자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고 첫 영성체를 하게 됩니다. 그녀는 오랜 기다림 끝에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감격을 체험했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평성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당시 양반집 규수가 결혼하지 않고 동정생활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용납이 안 되던 때라 주 신부는 또 다른 동정생활을 결심하고 있던 한 젊은이를 떠올려 둘을 연결시켜줍니다. 그가 유항검의 아들 유중철 요한입니다. 주 신부는 이 둘이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결혼을 허락해 줍니다.
두 사람은 남매처럼 지내며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고 집안의 많은 노복들에게도 애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둘이 순교하기 전 함께 4년을 동거하는 동안 유혹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루갈다는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 내외 처음 만나던 날에 서로 수절하기로 맹세하니, 평생 근심이 일시에 풀려 4년 동안을 형제같이 살며, 그 사이 혹독한 유감이 몇 번 있어 대개 열 번이나 무너질 뻔 했사오나, 공정하올 성혈 공로로 계교를 물리쳤나이다.”
이 한 쌍의 부부의 동정생활의 장한 의지를 보호한 힘은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사랑이었습니다.
루갈다는 1802년 휘광이에게 자기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웃옷을 벗고 조용히 머리를 도끼 밑에 놓았습니다.
현대에 동정부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비웃음을 당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이 부부가 동정으로 살았기에 다른 부부들보다 사랑이 덜 했을까요? 아마 육체적 욕망을 승화하여 더 깊은 사랑을 한 부부는 아니었을까요? 자신들의 사랑을 넘어서 하느님과 이웃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제 우리는 부부관계가 정말 부부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것인지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는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할머니를 두고 할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다시 태어나도 이 할머니와 혼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젊은 부부들도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부부관계는 사랑과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도가 있어야 한다고 교회에서 가르칩니다. 만약에 자녀출산의 의도만으로 부부관계를 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오는 신자가 급격히 줄 것입니다. 따라서 부부끼리의 관계는 자녀출산의 의도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는 가정 하에 죄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죄가 아닐까요? 냉철하게 보자면 자녀를 출산하려는 의도 자체가 있더라도 육적인 욕망의 의도가 전혀 섞이지 않을 수 없기에 죄가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모든 자녀들 또한 죄 중에 잉태되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내 어미가 나를 죄 중에 배었나이다.” (시편 51,5)하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자신들의 음부를 나뭇잎으로 가리게 됩니다. 이는 육체를 지니고 살고 있는 이상 성적인 관계가 부끄러운 것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성욕은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지니고 있고 그렇게 원죄가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들처럼 성욕도 없이 교배시기에만 부부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녀출산율만 보아도 그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성욕을 주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부관계에 죄가 섞여 들어오게 되자 부부관계 자체가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해도 자신을 죄짓게 하는 사람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치의 순간이 오히려 분열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고슴도치 부부가 있었습니다. 날이 추워지자 둘은 서로의 몸을 따듯하게 하기 위해 상대에게 다가갔습니다. 다가갈수록 서로의 몸을 녹여줄 수 있었으나 서로 가시에 찔려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딜레마입니다.
절제 없는 부부관계는 서로 간에 죄를 짓게 하는 것이므로 그나마 있었던 사랑까지도 사라져 미움이 들어오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즉, 부부관계가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사랑을 감소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현대에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부부간에도 정결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과 요셉성인은 동정부부였지만 우리가 성가정이라 부르는 가정의 모델이 되셨습니다. 이는 부부간의 정결함이 두 사람의 사랑을 감소시키기는커녕 더 완전하게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떤 부부도 이 두 부부만큼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과 요셉성인은 가장 순결해지심으로써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까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죄가 없어서 하느님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그래서 완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고 그 사랑으로 완전히 한 몸이 될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부부가 다 동정으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자매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육적인 사랑에서 더 높은 사랑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결혼하면 육체적인 관계만을 상상하게 되는 이 세대에 이런 것들을 쓰는 것 자체가 많은 반감을 일으킬 것은 짐작하지만 믿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면 안 되기에 말씀드려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정결’이 성가정에 감추어져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성가정의 비밀 3 - 가난
