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대한 좋은 글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당신의 뜻이라면…
- 예수의 기도 -
들어가는 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그들은 나를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 양 가르친다.”(이사 29,13) 이는 예수가 가식에 빠진 바리사이와 율사 위선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마태 15,1-9). 물론 당시에는 이 말씀이 갖는 심각성이 과소평가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가 거짓 예언자로 판결 받아 사형에 처해졌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를 4년 남겨둔 오늘날, 한국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떨까? 혹시라도 예수님이 나를 두고 면전에서 “(너는)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라고 선언하신다면? 아마 만감이 교차하면서 머리칼이 온통 곤두서는 느낌이 들 것이다.
기도란 ‘입술로 공경하는’ 대표적인 종교 행위이다. 그리고 대표적인 종교 행위답게 우리는 많은 종류의 기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모두가 드리는 ‘주의 기도문’에서 개인 기도까지..., 그리고 미사 때 드리는 신부님의 대표 기도에서 지하철 전도사들의 우렁찬 공중 기도까지···. 그렇다면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 수없이 많은 기도 속에 자의든, 타의든 노출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까? 내가 이런 식으로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나무라시지나 않을까? 이런 저런 질문들에 관한 대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역사의 예수가 기도를 두고 직접 하신 말씀을 반드시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기도’에 대한 예수의 전반적인 입장을 알아보고, 이어서 예수 자신이 바친 기도들 중의 하나인 ‘게쎄마니의 기도’를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오늘의 시각에 맞춰 반성을 시도해 볼 것이다.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1) 혼자 하는 기도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 (마태 6,5-6)
유다인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아침·점심·저녁 등, 하루에 세 번 기도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의무는 원칙적으로 회당에서 이루어져야 했으나, 상황에 따라서 임의의 장소에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기도하는 시간은 정확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저 아침·점심·저녁 어간에 기도할 수 있었다: “아침 기도는 한낮이 될 때까지...점심 기도는 저녁이 될 때까지...저녁 기도에도 뚜렷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미슈나』, 베라콧 4,1) 따라서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에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한 길 모퉁이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며(5절), 유다교 문헌 어디에 찾아봐도 이런 관행을 잘못되었다며 문제삼는 구절은 없다고 한다.
그 외에도 회당 예배 때 드리는 기도(‘셔마 이스라엘’, 18조 기도문), 식사 때, 이사할 때, 새 집을 지을 때, 안식일이 끝날 때에 바치는 기도 등이 있었으며, 심지어 음료수를 마실 때 하는 기도도 따로 정해져 있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어, 어떤 이가 나무 열매를 먹을 때면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친다. “나무 열매를 창조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 골무에 담은 것보다 좀 더 많은 양의 포도주를 마실 때는 “포도 열매를 창조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 빵이나 땅의 열매(곡식)를 먹을 때는 커다란 올리브 열매를 먹을 때보다 더 큰 소리로 “땅의 열매를 창조하신, 빵을 만들어 내게 하신 세상의 왕, 주시여! 찬양을 받으실 지어다.”고 찬양해야 한다(『미슈나』, 브라콧 4,1).
예수는 이와 같은 판에 박히고 공식화된 기도 관행에 반대하여 전혀 새로운 규칙을 제시한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혹시라도 남이 볼세라 문마저 걸어 잠그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순간이란 하느님과 기도하는 자만이 가지는 대화의 시간이다. 따라서 ‘하느님’과 ‘나’라는 기본적인 조건 외의 어떤 형식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이로써 (율법에서 허용한) 공개적인 장소에서 드리는 기도의 허점도 지적된 셈인데, 이런 기도에는 자칫 위선으로 흐를 가능성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니, 구태여 동네방네 ‘나 기도한다’고 온통 떠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중에 거리 기도를 일삼는 바리사이가 틀림없이 여럿 있었을 텐데, 아마 부끄러움과 분노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는 기도할 때 언제나 혼자였다고 하며(마르 1,35;6,46;14,35 등등), 이는 자신이 세운 규칙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2) 중언부언 않는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마태 6,7-8)
마태 6장 5-6절에서 형식적인 기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예수는 이어서 또 한가지의 중요한 규칙을 덧붙이는데, 바로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때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다. 그리고 로마는 가히 종교들의 백화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며, 그들 중에서도 특히 제국 내에 강한 영향력을 끼친 것은 갖가지 밀교密敎들이었다. 밀교의 특징들 중 하나는 “사제들이 제의 중에 내내 황홀경에 빠져 시끄러운 의식을 진행시키곤 했다”(G. 란츠콥스키, ꡔ종교사입문ꡕ, 박태식 옮김, 분도 출판사 1997, 55쪽)는 점이다. 그들은 같은 기도를 끝없이 반복했으며 이를 통해 황홀경에 도달하고, 급기야 자신들이 섬기는 존재인 ‘신비’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독자들은 굿을 하는 중에 무당에게 신이 내리는 현상을 염두에 두면 쉽게 그 의식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이런 영향을 받아 이른바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열광주의자’들이 득세를 했으며, 이런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난리법석을 떨었기에 바울로가 경고를 보낸 적이 있었다(1고린 14장).
