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2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요한 18,1ㅡ19,42

2011. 4. 22. 오전 7: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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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2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제1독서 이사야 52,13ㅡ53,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히브리서 4,14-16; 5,7-9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복음 요한 18,1ㅡ19,42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어제 오후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신부님 잘 지내죠? 부탁 좀 할게요. 본당 성모의 밤에 낭송할 성모님께 드리는 글을 써오라는데 감이 안 오네요. 대충 초안만 잡아주면 정말 고맙겠네요. 메일로 다음 주까지…….’

이 문자를 보낸 번호는 제가 잘 모르는 번호였습니다. 즉, 제 휴대전화에 입력되지 않은 새로운 번호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일 텐데, 그런데도 어떻게 저한테 성모님께 드리는 글을 써서 보내달라고 부탁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우습게 보는 것 같아 기분도 좀 안 좋아졌습니다.

사실 자신이 이번에 어린이 강론을 하게 되었는데 도저히 못쓰겠다고, 매일 강론을 쓰는 신부님이 어린이 강론에 맞춰서 써서 보내 줄 수 없냐는 이메일을 가끔 받거든요. 따라서 저는 이렇게 강론 부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성모의 밤에 쓸 글까지 부탁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부에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 저런 부탁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요. 그래서 그 휴대전화의 번호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유심히 보니 끝자리 4자리 숫자가 많이 익숙합니다. 그리고 그 4자리 번호를 확인해보니, 맞습니다. 제가 너무나도 잘 아는 분, 저와 너무나도 친한 분의 휴대전화였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저한테 어떤 부탁도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었는데, 본당 수녀님으로부터 ‘성모의 밤에 성모님께 드리는 글’을 써오라는 말을 듣고 며칠을 고민 중에 저한테 힘들게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냐면서 불쾌하게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제가 처음 보는 번호였을까요? 그분이 휴대전화를 새롭게 구입하면서 번호를 바꾸게 되었는데, 제 휴대전화에 번호를 입력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제가 이 분의 번호를 입력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의 잘못된 판단과 결론을 스스로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국은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다면, 그들이 과연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을까요? 또한 뺨을 치고 침을 뱉으며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는 모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었겠습니까? 몰랐기 때문에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잘못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제대로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판단과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섣부른 판단과 결론은 예수님을 향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나의 이웃을 향해서도 먼저 판단하기 보다는 먼저 알고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사람은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존재다(조이스 마이어).



해무리

어떤 자매님께서 찍으신 답동 성당 위에 선명하게 생긴 해무리.

어제 낮에 성유축성미사가 있었습니다. 성유미사를 마치고 주교좌성당 마당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하늘을 보라고 합니다. 마치 달무리처럼 태양을 주위로 커다란 원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주교님께서 성체를 축성하시는 순간에 해무리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진을 정신없이 찍고, 또 어떤 분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도 많이 했다고 하네요.

신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인터넷을 뒤져보니 해무리라는 것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 해무리가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즉, 권운이 태양이나 달 주위에 끼는 경우에 해무리나 달무리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직접 처음 보다보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제들이 이렇게 많이 모여 있는 곳에 해무리를 보내셔서 우리 교구의 50주년 행사를 미리 축복해주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고, 또 기타 우리 교구에 여러 가지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습니다.

사실 해무리가 끼면 비가 올 징조라고 합니다. 해무리는 온난 전선과 저기압의 전면에 나타나는데, 이때 비 올 확률은 70% 이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 오는 날이 결코 좋은 날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도 이렇지 않을까요?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또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댓글 1

  • 2011년 4월 22일 오후 9:39

    맞습니다. 다가 올 부활도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모두에게 다가오기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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