오늘은 정말로 성가정 대축일입니다. 이틀 동안 ‘순종’과 ‘정결’을 통해 성가정의 의미를 묵상해 보았는데 오늘은 복음삼덕의 마지막인 ‘가난’에 비추어 성가정의 의미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제가 서울 한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두 분의 행려자들이 식사를 하시고 나와서 심하게 다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한 행려자가 다른 사람의 신문을 들고나간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신문이 이불과도 같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신문만 잔뜩 모아서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그 많은 것 중에 하나를 뽑아 간 것인데 그 난리가 난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신문을 하나 주겠다고 해도 해결되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자존심까지 손상을 입었는지 그 신문을 돌려받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어쩌면 행려자들도 가난한 사람들이 아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것들에 지독하게 ‘집착’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예수님께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이 그 사람들보다 더 가난할 수 있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수천 만원하는 향유를 한 번에 예수님께 발라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유다가 매우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팔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도둑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돈에 더 집착한 사람은 그 여인이 아니라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이란 ‘집착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첫 인간의 후손인 카인은 아벨이 부유하게 되자 질투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이 집착과 욕심은 개인은 물론이요 가족 안에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의 집착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줄어들게 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집착’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지만 ‘집착’은 강제로 ‘소유’하려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요셉성인과 성모님에 의해 성전에서 봉헌되십니다. 봉헌은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세상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자녀도 사실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삼형제 중 막내입니다. 형 둘이 아마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못해서인지 부모님이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셨습니다. 저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름대로는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춘기 때 즐겨 불렀던 노래가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란 노래였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사랑하는 어머니 부모님은 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원하셨어요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따라야 했었지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은 삼가했기에 언제나 나는 얌전하다고 칭찬받는 아이였지요 그것이 기쁘셨나요
화초처럼 기르시면서 부모님의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러나 이제 말하겠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다 주셨지만 나는 아직도 아쉬워하는데 이렇게 그늘진 나의 마음을 그냥 버려두지 마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어요
부모님이 부모님이 살아오신 그 길이 나의 인생은 될 수 없어요 시대는 언제나 가고 가는 것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다시 돌아보세요 그때는 아쉬운 마음이 없으셨나요 나는 이미 알고 있어요 부모님이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랑인줄을 나는 알아요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도 부모님은 알아주세요”
부모님이 아이들의 삶을 마치 자신들이 못살았던 것을 대신 살아주어야 하는 듯이, 혹은 자신들이 살았던 대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님도 부모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자녀에게도 자녀가 선택해서 살아야 할 자유를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이 그들을 전혀 터치하니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도 항상 우리가 좋은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시지만 우리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자녀들에게도 좋은 길을 가르쳐주기는 할지라도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들이 죽으러 나가는 것을 뻔히 알고도 아들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삶이 아들이 가야하는 삶이기 때문이고 아들이 선택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했다고 나몰라라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오히려 당신 모든 것들을 자녀를 위해 바치실 줄 아셨습니다. 갑자기 이집트로 떠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성가정은 나자렛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집과 모든 것을 남겨둔 채 그날 밤으로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만약 재물에 집착했더라면 나자렛으로 다시 내려가서 짐을 챙기는 시간에 헤로데에게 잡혀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사람이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불교는 이 ‘비움(空)’이 바로 해탈의 경지라 합니다. 그러나 비워지기만 해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집착이 사라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비워있는 항아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귀중한 것으로 채우기 위해서 비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베들레헴의 마구간은 이 빈 항아리였습니다. 비워졌으니, 그렇게 가난해 졌으니 아기 예수님께서 들어와 쉬시게 된 것입니다. 사실 마음은 가장 가난해졌지만 하느님으로 채웠으니 세상 누구보다도 큰 부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우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만으로는 성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가난을 예수님으로 채웠기에 예수님을 통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참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가정은 바로 남, 녀가 만나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는 기찻길과 같습니다. 함께 하지만 결코 만나서 혼합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그 기차가 두 길을 하나로 이어줍니다. 기차는 성령님, 곧 사랑이 되겠지요. 사랑은 더 멀어지지도 더 가까워져 혼합되지도 않게 하며 하나로 결합시켜줍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혼합되지 않으면서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성가정은 자녀가 있어서 자녀를 통하여 부부가 하나 되는 가정이 아닙니다. 한 쌍의 남, 여와 예수님만으로 충분합니다. 부부의 비움 안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사신다면 그것이 성가정입니다.
가정에도 질서가 있어야 하기에 순종이 필요하고, 욕망이 아닌 참 사랑을 위해 정결이 필요하며,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 가난이 필요하다는 것을 삼일에 걸쳐 묵상해 보았습니다. 모든 가정이 이 세상에서는 물론이요 천상까지 이어지는 성가정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