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 우리는 예수님과 한 여인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전해 듣는다. 겉으로 보면 그저 물이 귀한 지방에서 피곤을 느끼던 한 여행자가 물 한 모금 마시려다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 신변잡기를 늘어놓은 정도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 그것은 문학적, 신학적으로 생생한 의도와 메시지를 지닌 복음을 다루고 있다.
대화는 갈증을 느끼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당대의 사회적인 벽들을 넘어서, 즉 ‘여인’에게 물을 청하고, 유다인으로서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신다. 우선 여인은 지치고 목 말라 물을 청하는 유대인 남자 예수님을 압도하는 처지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물을 마시지 않는 데서 예수님의 의도가 다른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물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여인으로 지목된다. 무릇 대화란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어도 이해와 동의의 차원에까지 인도하는 통교의 매체이다. 실제로 복음에서는 우선 실재(實在)를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서로 다른 언어 차원에서 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를 종교적, 상징적인 차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연과학적, 사실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녀는 물에서 다만 생리적 갈증을 풀기위한 수단을 볼 뿐 더는 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오해에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구원에 대한 깊고 진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갈증의 발원을 알게되면 이제 그 해결은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여인은 청하고, 예수께서는 생수를 주는 자로 역할이 바뀌게 된다.
그녀는 무엇을 목말라하고 있는가? 그녀는 텅 빈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즉 모시고 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신주 모시듯이 살아왔다. 비어있는 물동이는 여인의 생활이, 마음이 텅 비어있음을 상징한다. 그녀의 인생이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에 다 탕진되어 왔다. 여인은 5명의 남편과 살았다. 그리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진짜 남편은 아니라고 하였다. 사랑에 대한 욕구 역시 끝이 없어서 그녀는 어떤 자에게서도 마음의 평온을 찾지 못한다. 우리 역시 세상에서 어지럽게 방황하고 엉뚱한 방식으로 갈증을 해소하곤 한다. 즉 쉽게 다른 방법으로, 옳지 않게 살아 가곤 한다. 때로는 당장 급한 마음에 가까이에 있는 물을 마시지만 그것은 오염된 물처럼 탈을 일으키거나 소금물처럼 갈증을 보탤 뿐이다. 충동과 욕구를 따라 겉으로 사는 경우 삶은 끊임없이 공허한 순환에 빠진다. 그런 사람은 날마다 물을 긷기 위해 항상 똑같은 우물에 가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동경하며 산다. 우리 인생에는 생수나 싱싱한 물이 아니고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다. 정작 문제는 내면적인 것,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증이다. 그것을 어떻게 해갈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야말로 본연의 종교적 차원에 속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 없는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순환 안에서 맴돌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에너지를 탕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제인 것이다. 하느님 없이는 사랑마저도 일종의 끝도 없는 불행의 사슬에 묶이고 만다. 인간은 절대자에게 내적으로 닻을 내리지 않는 한, 평안과 확신에 이를 수 없다.
대화가 깊어짐에 따라 여인도 점점 예수님의 진면모에 내적으로 접근해 간다. 처음에는 예수님에게서 목마르고 지친 유다인(요한 4,9)을 보았지만 곧 야곱보다 훌륭한(요한 4,12) 사람, 예언자(요한 4,19), 메시아(요한 4,26), 마침내는 구세주(요한 4,42)임을 전하게 된다. 예수님과의 대화로 인해 그녀는 물질적 갈증을 해결하려던 물동이, 전에는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을 내버려 두고 새사람이 되어 영적인 여행을 떠나기에 이른다. * 수원가톨릭대학교 배영호(베드로) 신부
생리적 갈증과 신앙적 해갈
2005. 2. 27. 오전 9: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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