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팅이 한국에 오다니.
그녀의 이름은 우리 말 발음으로는 황민정이다.
작년 겨울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 같은 가톨릭 NGO에서 일했던 동갑내기 중국인 친구는 이제 부터 하루에 한명씩 자기가 아는 성당 여자들을 소개시켜줄테니, 누가 제일 맘에 드는지 나중에 얘기하라고 농담을 했다.
기실 Aloysius는 그 예전부터 대만에서 만난 적이 있는 Margarette이 맘에 들지 않냐고 늘 나를 떠보던 차였다. 그건 그냥 남고생들이 옆 여학교에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말장난같은 거였다.
아무튼 Margarette은 노래를 잘하고 귀엽기는 하지만, 중국인 같지 않아보이고... 아니 그냥 내 타잎은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날 밤은 거기 페낭의 ex-YCS 회원들과 함께 해산물을 먹으러 갔다. 차를 타고 갈 때 밍팅이 내 옆에 앉았다. 밍팅은 시끄럽고 호들갑스러웠다. 나도 시끄러운 편인데 시끄러운 여자는 싫었다. ex-YCS 회원들은 식당에 앉았을 때도 일부러 밍팅을 내 옆에 앉혔다. 밍팅은 그게 싫었는지 금새 다른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가 식사가 다 끝날 무렵에 돌와와선, 나한테 삶은 게를 먹을 때 나무 망치를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밍팅은 아무래도 시끄럽지만,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 했다.
한번은 밍팅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몇 백년 전에 홍콩같은 그러니까 영국 식민지와 중국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는 어떤 거리를 지나 인도인들이 하는 찻집을 갔었는데, 밍팅은 낡은 한문간판이 있는 예집을 가리키며 예전에 어렸을 때 거기 살았다고 했고, 또 영화 'The King and I"를 찍은 곳도 어디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밍팅을 보지 못했다.
그냥 떠나오기 전에 Aloy가 자 그럼 지금까지 만나본 아가씨들중에 누가 제일 맘에 드냐고 묻길래 그냥 '밍팅'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구. 그냥 밍팅이 시쳇말로 너무 섹시한 미미보다는 덜 부담스럽고, 똑부러지며 회사원티가 나는 Christine보다는 덜 때묻은 듯하고, 어린 여고생같이 귀여운 스타일이라서... Aloy는 장난 반으로 내가 떠나오기 전에 밍팅과 전화통화를 할 수있도록 전화를 해주었다. 밍팅과 나는 아주 건조한 인사를 나누었다. 공항에 같이 나온 Joseph은 밍팅의 e-mail주소를 가르쳐준다고 했지만, 난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스치는 인연인데. Joseph은 Don't be shy.라고 하면서 비행기 티켓 뒤에다 밍팅의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지난 주말에 지하철을 타고 승관이형, 준기, 근철이형을 만나러 화곡동에 가고 있었다. 그날은 창4동 선생님들에게 내가 저녁을 사드리고, 돌아서는 길이었는데, 늦은 시간이었어도 화곡동에 가면서, 왜 나는 이렇게 친절하고 잘해주는 좋은 창4동 선생님들에게서는 내가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늘 손님처럼 눈치를 볼까? 또 화곡동에는 밤 10시에 도착해서 한 시간을 있다가 돌아와야할 때도 무리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속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참으로 나로서 이해되고 인정받는 것은 무엇일까? 지하철 안에서 책도 못읽고 우울한 생각에 젖어 있을 때였다. 머 이제는 모두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화곡동 사람들을 만나도 별로 할 얘기는 없다. 영훈이형이나 희조형같은 의사들의 얘기도 잘 모르고, 준기의 강남 얘기도 내게는 너무 먼 이야기들이고, 지나나 민옥이의 회사얘기도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세계이고, 결혼한 사람들의 얘기들도 모두 아직은 먼 얘기들이다. 철안이형이나 근철이형의 스포츠 토론을 들을 때도 나는 너무 아는게 없는 얘기뿐이다. 어떤 때는 나만 너무 주일학교에 남아서 자연스런 삶의 변화들을 억지로 외면하면서, 예전처럼 지내고 싶어하는 무슨 퇴행의 방어기제에 매달리는 사람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결국 너도 네가 학교 다닐 때 세상물정은 하나도 모르면서 애들한테 큰소리나 치는 촌스럽고 쪼다같은 선생이되었구나.'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별 얘기를 하지 않아도, 남들이 술을 마실 때 옆에서 콜라를 홀짝거리고 안주나 축내도, 그들과 있으면 내가 나로서 그들에게 더욱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형, 누나들, 친구들은 '재선'이를 잘 알아준다. 그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의 허물까지 말없이 보듬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무튼 그 때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였다. Hello, I am Veronica. 그래서 나는 되물었다. Veronica from where? 그랬더니 I am Veronica from Penang. 이런 밍팅이잖아. 생각했다.
그래서 어제 저녁 밍팅을 만났다. 밍팅은 그새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석사학위를 마쳤다고 하고, 내 공부에 대해서도 물었다.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여행을 왔다고 했고, 서울 날씨가 너무 춥다고 했다. 지하철을 탈 때 저녁을 먹을 때 차를 마실 때 밍팅은 꽤 수줍어했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고 여러 번 얘기했다.
대학원도 휴학하고, 한동안 영어를 쓰지 않았더니. 영어 실력이 너무 녹슬었는데다가 밍팅과 나는 서로 너무 다른 악센트를 쓰기 때문에 서로 못알아들을 때가 많았다. 멜버른에서 대학을 다닌 그녀는 호주발음과 중국인 발음이 뒤섞여 있고, 나는 미군부대에서 배운 브로큰 잉글리쉬가 뒤섞인 콩글리쉬를 쓰기때문에...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밍팅을 다시 만나다니, 아무래도 너무 기분좋은 일이었다.
후훗, 살다보면 재밌는 일이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