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촌소묘

2002. 10. 16. 오후 7:55:40

글자

 학생들이 "아휴, 또 시험기간이야."라고 한숨을 내쉴때, 선생님들은 "아싸, 시험기간이다!"라고 학생들 앞에선 차마 내지 못하는 함성을 지른다. 교직원 테니스대회도 하고, 등산을 가기도 하고, 아내와 모처럼 한가한 시내에서 영화를 보기도 한다. 처음 학교에 와서는 그런 호사를 못누렸다. 3년동안 전교생의 노란 답안지를 절구통같은 기계에 넣어 채점하는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이 되면 답안지 돌아가는 소리, 인쇄기가 성적표 찍는 소리, 그리고 내가 틀어놓은 음악 소리로 가득찬 전산실에서 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지금은 다른 일을 맡아하기 때문에, 시험기간엔 나도 "오늘은 무엇을 할까?"하고 놀 궁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화요일엔 혜화동 근처에 학교를 다니는 에메렌과 숙대 다니는 마리안을 혜화동으로 불러내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친구를 만나러 가는 마리안을 숙대까지 데려다 주고 나니 오후 4시쯤이 되었다. 문득 늘 긴 산책을 다니던 길이 눈에 띄었다. 원래는 명동에서 소월길을 따라 남산으로 올라가서 해방촌을 구경한 뒤 후암동을 거쳐 숙대입구로 내려오면 딱이다. 그 날은 반대로 한번 산책을 해보리라 결심하고 가방을 옆으로 둘러 맸다.

 

 늘 가던 길을 반대로 가면 달라 보이는 걸 아는 사람이 많을까? 남산 아래녘 후암동엔 아직도 ’근대화연쇄점’이 있다. 원래 산책길로 가면 맨 마지막에 보는 집인데, 어젠 처음으로 그 집부터 구경했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조국의 근대화’가 당면과제였기 때문에 동네마다 근대화 연쇄점이란 간판을 단 집이 하나씩은 있었는데, 이제는 한쪽 벽이 다 허물어진 이 집말고 다른 곳에서는 ’근대화연쇄점’을 본 일이 없다. 근대화 연쇄점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정말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차도 다닐 수 없는 골목은 혈관처럼 여기저기 이어져 뻗어 있는데, 어떤 골목은 바로 막다른 길이다. 오토바이 한대만 겨우 지날 수 있는 길 사이로 보이는 소박한 집들의 대문과 화분들은 다닥다닥 모여살지 않으면 안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거친 삶을 암시하지만, 나는 그냥 그것이 촘촘히 집을 짓고, 창가마다 화분을 놓은 유럽의 골목과 같다고 상상해 보곤한다. 비참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눈은 현실을 외면하는 나의 나약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낡고 불편한 곳을 일년이 지나면 몇 배씩 값이 뛰는 아파트보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소박한 용기라고 우기고 싶기도하다. "그것은 당신이 해방촌에 살지 않기 때문이지 않소?"라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겸허하게 고개 숙이고 인정할 생각이다. "맞아요. 거기가 아름답다고 우기는 건 제가 거기 안살아서 그런지도 몰라요. 거기 사는 어려움을 몰라서 그런지도 몰라요."

 

 오락실에도 들렸다. 몇 평이 되지 않는 오락실은 산동네 아이들로 가득찼다. 아이들은 아주 진지했다. 오락실 화면으로 아이는 네바다 사막인지 어느 사막의 레이스를 달리고, 결승점에 들어오면 흑인 아가씨가 깃발을 흔들어 준다. 5거리인지 6거리인지 분명하지 않은 해방촌의 입구는 늘 곳곳에 자동차 접촉사고가 난 락카칠 자국이 있다. 차없이 살던 사람들이 모여살던 곳이어서 차가 다니기 좋은 길이란 없다. ’성신피아노’, 여기 살던 희정이의 말을 들어보면 한 때는 여기가 가장 큰 피아노 집이었다는데 이제는 시들어 가는 꽃화분 다섯개가 놓여있다. 아이 하나가 많이 여닫아서 잘 닫히지 않는 하얀 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노인들은 콩이며 더덕같은 걸 한두가지 내놓고 가게사이에 그늘에 노점을 내어 용돈을 버는 듯했다. 유치원 다닐 만한 아이가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차를 제대로 피해 걷지 못하자 할아버지가 아예 등위로 업고 다니신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돌봄이 필요한데, 서로 돌본다. 나중에 아이는 기억할까? 할아버지가 자기를 늘 차들로 부터 지켜주었다는 사실이며, 따뜻하게 할아버지 등에 업혀 다녔던 일들을.