예수는 그 같은 이방인의 기도 관행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방인들의 기도는 흔히 술에 취해 지껄인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하며(요세푸스, ꡔ유다고사ꡕ, 5,345 참조), 예수의 부활 승천 후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여 영언(靈言, 혹은 方言)을 하게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술에 취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는데(사도 2,13) 모두 ‘중언부언’ 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서도 술자리에 참여해본 분이 있다면 ‘아 그런 친구가 꼭 한 명 씩 있지’라며 동조할 것이다) 장황하고 긴 기도, 했던 말을 또 하고 하는 기도..., 예수가 경계했던 기도 형태이다. 하느님은 ‘구하기도 전에 벌써 아는 분’이기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들을 읽어보면, 아무리 천천히 읽는다고 하여도 체 1 분을 넘는 것이 없다. 물론 전승과정에서 예수가 한 기도의 핵심만 옮겨졌거나, 복음서 작가들의 복음서 편집 원칙에 따라 기도의 길이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저런 점을 십분 고려한다고 해도 예수의 기도가 결코 길지 않았으리라는 점만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참고로 예수가 직접 하신 기도들을 정리해 보면, ‘주의 기도문’(마태 6,9b-13;루가 11,2-4), ‘예수의 감사기도’(마태 11,25-27;루가 10,21-22), ‘게쎄마니의 기도’(마르 14,32-42;마태 26,26-46;루가 22,39-46), ‘십자가상의 탄원기도’(마르 15,34;마태 27,46) 등이 있다. (최혜영, ꡔ하느님 내 입시울을 열어주소서ꡕ, 우리신학연구소 1999 참조)
3) 하느님과 의사 소통 방법으로서의 기도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루가 11,13)
이는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기도 규칙처럼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니나, 그가 몸소 하신 기도들을 예로 살펴보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특징이다. 예수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실 때,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기도하신 다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신다(마르 7,31-37: 치유기적사화). 비단 병을 고칠 때 뿐 아니라 악령을 내쫓을 때도 기도는 필요하며(마르 9,14-29: 구마기적 사화, 특히 29절), 예수가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을 때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일어난다(루가 9,28-36: 변모사화, 특히 28-29절). 그런가 하면, 성령이 내려올 때에도 예수는 기도를 하고 있었으며(루가 3,21-22), 기도로 ‘구하는 이에게 하느님이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다(루가 11,13). 그리고 어린이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실 때도 예수는 기도를 하신다(마태 19,13-15).
이처럼 기도는 하느님과 접촉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자 적절한 기회이다. 예수는 하느님과 대화가 필요한 순간에 언제나 기도를 했으며, 그 때마다 많은 영감을 하느님에게서 부여받아 이를 실천에 옮기신 분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예수가 한 기도는 철저히 이타적利他的인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의 삶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로 이타적이었으니, 기도에 그분의 삶이 투영되었다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게쎄마니의 기도(마르 14,32-42)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날 밤에 드린 ‘게쎄마니의 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점에서 큰 교훈이 되는 기도이다. 먼저 예수는 철저히 혼자서 하느님과 대면한다. 비록 세 명의 제자들과 기도 장소까지 같이 가기는 했으나 정작 기도의 순간에는 따로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신다”(35절). 다음으로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는 당부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한다(34.38.41절). 사탄의 유혹이란 원래 무거워지는 눈꺼풀 사이로 슬며시 끼어 들기 마련이다. 나태해지는 마음가짐과 타성에 젖어 긴장감이 느슨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이 노리기에 안성맞춤인 대상인 것이다(주의 기도문 중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게쎄마니의 기도에서 세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점 역시 주의 기도문에서 발견되는 시각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즉,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36절)라는 예수의 기도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절대 가치를 ‘하느님의 뜻’에서 찾은 예수의 강한 의지를 읽어볼 수 있다.
