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이지만 겉보기에는 그렇지도 않은

2002. 2. 3. 오전 1:5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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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무슨 뜻이냐면... 글이 별로 없다는 얘기죠.
요새 저는 다시 글을 많이 써 보려고 하는데
지구 게시판에 열심히 써 놓고 혼자 대견해하며 주접스레 여기에도 올립니다.
오늘은 어린이들과 함께 놀았던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화요일 저녁에 중고등부 피정에 잠깐 들렀습니다.
6학년 아이들도 같이 가 있고...
중고등부 전 학년은 제가 교사를 하던 시절에 만난 아이들이고
그 중 반 이상이 제가 직접 가르쳤던 제자들이라
중고등부 행사 소식을 들으면 이제는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더군요.
퇴근하고 부리나케 달려가 저녁 먹고 잠깐 쉬다가
친교 프로그램에 같이 끼였습니다.
자기소개를 종이에 열심히 쓰고 뽑아서 읽으면
다른 친구들이 누구인지 맞추는 놀이였는데, 
아~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조금씩 놀랐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고 9시가 조금 못 되어 쉬는 시간.
아이들은 휴게실에 모여 커피를 마십니다.
어랍쇼? 6학년 꼬마들도 다들 한 잔씩 타서 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중고딩들을 알아도 역시 저의 소속은 초등부인지라
하릴없이 6학년 아이들에게 가서 놀고 있었습죠.
중3이지만 복사단을 오래 해서 초딩들과 친한 제원이는 키가 좀 크고 싱겁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커피-프림-설탕 배합은 딱 다방커피 수준이네요.
그러나 역시나, 물을 너무 많이 부어서 싱겁기 그지없습니다.
목소리도 굵어지고 여드름도 꽤 돋고 이미 총각 티가 나는 규형이는
조숙한 티를 내느라 설탕을 적게 넣었습니다.
달지 않긴 한데 프림의 텁텁하고 느끼한 맛이 두드러집니다.
많이 자라긴 했지만 아직 수선스럽고 아이같은 상준이는 
커피맛이 익숙하지 않은지 프림만 두배세배 넣었습니다.
이건 커피우유도 아니고 커피분유입니다. 우욱~!
평소 장난꾸러기에다가 다람쥐처럼 도망가기 바쁜, 
그러나 단단한 생김새에 가끔 예리함을 보여 주는 수환이는 
환상의 커피맛을 선보였습니다.
조금 단맛이 많이 나긴 하지만 가히 이상적인 배합이라 하겠습니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부리나케 정리를 하고 강당으로 내려갑니다.
수환이가 한 모금쯤 남은 커피를 개수대에 쏟아붓습니다.
아깝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교사 엠티를 가느라, 아이들과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겨울 방학 때 별 행사가 없다 보니 이제는 교사인 내가 심심해서 
아이들에게 미사 끝나고 놀러 가자고 꼬셨거든요.
약속은 지켜야겠다는 투철한 양심에 따라(어험! 끙~)
아이들 까페에 약속시간을 올리고, 
명진샘에게 압력을 넣어 벽보를 만들어 달라 했습니다.
까페에서는 반응이 안 좋습니다.
걱정스런 맘으로 일단 성당에 들어서니, 
웬걸, 우리의 명진샘은 역시나 화통합니다.
A4 용지를 예상했건만, 대문짝만하게 만들어 마당에 붙여 놓았습니다.
신청자도 제법 있더군요.
속으로 감읍하긴 했는데 아직 고맙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요.
아무튼 아이들은 주임신부님께 달려들어 사탕을 하나씩 챙기고
저도 덤으로 한 얻어 놓고 버스 타러 갔습니다.
8명의 아이들은 다행히 자기들끼리 잘 놉니다.
명동에 도착하여 가톨릭 회관에 부지런히 갑니다.
1층 성물 매장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탐은 나고 돈이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우리 아이들이었기에 망정이지 남이었으면 청승맞아 보였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기념품조로 기도문이 적힌 코팅카드를 하나씩 안겼습니다.
그러고 나니 바로 뒤에 상본 코너가 있더군요.
값이 싸니까 좋다고 하나둘씩 고릅니다.
 
명동 성당에 들어갔지만 아이들은 별 감흥이 없나 봅니다.
예전에 우리는 명동 성당 가는 게 정말 대단한 일인 줄 알았는데...
뒷마당에 가니 성모상 밑에 초가 잘 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도 돈을 걷어서 초를 봉헌하자 합니다.
뜻밖의 생각에 아이들이 무척 기특해집니다.
100원씩 걷었는데 나는 동전도 1000원짜리도 없어서 당황합니다.
그러나 착한 아이들이 돈을 조금 더 내 주었습니다.
작은 초에 불을 붙이고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일단 간식을 먹었는데 시간이 엄청 남습니다.
그래서 명동 거리를 한 바퀴 돌기로 했습니다.
어느 오락실에 들어가니 별별 기계들이 다 있습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구경을 하는데 
역시나 돈이 없으니 환장할 노릇입니다.
아니, 아이들은 별로 개의치 않았겠지만 보는 내가 안타깝습니다.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이 가게엔 별로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다른 출구로 나갔더니
바로 유투존 1층 입구로 통하더군요.
아시다시피 유투존 맞은편에 바오로딸 매장이 있지요?
시간 보내기 좋겠다 싶어 와르르 들어갔습니다.
말씀 쪽지도 뽑고, 여러 책도 구경하고, 음악도 이것저것 들어 보고
다행히 즐거운 시간이 될 조짐이 보입니다.
3층에 올라갔더니 저도 놀랐을 정도로 예쁜 물건들이 많더군요.
개중에 아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220원짜리 향기초입니다.
값도 싸고 향기도 그윽하니 딱입니다.
아이들은 없는 돈을 털어 두세 개씩 삽니다.
부모님께 드릴 거랍니다.
아이들만도 못한 내가 참말로 부끄럽더이다.
개중에 한 아이는 내 것도 사 주었습니다.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흐뭇하기 짝이 없지요.
성가대를 하는 아이들은 어린이 성가 음반을 아주 좋아합니다.
어쨌거나 교사라고, 나는 이 물건 저 물건 훔쳐보며 
품목이랑 가격 적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과연 나중에 도움이 될까요?
 
1층에 내려와 보니 어두워지려 합니다.
이상하군, 요샌 해가 긴데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6시가 가까웠습니다.
7시가 저녁 미사인데 큰일났습니다.
완전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은 격입니다.
부리나케 가게에서 나오느라고, 
이것저것 많이 배려해 주신 수녀님들께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버스 맨 뒷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이들은 별 시답잖은 것에도 웃음이 많습니다.
음... 부럽습니다.
아이들은 오늘 명동 다녀온 일을 꼭 일기에 쓰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일기에 쓰겠다’고 하면 그건 대단히 기분좋은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가슴벅참+뿌듯함+보람 만땅입니다.
비록 미사에는 지각했지만 즐거운 오후 한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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