 

 사실 내가 여기를 올 때마다 제일 궁금한 건... 백일상 선생님 댁이 정확히 어디였을까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갔던 목욕탕자리가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다. 16년전 그와 함께 잠시 걸었던 그 골목은 어디일까? 서울대학을 나온 그는 대학원도 다니지 않았고, 어학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과학 가르치는 일을 즐겼다. 시간이 나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아주 멀리 다녀오기도 하고, 또 무엇보다 혼자서 화학실험을 자주 하였다. 하지만 그가 어디 살았었는지 알 길은 없다.

 

 해방촌 성당은 동네만큼 소박하다. 작고 오래된 성당이지만 구석구석 깨끗이 정돈되어있다. 좁은 화장실 타일은 매끄럽고, 세면대도 깨끗하고 수압이 낮지만 물이 나오고 비누도 있다. 마당이 있어서 좋은 성당이다. 레지오 회합을 언제 했는지 성당 옆 어느 방엔 꽃병에 요즘 한철인 연보라색 국화가 소담스럽게 꽂여있다. 나무 제대 앞에 꽃꽂이 대신 노란 국화 화분을 가져다 놓았다. 여러 개의 성상을 놓기에는 좁은 성당, 김대건 신부님 상이 있던 자리는 묵주기도 성월을 맞이하여 성모상을 모셔 두었다. 여기 오면 한 30분정도 기도하는데, 그 날은 아주 오래 기도했다. 피곤했는지 얼마인지도 모르는 긴 시간을 잤기 때문이다. 잠을 깨운 건 머리를 뒤로 잡아 묶고 청바지에 잠바를 입은 두 명의 꼬마 소녀들이었다. 이 여자 아이들 중에 큰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미사 때 복사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자 그럼 초부터 켜봐!"하면서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연습하는 기색이었다. 아이들은 입당부터 연습하면서 인사를 여러 번 하고, 종도 치고, 손을 모으고 제대 밑에 서있기도 하면서 몇번씩 연습을 반복했다. 학교를 마치고 잠깐 학원에 갈 시간, 아님 저녁 먹을 시간 전에 성당에 와서 복사동작을 연습하는 것은 참 예쁜 삶의 봉헌이다.

 

 성당을 나오니, 바로 앞집에 어느 가게에 작은 집수리집을 개점했는지, 아저씨들이 큰 상을 내어 놓고 소주며 삼겹살을 들고 계셨다. 작고 얼굴이 구리 빛 주름으로 잠바를 입은 아저씨들, 바로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이셨다.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도 농한기에는 부여 시내에서 미장이며 벽돌나르는 일을 하셨다니, 작은 아버지 생각도 났다. 거칠게 쓴 ’발전’이란 글씨가 매인 작은 화분 하나가 한켠에 놓여있었다. 지나는 할머니며 행인들에게 ’안에가서 떡좀 잡숫고 가쇼.’하는 아저씨들의 목거친 소리들. ’그냥 먹어도 되유?’하시는 할머니들은 어느새 같이 떡이며 고기를 들고 있었다.

 

 여자 아이 세명이 머리를 모으고 작은 오락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문방구 앞에서 노란 탱탱볼을 놓친 아이의 공을 잡아서 건네 주었더니,’저 아저씨가 줏어주었어. 저 아저씨가’하며 쳐다보고 웃는다. 나도 웃어주었다.

 

 나는 왜 해방촌을 걷는 걸 좋아할까? 신월동 가난한 동네의 길다른 쓰레트 집 출신인 내가 무슨 시간여행이라도 해서 어린시절을 찾아가는걸까? 그래서 이제 나는 여기 속하지 않아 하고 안심하려는 것일까? 그건 아닌 듯 하다. 경제적인 지표로 보면 나는 여전히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성당에서 아이들이 복사 연습을 기도하는 척(?)하는 나를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하고 있을 때 나는 성서를 꺼내 들어서 시편을 읽었다.

 

 "사람 사는 고장으로 가는 길 찾지 못하고

  광야에서 길 잃고 헤매며

  주리고 목마름으로

  기력이 다 빠졌던 자들,

  그들이 그 고통 중에서 울부짖자

  야훼께서 사경에서 건져 주셨다.

  길을 찾아 들어 서게 하시어,

  사람 사는 고장에 이르게 하셨다.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

  인생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들 모두 찬양하여라."

 

  시편 107장

 

 오늘 아침 내가 그린 그림 연필 스케치를 미술선생님께 보여드렸다니, ’소멸하는 점이 분명치 않아. 기본기가 좀 부족하군’ 하시면서 원근법의 기본을 몇가지 가르쳐 주셨다. ’미술실로 와서 그림 배우라니까 왜 안와?’ 늘 술을 드셔서 술냄새가 늘 목소리에 배어있는 미술선생님은 그래도 그림은 감성으로 그리는 것이니 아무렇게나 그려도 된다면서 보여드린 내 연필스케치를 제일 싼 액자를 구해서 표구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림이 늘면, 언젠가는 해방촌의 아름다움을 연필로 그리고 싶다. 꼭 그렇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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