여기서 게쎄마니 기도의 배경을 잠시 둘러보도록 하자. 예수는 한바탕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고 십자가에서 달려 생을 마감한 분이다. 하지만 꼭 죽음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자신이 선포했던 ‘하느님의 나라’가 제도권 유다 교회에 그토록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면, 그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약간만 수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원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뛰어들어야 한다지 않는가. 아니, 그래도 도저히 자신의 소신을 굽힐 수 없었다면, 우선 급박한 위기의 상황에서 잠시 몸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유다교 최고 회의의 세력권 밖인 시리아 어디쯤이나 요르단강 건너편 데카폴리스 쯤으로 잠시 가 있다가 상황을 보아 재기의 날을 노린다는 식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정계 은퇴를 일단 선언하고 외국에 나가 연구 활동에 전념하다가, 국민의 열화 같은 성원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 정계에 복귀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물론 ‘구국의 일념으로 고뇌에 찬 결단을 내리는 과정’(?)이 먼저 있기는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최후 만찬이 끝난 후 게쎄마니 동산에서 기도할 때까지만 해도 훗날을 기약할 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는 게쎄마니에서 ‘삶이냐 죽음이냐’는 문제를 두고 “영혼이 극도로 근심에 싸여 있었기”(34절) 때문이다. 사실 게쎄마니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예수는 대단히 나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34절). 그러나 예수는 기도를 함으로써 육적인 나약함과 맞서려 했으며, 수 차례에 걸쳐 하느님께 대단히 인간적인 기도를 드렸다. “아빠 아버지, 당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제발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36절) 하지만 예수의 마지막 기도는 “그러나 제 뜻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36절)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의 생명을 맡기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자 마침내 당당하게, “때가 되었다...일어나 가자.”(42절)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기에 이른다. 육체의 나약함을 벗어버리고 이제 예수가 충분히 강해진 것이다. 기도를 통해 얻게 되는 강건함..., 게쎄마니 기도에서 취할 수 있는 네 번째 특징이다.
나오는 말
예수는 기도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입장을 취하신 분이다. 마치 추상秋霜 같았다고 할까.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기도가 형식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올바른 기도의 표본으로 ‘주의 기도문’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분이었다(마태 6,5-13).
예수가 살았던 시절은 ‘형식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종교가 율법에 의해 규격화되어 있었다. 당시의 기층 종교 세력들은 하느님의 구원을 계층적으로 해석하는 데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구원은 율법 규정들을 일점 일획까지 철저히 따져서 지키는 의인들의 몫이지 결코 죄인의 차지가 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율법 준수 유무를 따라 구원을 결정하는 사고방식을 두고 율법지상주의, 혹은 문자만능주의라 하는데, ‘기도’ 역시 이런 테두리 안에서 원칙이 정해지고, 해석되고, 운영되었다(『미슈나』, 베라콧편).
제도권 교회의 갖가지 기도 규칙들에 반대하여 예수는 ‘혼자 하는 기도’와 ‘중언부언 않는 기도’라는 새로운 기도법을 가르쳐 주신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를 예수가 가르쳐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기도 형식이라고 서둘러 판단하는 일은 금물이다. 오히려 예수는 형식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셨던 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그는 율법을 어기는 자는 돌로 쳐죽일 정도로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의 종교 환경에서, 그것도 정통 보수임을 자랑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면전에 대고 이런 대담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예수에게 그런 자신감을 부여했을까? 바로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직접 대화를 나눔으로써(‘하느님과 의사 소통 방법으로서의 기도’), 하느님과 직통하는 분으로서의 대범함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대범함이 넘쳐 두려움마저 망각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게쎄마니의 기도에서 평소와는 달리, 우리는 그분이 몹시 두려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 역시 예수는 기도를 통해 극복해 내고 당당히 죽음과 맞서게 된다. 기도가 가지는 놀라운 힘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실행에서 드러나듯이, 예수는 언행을 일치시킨 분이었다. 예수는 하느님과 대면할 때 가장 진지해지는 방법으로 혼자 기도하였으며,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을 미리 굽어보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따로 이말 저말 덧붙일 필요성를 느끼지 않으셨다. 예수의 기도란 자신의 삶 자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기도란 사전에 약속을 해서 반 모임을 가지거나 구태여 미사에 참여하러 집을 나설 필요가 없이, 그저 어느 장소에서라도 마음만 먹으면 즉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신앙 행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숨이 목젖까지 답답해 오는 공산주의 치하에서도, 어머니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는 길에 한없이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을 때에도,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와 마주하고서도 하느님께 강건한 마음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도는 가장 어려운 신앙 행위이기도 한데, 아무도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과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멋들어진 대표 기도를 하고 와서 아내에게 ‘여보 오늘 내 기도 어땠어?’ 라고 물어본다면, 그리고 미사 때 ‘주의 기도문’을 외우면서도 혹시 성당 밖에 불법 주차한 자기 차에 스티카가 붙으면 어쩌나 하는 근심에 싸여 있다면 이미 그 기도는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생기게 된다. 기도는 남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은 다 속여도 하느님은 도저히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통하는 마음의 진실함. 기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바로 이 점에 관해 우리들의 주의를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