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 확률!

2000. 8. 2. 오전 12:33:12

글자

하루 종일 일이 잘 안 풀리더니 끝내는 야근까지 하느라

부득이 약속도 깨고 늦게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새로 맞춘 안경을 찾으러 명동에 들러 공연히 좀 헤매다가 버스를 탔지요.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동네를 지나는 새로 생긴 노선 버스를 타고

서울역 앞을 지나 갈월동에 들어섰습니다. 기분도 그렇고....

중간에 내려 한 잔 할까, 하고 벼르고 있는데,

갑자기 이 버스가 예정된 진로를 벗어나는 겁니다.

어?? 여기서 우회전해야 숙대 앞에 가는데...

 

우회전해야 하는 길을 그냥 지나치길래 돌아보니까,

무슨 사고라도 났는지, 소방차며 구경꾼들이며..

그렇다고 버스가 거기 멈춰 서서 구경하고 있을 리 없지요.

마치 이럴 줄 알고 준비했다는 듯이, 버스는 샛길을 용케 찾아서 이내 정상 궤도에 오르더군요...

 

덕분에 아지트에 들르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꼼짝없이 집을 향해 가면서 생각했습니다.

와, 버스도 노선을 바꾸어야 할 때가 있구나. 버스도 정해진 길로 가지 않을 때가 있구나. 생각 같아서는, 그랬다가는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은데 이러기도 하는 구나....

 

생각해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그렇게 느닷없고 갑작스러운 것. 놀라운 것.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태연하게 일어나는 것.

그래, 버스도 가끔 일탈하는데, 사는 일이 어떻게 계획대로만 되겠느냐,

이렇게 저렇게 난데없는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렇게 인생이 난데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하고 생각했습니다..

 

후배 녀석 하나가 있는데요..

워낙에 털털하고 좀 터프하고 반항적인 아이였습니다.

한 2년 소식이 뜸하더니 최근 소문에 의하면 결혼을 한다더라구요.

그래서 생각 없이, 그래, 안 간다는 놈이 먼저 간다더라, 하고 말았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녀석이 병명도 알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린 장애인과 결혼을 한다는군요.

섭취한 영양분을 시력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병이랍니다.

아무리 잘 먹어도 눈은 나날이 멀어진다고 하는군요.

이 바이러스의 진로는 도무지 밝혀지지가 않아서, 지금은 눈이 안 보이는 정도이지만

앞으로는 어느 날 심장이 갑자기 멈출지, 간이 갑자기 해독을 못할지,

신장이 노폐물을 삼킬지 모른다는 겁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죠.

후배는 부모님께 자세한 사정을 숨기고 2년의 갈등 끝에 결혼 승낙을 얻었다구요.

 

이 후배의 소식을 직접 들은 제 친구가, 그 녀석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으로 치자면 누구나 마찬가지란다. 그렇게 치면 지금 당장 건강한 사람도 내일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야.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거지, 하고 마음먹었으면 그렇게 가는 거야. 그게 최선이면."

 

저는 이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 후배 녀석에게 해 준 제 친구의 조언이 얼마나 적절한가 생각했습니다. 인생의 확률이라는 것이 그렇지요.

 

지금 제가 과일 가게 앞에 서 있다고 해요.

제가 오렌지를 아주 좋아해서 몇 개 골라 담으려고 하는데,

다른 가게에 비해 유난히 친절하고 정직한 주인이 말하는 거죠.

"오늘 오렌지는 그다지 싱싱하지 않아서 좋은 것을 고를 확률은 20%밖에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렌지를 먹고 싶어 병이 난  저는 오렌지를 고릅니다.

 

제가 고른 오렌지는 어떤 것일까요?

과일가게 주인 입장에서 보면 제가 싱싱한 오렌지를 고를 가능성은 20%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오렌지를 고르는 제 입장에서 보자면  

막 고른 오렌지가 싱싱하냐 아니냐는 정확히 반반의 확률일 뿐입니다.

막 고른 오렌지가 싱싱하냐, 아니냐.

 

사람들은 때로 우연한 일을 확률에 근거해 해석하려 하고

거기에 기대어 미래를 점쳐보려고 하고 끊임없이 통계를 냅니다.

확률이라는 것이 아주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며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확률이라는 것이 결국은 아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과일 가게의 오렌지가 얼마나 싱싱하냐가 아니라,

내가 고른 오렌지가 싱싱하냐 아니냐 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싱싱한 오렌지가 나에게 의미가 있냐 아니냐 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의 병이 워낙에 희귀해서 고칠 확률이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병을 고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병을 고친다 혹은 못한다, 그러니까 반반의 확률일 뿐입니다.

 

오늘 진로를 잠시 잃었던 버스를 생각합니다.

서울시에서 버스가 노선을 변경하는 일은  확률로 치자면 아주 낮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제가 탔던 버스는 노선을 고치냐 안 고치냐,

그러니까 50대 50의 확률 중에서 노선을 고치는 경우를 선택하게 된 겁니다.

 

어쨌든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느닷없고 갑작스러운 일이라면, 그렇다면.....

 

제 후배,

그 녀석 생각을 좀 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약혼자가 병을 고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러나 확률은 반반입니다.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죠.....

 

고교 시절

얼굴이 동그랗던,

머리가 짧았던,

은테 안경을 썼던,

유난히 잘 웃었던 녀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프다는 그 녀석의 신랑감을 생각합니다.

제 후배에게 확률이라는 것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를 빕니다.

 

오늘은 일이 잘 안 풀리는 날이었습니다.

필름 OK까지 받은 책이 유보되고,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이 이럴 수도 있는 거죠.

어떤 일이나, 그것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둘 중 하나.

확률은 언제나 반반이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렇게 놀라울 건 없죠.

 

세상에는 난데없는 일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게 꼭 나쁜 일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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