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라는 탄성이 나올만큼 대림시기가 그렇게 문득 오고 말았다. 지난 어린이 미사 때 우리 성당에서는 대림시기가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성당의 불을 모두 끈 상태에서 5학년 여자 아이하나가 제대 앞으로 걸어나와 가장 어두운 보라색 초에 불을 붙이는 예절을 했다. 어두움 속에서 다가올 빛을 기다린다는 징표로서는 더할나위없이 참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오늘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떤 하루를 보낼텐데.’하고 생각을 하면, 머리가 텅빈 것 같이 공허할 때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만날 때, 아픈 이들을 볼 때,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고 찾아갈 때, 나는 쓸모없어라는 무력한 느낌으로 주눅들고 지친 영혼들을 만날 때, 가난함이나 사랑받지 못하는 절망감을 체험할 때, 굶주림과 전쟁, 불의의 소식을 들을 때, 마음은 금새 어두워진다. 대림 시기는 어두운 자주색 초같이 굳은 마음 속에 작은 기다림의 빛을 붙일 수 있기를 기도하는 때이다. ’만사가 우리의 선의와 희망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군.’이라는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마음에 ’만사가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로 귀결될 것’이라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빛을 밝히는 때이다.
종종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교리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다보면,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어제 미사가 끝나고 교리실에 가서 아이들 자리 정돈을 시키고 나선, 바로 전례 주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역시 10년을 넘게 교리를 하다보니 이런 것 정도야.’하면서 술술 자만심에 넘쳐서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뭔가 중요한게 빠진 것만 같았다.
"자 그럼, 전례주년은 이렇게 되는거구. 그럼 대림시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대림 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인데, 바로 이 ’대’자가 기다린다는 뜻이야. 기다릴 대. 그리고 ’림’은 오다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는거지. 왜 성가에도 보면 ’임하소서, 임마누엘이여’ 그러잖아?"
나는 아무 체험도 의미도 없이 건조한 사실만을 얘기해 주고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선생님, 설명이 너무 길어요. 빨리 저금통 만들어요!"
맨 앞에 있는 아라는 늘 중간에 끼어든다. 아무튼 아이들에게 진실한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기다림’은 무엇인지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미풍성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얘들아,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님을 기다리지?"
그것은 나한테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래 왜 우린 예수님을 기다리지?’ 잠깐 혼자 어물쩡하게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장난도 치는 아이도 있고,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는 아이도 약간 있었고, 여자아이들은 친구와 소담스레 얘기를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이었다.
"얘들아, 너희는 행복해?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런 슬픔도 없고, 너무너무 행복해? 선생님은 아니야. 선생님은 행복하지 않아. 예를 들어줄께 선생님이랑 같이 다른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선생님 다른 성당에서 왔잖아, 알지? 근데 그 선생님 이름이 말가리다야. 그런데 그 말가리다 선생님이 백혈병이라는 병에 걸려서 지금 많이 아파. 그래서 선생님이 잠깐 찾아 가서 얘기해 주고, 또 기도해 주고 왔어. 그 선생님은 참 착한 사람인데, 왜 그런 병이 걸려서 많이 아파해야할까? 생각하니까 너무 슬펐는데, 이상하게 병실이 낯이 익더라구. 언젠가 한 번은 와 본듯한 곳인거 있지. 그런데 나오면서 보니까 그 옆방 1223호가 바로 선생님이랑 같이 일했던 다른 선생님, 그 선생님 이름은 데레사야. 근데 데레사 선생님도 너무 착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열심히하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몇 년 전에 그 방에서 세상을 떠났어. 그래서 옛날 생각을 하니까 선생님 맘이 더욱 더 아팠어. 사람들에게는 너무 슬프고 힘든 일들이 많이 생기지 않니? 너희들도 어떤 친구들은 ’나는 왜 이렇게 공부를 못하지?’ ’나는 왜 이렇게 뚱뚱하지?’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지?’, ’왜 우리 엄마 아빠는 이혼하셨지?’라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맘 아파하잖아. 그런데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주 슬프고 어렵게 살았단다. 아니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은 사는게 힘들어서.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이 언젠가는 우리를 이런 아픔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야."라고 굳게 믿고 기다렸어. 바로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던 분이 예수님이었단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론 병도 치유해주시고 가난한 사람과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러셨지만, 더욱 놀랍고도 이상한 건 그분은 이 세상의 고통은 모두 사라져라 하고 마술을 부리신게 아니고 우리랑 똑같이 죄없이 아파하시고, 슬퍼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는거야. ’나는 너희를 정말 이만큼 많이 사랑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순간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신 나는 무언가 얽혔던 것들이 한가닥씩 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오지 않는 어떤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이 막연한 기대와 희망의 이면에 있는 그윽한 이유들이 어떤 것인지 다시 성찰해 볼 수 있었다.
