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이란 말마디에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이 뭔가 답답해져 옴을 느끼게 됩니다.
“구원받는 것마저도 ‘무한경쟁’이란 말인가요?”라는 공허한 질문을 예수님께 던져 봅니다. 어릴 적부터 자원은 오로지 인간뿐인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짓밟고 죽이는 일에 넌더리나게 푹 빠져 살아왔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직장 다니기 위해 남들보다 더 좋은 대학교, 더 좋은 고등학교, 더 좋은 중학교, 더 좋은 초등학교, 더 좋은 유치원 등등에 다니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우리에게 ‘좁은 문’은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지긋지긋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도 ‘좁은 문’이라뇨?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신앙생활도 결국엔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이들을 물리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뜻일까요? 사랑의 예수님께서 설마 이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문득 신학생 때 수업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총은 무한하게 크지만, 그렇게 큰 은총을 받아 담아야 할 우리 그릇이 너무 작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신의 그릇이 작은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박하게 작다고 하느님 탓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을 향한 ‘좁은 문’과 구원의 ‘좁은 문’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제가 간과했습니다. 일등 학교, 일등 직장은 누구나 ‘정말로’ 원하기 때문에 그곳을 향한 문은 ‘실제로’ 좁지만, 그와 반대로 구원을 향하는 길을 ‘정말로’ 충실하게 걸어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적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주 넓기만한 구원의 문은 좁은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인 정치인은 많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처럼 정치하는 사람은 적은것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겉으로 외치면서도 구원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무척 적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은 모르는 사람들이오. 미안하지만 문을 열어 드릴 수 없겠소.”라며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는 우리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이라 해주실까요? 우리 얼굴을 알아보셔야 우리가 구원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사실 정답은 우리 양심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한 번 오랜만에 일으켜 세워 볼까요? 정답은…:“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끝으로, 제 가슴 속에 작은 울림을 남긴 요한 23세 교황님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아르 지방의 한 평야에 세워진 바벨 탑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첫 세기에 건립된 그 탑의 건설은 혼란을 일으키며 중단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유형의 탑들을 사람들은 짓고 싶어 합니다. 분명한 것은한 가지입니다. 첫째 탑의 운명을 후대의 탑들도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