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영이와 세림이

2002. 10. 7. 오후 2:23:24

1
글자

어젠 배론으로 어린이들과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비가 오는 숲속을 걸으며 십자가의 길을 했는데, 빗방울이 후두둑 나무잎을 까딱거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평화로와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어린 시절 높은 언덕에 있던 화곡본동성당에서 저녁미사를 드릴 때면 첩첩이 쌓인 지붕들뿐 아니라 먼 산들마저 거무스르하게 타들어가게 하는 붉은 노을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참 평화로운 일이었다. ’찬란한 태양이 온세계 비춰 세상은 평화를 누리네.’라는 러시아 성가를 미사곡으로 부를 때면 그런 느낌은 더 좋았다. 교사가 되어서는 미사때이든 신앙학교때이든 창밖으로 눈이나 비가 오는 걸 보는데 정신이 팔린 적도 많았다. 어린이 미사때 영성체 후 이슬 성가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 성당 이웃집 마당에 나무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슬쩍 보거나, 축 늘어진 전깃줄에 구슬같이 구르는 빗방울을 눈여겨 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는 너무 좋아서 그 사람이 독서하거나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 내용은 금새 잊어도 마음 안에 깊은 평화가 감도는 걸 느낀다. 어제 배론 숲 속에 내린 빗방울들은 평화를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의 부드러운 숨결섞인 목소리같았다. 나는 십자가의 길에 집중하지 않고도, 평화로웠고, 사랑을 느꼈다.   

 

예기치 않은 선한 일의 개입, 하느님의 개입은 늘 있게 마련이다. 마티아 신부님을 만난 것도 그랬다. 마티아 신부님께서 어린이들에게 친절하게 최양업신부님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또 강복까지 해주셔서 좋았다. 그렇게 사제는 항상 특별하다. 내가 캐나다에서 직접 그린 그림을 넣고, 90장을 모두 프린터로 뽑아 공들여 만든 글짓기원고지를 성당 교사실에 빼놓고 온 것도 선한 일이 되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지겨운 글짓기 대신 잔디밭에서 학사님, 선생님들과 신나게 얼음 땡을 하기도 하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기도 했다. 예전에 신입 때 아이들과 미리내로 성지순례갔던 기억이 겹쳐지면서 내면에서 샘솟는 행복의 물로 갈증을 달랬다. 15지구 마라톤 대회 때도 느낀 것이지만, 주일학교 교사들이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건 참 아름답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유치부부터 복잡한 감정들로 소용돌이 치고, 퉁명스러움으로 일관하는 6학년까지 모두 나름대로 돌봄을 필요로 하고 누군가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 젊은 교사들은 사랑받고 싶지만 또 너무 사랑하고 싶어한다. 20대는 정말 사랑이 넘치는 시기이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이다. 자기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이다. 아이들도 우리가 참으로 조건없이 헌신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법을 터득하도록 선생님들을 돌보아 준다. 그래서 그 둘은 잘 어울리는 사이다.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깊은 신뢰심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살아가면서 마음 한켠에 하느님과 만난 기쁨들을 간직한 작은 방을 안고 산다면, 아이들은 지치고, 외롭고, 힘겹고, 두려울 때 그 방문을 열고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깊은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 안에도 하느님과 만나는 작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그 방이 있다. 이 방의 대부분은 어릴 때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꾸며주셨다. 소풍갈 때 손을 꼭 잡아주시던 소피아 선생님, 무서우셨던 베드로 선생님, 처음으로 교리를 재미있게 가르쳐주신 요한 선생님, 그리고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를 선물해 주신 발렐리아 선생님, 마음의 벗이 되어주신 이사벨라 선생님. 그분들은 어제 다영이의 머리끈을 묶어준 헬레나 선생님처럼 나의 기억의 방 안에 정겨운 그림들을  걸어 주셨다.     

 

  아이들은 밉다. 떠들고, 버릇없고, 무례하고, 신경질적이다. 그렇지만 그리 밉지도 않다.   멀미를 해서 맨 앞에 앉게된 다영이는 교리에 잘 나오지 않는단다. 처음 만나서 서로 쑥스러워서 내쪽에서도 말을 못꺼냈다. ’어느학교 다녀 다영아?’ 말문이 터지고 얼마되지 않아서 다영이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님, 제 목소리가 이상해요, 남자 아이들이 제 목소리가 엽기적이래요."

"다영이 목소리는 개성있고 좋아. 좀 더 어른이 되면 평범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보다 자기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느낄거야."

 

 세림이는 어머니 교사인 로사 선생님의 딸이다. 4학년인 세림이는 가끔씩 엄마 핸드폰으로 "베드로 선생님, 머하세요? 메롱이에요."라는 메세지를 보내거나 "선생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메세지를 보낸다. 이미 어두워져서 성당에 도착하기 전 버스 안에서 가방을 둘러 맨 세림이는 말을 꺼냈다.

 

"선생님, 선생님은 몇살이에요?"

"32살"

"선생님의 아버지는 살아있어요?"

"응"

"아, 다행이다."

"왜?"

"그럼 제가 선생님 나이가 되어도 저희 엄마랑 아빠랑 모두 살아계실테니까요."

"선생님의 할머니도 제작년에 돌아가셨고, 선생님의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살아계시니까, 세림이가 선생님의 아빠, 엄마나이가 되도 세림이 어머니 아버지가 건강하시면 모두 살아계실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다영이처럼 세림이처럼 나도 걱정을 하고 산다.

’나는 왜 이렇게 시시한 남자가 되었을까?’,’부모님이 건강하시고 기쁘게 사셔야하는데.’

하지만 나는 다영이나 세림이의 걱정을 덮어주고 싶다. 다영이한테는 다영이가 참 예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고, 목소리도 너무 근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다. 세림이 한테는 부모님은 그렇게 일찍 세림이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싶고, 설사 불행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사랑,돌봄은 세림이 곁에 영적으로 언제나 머물 것이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다영이와 세림이는 걱정에 지쳐서 살기에는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하나하나를 자비로운 눈길로 보시는 그분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실까?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15지구 모임방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