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음

2002. 9. 4. 오후 1:34:11

글자

또 왼쪽 귀가 말썽이다. 이놈의 귀는 아무리 고쳐도 자주 고장난다. 할머니야 늙으셔서 귀가 어두우셨지만, 작은 아버지도 보청기 없이는 고함소리빼곤 듣지 못하셨으니, 집안 내력이라면 집안 내력이다. 중학교 때 친구도 없이 고집스럽게 공부만 하던 때가 있었다. 잘 하지도 못했으면서... 어느 날 선생님 말씀이 안들려서 화가 잔뜩 나서 집에 돌아왔는데 귀에서 진물이 나왔다. 화곡 시장 맞은 편에 있는 화곡 이비인후과에 갔다. 몇 주동안 다니다 보니 간호사들이 네 이름을 외웠다. 두 명의 간호사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늘 활짝 웃고, ’재선이 왔구나.’하면서 아주 싹싹했고, 다른 한 사람은 조용하지만 입가의 창호지로 비치는 햇살같이 얇은 미소를 띄웠다. 처음엔 말도 자주 걸어주고 늘 활짝 열린 나팔꽃 같은 간호사 누나가 좋더니 병이 다 나을 무렵에는 말없이 웃어주는 누나가 더 좋아졌다.

 

나는 말이 많고 경박하다. 그래서 늘 필요한 말만 때맞추어 잘 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이현주 목사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언으로, ’말을 앞세우지 말아라.’고 했다는데, 그는 목사가 되고 작가가 되었다. 말많은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말은 그리 수다스럽게 들리지는 않는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했는데, 인품이 글러먹었다. 신중하지 않은 나의 언어 생활로는 영 틀렸다.

 

어제 대학원 수업때문에 대전에 갔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종례를 서두르다 보니 아이들한테 신경질만냈다. 미안한 마음도 들고, ’시원치 않은 석사 하나 한다고 아이들한테 고함만 지르다니.. 이거 내가 뭘하고 있는 건가?’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대전 역에서 내리자 마자 늘 지나치는 은행동 시장골목과 육교 위에 가판을 늘어놓고 야채며 칡이며 파는 할머니들의 충청도 사투리를 들으니,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부여 첩첩산중에 평생을 산 할머니는 언젠가 대청마루에서 누워있던 나를 깨우더니 ’니가 글이 들었으니, 그런 일도 잘혀야여.’하셨다. 물론 ’그런 일’이란 가족 간의 왕래하며 화목을 도모하란 말씀이셨지만, 한글도 모르시는 무학이셨던 할머니가 네게 ’너는 글이 들었으니’라고 얘기하신 대목이 잘 잊혀지지 않는다. ’글’은 무엇이고 ’말’은 무엇이며 ’배움’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모른다.

 

한 두어 주 전에 화곡본동에서 아침 미사를 봤다. 여전히 시끄럽고, 철없는 아이들은 "선생님 그동안 왜 안나오셨어요?" "이제 6학년 하는거에요?"하고 물어왔다. 내가 대학 초년으로 주일학교 교사한답시고 성당에서 살다시피 했을 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혜나가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어 미사시작 전에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대견스럽고 흐뭇했다. 미사가 시작되고 독서할 때가 되었는데, 전례부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낭독하는 성서 말씀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마이크를 안들고 그냥 성서를 읽는 듯 했다. 선생님들도 허둥지둥 마이크 볼륨을 올리려고 엠프 있는 방으로 들어가고, 전례부 선생님인 혜원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결국 아이의 움직이는 입술이 거의 멎어갈 무렵에서야 조금 소리가 들렸다. "이는 주의 말씀입니다."

 

전례적으로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때 바로 그 음성과 말씀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가르침이 있다. 그래서 독서자들은 봉독을 잘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전례학의 내용을 그 날 아주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아이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지만, 이 성당 안에 저 아이가 읽고 있는 복음의 소리가 정말 들리지 않는 작은 음성이지만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냥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지만, 저 안에 하느님이 현존해 계시다는 생각을 하니 잠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아이의 입술에서 나오는 저 들리지 않는 이야기는 아마 하느님의 고백일거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이나 기도나 사랑은 너무 가난해서 때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고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을 때가 많다.

 

한 숨을 쉬고 또 말없이 자기 길을 가야한다.

 

’그분은 날 사랑하셔’라고 가을 나뭇잎 같이 사삭거리는 입술소리로 속삭이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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