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생활성서사- 사제들,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지다

2004. 10. 9. 오후 12:01:30

글자
사제들,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지다
창립 30돌 맞은 정의구현사제단

교회사를 뛰어넘어 한국 역사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한 획을 그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지난 9월 26일로 창립 30돌을 맞았다. 누구도 맡기를 꺼려하는 험하고 무거운 짐, 시대의 고난과 아픔을 대신 걸머진 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는 사제단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본다.

제2의 성령강림
고려대 한국사학과 조 광 교수는 그의 책 〈한국천주교 200년〉에서 한국 가톨릭교회가 역사적으로 ‘성령강림’이라 할 만한 두 번의 커다란 사건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사건은 조선 말기의 가혹했던 천주교 박해다. 조선 백성과 가톨릭교회의 최초의 만남이었고, 혹독한 시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가 민중 속에 깊게 뿌리 내리는 은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최초의 성령강림 사건 이래 가톨릭교회는 오랜 침체를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1970년대, 한국 교회는 비로소 ‘제2의 성령강림’을 맞게 된다. 바로 사제단의 탄생이다. 조 교수는 박해가 한국 가톨릭교회를 세웠다면,

사제단의 탄생은 교회가 민족과 그 현실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재각성하고 새로운 개혁을 위해 몸부림치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사제단 탄생과 함께 비약적으로 증가한 신자 수가 증명한다. 사제단의 탄생은 비단 교회공동체에만 내려진 은총이 아니었다.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정남 씨는 본지에 연재한 ‘민주화운동 30년, 그 역정’에서 사제단 탄생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수많은 단체들이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연합했다가는 흩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것은 민주화의 과정이 그만큼 길고 험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관여했거나, 우리의 열정을 다 바쳐 만든 것 중에서도 없어진 단체가 많다. 인권회복과 민주화를 위하여, 또 민주화의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결성되어 활동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자기 모습을 가지고 있는 단체는 그렇게 흔치 않다. 더욱이 사제단처럼 민주화의 고비고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스스로 떠맡아오면서, 같은 걸음걸이로 제자리를 지켜온 단체는 매우 드물다.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민주화 30년의 역정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사건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1974년 9월의 사제단의 탄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제단은 1974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의 구속사건을 계기로 태동했다. 1970년대 이전의 가톨릭교회는 사회 현실에 대해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해왔고, 국가권력과의 친화적 관계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면서 지배사회와의 갈등이나 긴장은 되도록 피하는 선택을 해왔다. 그러나 유신정권에 의한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한국 사회의 가혹한 현실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해 9월 26일, 원주에 모인 3백 여 명의 사제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는 공식 명칭 아래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소명, 생존권리, 기본권을 선포하고 일깨우고 수호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오랜 주저함 끝에 민주화투쟁에 나선 사제단의 움직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김지하 구명운동, 3 1절 민주구국선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그리고 6월항쟁…. 시대의 고비고비마다 사람들은 명동성당에 모였고 그들의 시선은 늘 사제단을 향했다.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는 사제들은 가톨릭 신자와 불자, 신을 믿는 사람과 무신론자를 떠나 누구에게나 ‘우리들의 신부님’이었다. 달리 위로 받을 데 없고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 가장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은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수배되어 쫓기는 학생들, 가족이 투옥된 구속자 가족들, 해직된 언론인들이 찾아갈 수 있는 건 명동성당과 사제단밖에 없었다.

사제단의 활동원리 “신부님들이 아니었으면 다음 세상에서 제가 무슨 낯으로 아들을 만났을런지요.” 1987년 사망한 고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74) 씨. 지난 9월 2일 고 김승훈 신부 1주기 추도식에 참석한 그는 사제단과의 인연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김승훈 신부는 사제단 가운데서도 박 씨와 특별히 인연이 깊다. 김 신부는 ’87년 5?8특별미사를 통해 박종철 군 사건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사제단의 성명을 발표한 이다. 당시의 살벌했던 분위기에서는 사건의 진실을 안다고 해도 누구도 쉽게 나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제단의 위험을 무릅쓴 결단이 아니었다면 박종철 군 범인조작 사건은 영원히 은폐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역사적인 6월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박정기 씨에게도 새 삶을 열었다. 지방 공무원으로 아들의 죽음을 조용히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투신하게 된다. 박 씨는 현재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의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한국 사회는 비로소 민주화의 기운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제단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1989년은 사제단 활동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이전의 활동이 정치적 민주화와 인권 중심이었다면, 이 시기 이후 사제단의 키워드는 ‘분단’과 ‘통일’이 된다. 그 분수령의 정점에 문규현 신부의 방북이 자리잡고 있다.

댓글 2

  • 2004년 10월 9일 오후 5:46

    ?????????

  • 2004년 10월 11일 오후 10:51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문 내용을 묵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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