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와 '칼레의 시민들'

2007. 4. 24. 오후 5:51:33

글자
 

1.

지난 주 읽었던 구약 ‘느헤미야기’의 2장 2-18절의 구절은, 문득 이십 몇년전 제가 청년 시절에 읽고 마음속 한 구석에 묻어 뒀던 ‘칼레의 시민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2.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자기 조상들이 하느님께 진 큰 죄로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지고 바빌론 땅으로 유배와서 포로살이 한 이후, 자신도 페르시아 임금의 궁전에서 종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하느님의 땅 예루살렘에 관한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됩니다. 그소식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하느님의 성전도 폐허가 됐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크게 슬퍼하고 울면서 페르시아 임금에게 청합니다. 종살이 하는 주제에, 주인인 임금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청하는 것입니다. “저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내시어 그 곳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십시오”. 어느 종이든 주인에게 이런 무례하고 방자한 말을 한다면 목숨이 열이라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3.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초기,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칼레시를 점령했을 때 항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을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선포하며, 그 6명이 자진해서 앞으로 나서라고 요구합니다. 저 죽을 자리에 자청해 나서서 죽겠노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6명안에만 들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때 이 도시의 귀족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라는 사람이 먼저 죽기를 자처하고 나섭니다. 그는 서로 죽기 싫어 제비를 뽑는다든지 하면서 희생자를 지명하는 것은 도시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에는 비록 패했지만 적 앞에 당당하게, 그리고 후손 앞에 떳떳하게 나섬으로써 도시의 정신과 민족의 혼(魂)만큼은 살리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자 그의 결단에 자극 받은 다섯 명의 다른 시민들이 차례로 희생을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4.

느헤미야와 칼레 시민의 정신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사랑, 평화, 겸손, 봉사, 이해 등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법한, 그런 거창한 종교적 덕목이나 이상과 꼭 맞닿아 있는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좋은 덕목과 정신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찌우게 하리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보통의 신자들,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며 그날 그날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어린 양’들에게 그런 커다란 가치들은 사실이지, 그렇게 친화적인 것으로 다가오진 않는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바로 그런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헤미야’이고자 하는, ‘칼레의 시민’이고자 하는 힘이 잠재돼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 힘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종살이 하던 느헤미야와 칼레의 이름없는 시민들의 용기와 헌신으로, 하느님과 칼레시가 그 존엄과 영광을 지킬 수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세상의 지극히 미물인 것이 바로 자기의 본분이요 소명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그것이 아닐런지요.


5.

여기까지 오자, 2백여년전의 천주교 박해로 새남터의 형장에서 숨져간 이름없는 신자들의 일이 다시 생각납니다. 당시 천주교도들을 골라내던 관리들은 땅에 묵주를 던져놓고 이것을 밟고 가면 천주 신자가 아니니 살려준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신자들은 이번만 딱 한번 천주를 부정하고 목숨을 유지한 다음 잘못을 뉘우치고 참된 신앙인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 먹으며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정작 묵주 앞에 이르자, 모두들 자기 마음속의 ‘어떤 힘’에 이끌려 무릅을 꿇고 주님을 경배한 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망나니 앞으로 끌려나가 목이 잘립니다.


6. 오늘 느헤미야와 칼레의 여섯 시민과 그리고 새남터의 순교자들을 묵상하며, 너무나도 익숙한 다음의 한 구절을 새로운 마음으로 깊이 간직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루카 1:26-38)

 



 

댓글 3

  • 2007년 4월 25일 오후 3:02

    감동적인 글이네요

  • 2007년 4월 25일 오후 5:3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주 글 올려 주세요.

  • 2007년 5월 7일 오전 11: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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