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3일 (녹) 연중 제24주일
집회 36,21-22 참조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집회 36,21-22 참조)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흔히 '교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마태오 복음에서 '형제애'란,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책임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를 사고파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빚의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문제로 뒤바뀐 이 불행한 이야기는 26절부터
급격한 반전을 보여 줍니다.
종이 엎드려 애원하니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약속도 없이 주인은 종의 간절한 청을 기꺼이 들어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빚을 탕감받은 종의 무자비함에서 불행은 다시 불거지는데,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동료'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쉰둘로스'인데,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내던지는 이의 냉혹함은 주인의 자비로움과 대비되어,
보는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저마다 사는 처지가 다르고 능력이 달라도 서로 형제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데 그 본디 가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간다는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돈 몇 푼에 살의마저 느끼는 살벌한 세상에 교회의 형제애는 눈물겹도록 요긴한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매일미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