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2019. 10. 26. 오전 7: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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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자비의 특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자비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를 실천하는 신앙의 행동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하는 선심 쓰듯 자비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이기에 자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그대로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의 몸짓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예수님의 몸짓을 나의 몸짓으로 변화시켜 주시도록 도움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진 말씀에서 우리가 행할 자비에 대한 시선을 주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방금 저는 '예수님'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자비의 뜻을 드러내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때 예수님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 주님'이라고 언급합니다. 모든 앞선 내용에서 주님의 이름은 하느님께 부여되었으나 이제 예수님께 이 이름이 적용됨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같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가엾은 마음을 가지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복음서가 쓰일 당시 예수님께 대한 이러한 표현은 정말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에 놀라지 않는 우리의 신앙의 무덤덤해짐도 반성할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전 말씀인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는 장면에서는(7,1-10) 원로들의 요청과 백인대장의 믿음으로 기적이 행해진 반면에, 이어지는 오늘 말씀에는 아무도 기적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예수님을 뵙고 어떠한 행동도 없음을 말씀은 전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먼저 가여운 상황에 처한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의 죽은 아들을 되살리셨다는 것은 우리가 깊은 마음으로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울고 있는 여인의 슬픔, 누구의 위로와 격려도 받아들일 수 없는 메마른 아픔이 고스란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전달되어 그분의 슬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울지 마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감정이나 관념적인 말투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그 아픔을 아시고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군중들을 "가엾은 마음" 즉, 자비심으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예수님과 과부 그리고 죽음에서 살아난 아들을 보는 군중이 되어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울 수 있는지 목격하게 됩니다. 내 앞에서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를 가엾게 보는 자비심을 넘어, 도움조차 청할 수 없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웃을 '보고 가엾은 마음'의 몸짓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인인 것은 우리 자신이 고통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주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눈물 가득한 여인과 같은 이웃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이웃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실리 없음은 바로 우리의 확신입니다. 아멘. -김동수 야고보노엘 신부(진건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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