교리 교사로서 나는 참 부족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는데로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사람이다. 나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라고 얘기하면서,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하기도 하고, 또 자주 자기비난과 자만심의 양극단을 오고 간다. 소박하고 가난한 삶이 아름답다고 가르치면서도 지금보다 훨신 더 여건이 좋아지기를 바란다. 기쁨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도, 자주 여러가지 처지를 비관한다. 정의로우라고 하면서도, 정의를 위한 일들은 용기있는 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남에게 미룬다.
교리 교사의 책무는 어떤 것일까?
몇 년전 데레사 누나가 죽고, 나는 만나던 사람과도 헤어졌다. 데레사 누나가 돌아가시기 전에 끔찍히 아파하던 모습을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도 매년마다 누나를 아는 친구들이 만나는 추모 산행에도 선뜻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삶의 어두운 현실이었다. 나는 그래서 데레사 누나가 사경을 헤맬 때에도 겨우 한번만 찾아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지하철역에서 아침마다 오지도 않을 그녀를 기다렸다. 따닥거리는 계단의 구두소리며, 획 내 앞을 지나는 아가씨들에게서 피어나는 샴푸냄새까지 모두 그녀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바로 지각하기 전 열차를 타면서 나는 역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깊은 좌절감에 잠겨야만 했다. 기도하기 어렵고, 특히 데레사누나의 죽음을 생각할 때 하느님이 계시는지 우리 삶이 선물인지 의심스럽기만 했고, 같이 교사하던 헤어진 그녀를 만나는 것도 껄끄러워서 한동안 교리를 하지 않고 교사 회합에도 나가지 않았다.
한 달이 다 되어서, 나는 대림시기가 지나면 꼭 희망을 되찾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의 빛이 다시 마음을 비치기를 기다리며 대림 4주를 보냈다. 성탄절이 다 되었을 무렵에 성당은 성탄 예술제 준비로 다시 어수선해졌다. 그 해 성탄절에는 필리핀 살레시오회 사제인 구스만 신부님이 세미나를 하러 왔다가 친분이 있는 나와 성탄절 저녁을 함께 보냈다. 남대문 시장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그간 내게 일어났던 일들과 신뢰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귀기울여 들은 그는 "베드로,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요, 우리가 그걸 느끼지 못할 뿐이지."라고 위로해 주었다.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내 안에서 이런 판단이 섰다. "너는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너는 절망하고, 너는 슬퍼도, 이 아이들의 영혼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하느님과 만나고 싶어해. 그러니까 네가 하느님과 그 아이들과의 만남을 방해해서는 안되는거야. 네가 확신할 수 없는 것 조차도 아이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어. 아이들은 네가 보지 못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게 될거야. 그러니 그 의무에서 도망치는 것은 옳지 않아." 나는 다시 회합에 나가고, 성탄제를 하고, 어린이 반모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사려깊은 신학자도 아닌 어린 꼬마 아이들은 내게 인사를 나누어 주고, 나를 좋아해 주고, 그들이 가진 삶의 기쁨을 내게 나누어 주었다. 어린이들 덕분에 나는 아무 이유없이 성당에 와 있으면 좋았던 어린 시절의 기쁨과 평화 속으로 되찾아 갈 수 있는 영성적 길을 발견했다.
대림절이 시작되는 저녁에 Taize의 길랭 수사님으로부터 메세지가 왔다. ’재선, 오늘 밤 우리는 기대와 희망의 아름다운 시기인 대림시기로 들어섭니다. 당신과 함께 기도해요. 그리스도 안에서 길랭 수사.’ 짧지만 마음에 길게 머무는 글귀다. 수사님은 늘 만날 때마다 손을 굳게 잡고, 깊은 우정의 미소로 인사하신다.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신뢰의 악수를 나누고, 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 어느 바람 많던 추운 가을 날 그는 한국에 건너 와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을 모아서 피정을 했다. 피정이 끝나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작은 돌 하나를 보여주었다. Taize의 동료 수사 한 사람이 길가에 있는 작은 돌 하나를 주워서 예쁘게 무언가를 새기고 있길래, 길랭 수사님은 ’참 예쁜 돌이군요. 길가에 있는 평범한 돌이었는데... 수사님이 그 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예쁘게 꾸미시는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요?’라고 얘기하셨다고 했다. 길랭 수사는 불어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요?"라고 써있는 작은 돌을 보여주셨다. 그는 정말 그 돌을 소중하게 지니고 다녔다. 따뜻한 위로에 잠길 수 있는 순간이었다.
기다림의 시기가 왔다. 어린이들과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풍성하게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기다릴 땐 서로 격려하는 것이 더없이 좋기 때문이다. 어린이들과 함께 있을 때 영혼은 더욱 생기를 얻고, 기쁨과 생명의 샘이 내면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