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삶(11/12)

2004. 11. 6. 오후 7:36:01

글자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04-11-12)
독서 : 2요한 4-9 또는 에페 4,1-7. 11-13 복음 : 루가 17,26-37 또는 요한 17,20-26

순간의 삶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바로 그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마침내 홍수에 휩쓸려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롯 시대와 같은 일도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하다가 롯이 소돔을 떠난 바로 그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리자 그들은 모두 멸망하고 말았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날 지붕에 올라가 있던 사람은 집 안에 있는 세간을 꺼내러 내려오지 말라. 밭에 있던 사람도 그와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아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잘 들어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주님,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루가 17,26-­37)
◆‘정수니촌 교우:병인군난에 동리 교우가 잡혀 많이 치명하였으나 성과 본명은 모르노라. 아전의 아들:본래 황주 아전의 아들이요, 또한 곱사등이 아이라. 무진년에 본읍으로 잡혀가 아랫사람과 함께 치명하니라. 아전 아들의 동무:이 사람은 장성한 어른이나 성과 본명은 알지 못하되 이 위 있는 곱사등이와 한가지로 치명하였다 하더라.’
1895년 뮈텔 주교님이 기록한 「치명일기」 중 황해도 황주 편에 있는 치명자들의 기록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뒤져보다 우연히 펼쳐본 낡은 책에서 발견한 이분들의 기록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분들의 삶을 가끔 마음으로 그려본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신앙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붙잡히고 치명했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순교의 순간에 그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칼을 받았을까. 그동안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 지냈던 아름답고도 버거웠던 신고의 지난 삶을 그리며 돌아가셨으리라.
모든 일은 그 한순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까지 매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로 결정된다. 순교는 찰나적인 죽음의 순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순교의 칼날을 받지 아니하였더라도 그분들은 이미 순교의 삶을 살고 계셨으리라. 순교는 다만 하느님을 향한 그 충실한 신앙의 삶을 증언한 것일 뿐이다. 죽음은 순간이지만 바로 그 한순간에 평생토록 살아온 삶의 매순간이 담겨 있다. 우리는 아무도 그 순간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고 맞이한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만이 우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매일매일 부딪치며 살아야 할 오늘의 매순간이 중요한 것임을 순교자들은 일깨워 주고 있다. 주님께 온 정성을 다해 이 순간을 살아가기를 청한다. 오늘 내가 처한 이 순간이야말로 내 전생애를 좌우하는 특별한 순간이며 하느님을 향한 고백의 순간이다.

이정호 신부(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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