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서는 제3장에서 니코데모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세례를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세례로써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니코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3,12). ‘땅의 일’만 아는 니코데모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13)이고 세례는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 곧 하느님의 생명 안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이 세례에 대한 말씀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서 4장입니다. 여기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에도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땅의 일로서 물은 사람이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로서 물은 세례에 사용되는 것으로, 신앙인 안에 샘을 이루고 솟아나는 물, 곧 성령으로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여인은 땅의 일로서의 물밖에는 모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주시오’하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당신이 나에게 물을 청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은 반박합니다. “우물이 이렇게 깊은데다 선생님께서는 두레박도 없으시면서 어디서 물을 떠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입니다.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인 줄을 알았더라면, 그 여인이 예수님에게 하늘의 일로서의 물, 곧 성령을 흐르게 하는 물을 청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물은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믿음입니다(1,33).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여인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과거를 알아맞히자 그는 즉시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안에 어떤 신통력(神通力)을 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예배할 장소에 관해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유대인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물은 사람이 마시는 것이고 세례와 성령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이 여인은 먹고 마시는 일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넘어서 열리는 세계, 곧 세례로써 열리는 하늘의 일인,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모릅니다. 우리 인간은 먹고 마시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땅의 일로써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의 신통력과 사람들이 예배할 장소입니다. 이 점도 우리와 비슷합니다. 우리도 신통력, 곧 초능력을 좋아합니다.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도움을 받아 조상의 묘 자리를 선택하여 자손의 부귀영화를 꾀하기도 합니다. 종교를 빙자하여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기도해야 영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도 생각합니다.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에를 비롯해서 국내에도 그와 비슷한 장소들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황당(城隍堂)이나 산에 가서 빌어서 복을 얻겠다고 생각하던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한 그리스도 신앙은 초능력을 탐하거나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땅의 일을 더 많이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일은 성령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베풉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치는 그만큼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얻어내어서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단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베품이 하늘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재물도 명예도 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은 땅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베푸심을 실천하다가 당신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영과 진리에 대해서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 “그분이 오시면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초기 교회 신앙인들의 믿음 안에 성령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예수님 안에 있었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십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성령은 신통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땅의 일을 발생시키는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실천을 상기시키고 같은 실천을 하게 합니다. 하늘의 일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의 참다운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보였던 베푸심이 하느님의 일이고 신앙인이 배워 익혀야 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바로 그 진리를 발생시키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염원과 욕심은 땅의 일입니다. 그런 것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하느님의 일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하늘의 일은 이 세상과 사람을 외면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여 살면서 하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웃과 함께 사는 우리 삶의 현실 안에 하느님의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을 위해 베풀면서, 비로소 하느님이 베푸심이라는 사실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참다운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일입니다. 참다운 예배가 있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보다 더 잘 살겠다, 더 잘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염원이고 욕심입니다. 이웃과 나누는 마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이웃과 나누는 마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2005. 2. 27. 오전 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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