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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에 내재하시는 하느님,
마치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피조물을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도약은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분에 대한
무지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를 요구합니다.
하느님은 초월자로서 인간에게는 '절대 신비'로
존재하시며 영원히 그렇게 존재하실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즉 성서가 이야기하는 대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을 뵙게 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친히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어 알게 해주시기를 원하셨고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에게 지상생활이 주어졌고,
연옥이 주어졌고 천국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시간 속에서
그리고 영원히 자신을 열어 보이십니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이 사랑 넘치는 증여는
우리가 그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인식 안에서도,
우리가 그분을 차지할 수 있는
사랑 안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의 신비 가운데 뭔가가 항상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그분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것으로,
또 그분의 점진적인 계시들을 섭취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그분에 대한 무지의 바다에 잠겨 그분의
소유가 됨을 즐기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같은 인식의 길, 이 같은 계시의 시간은 이 지상에서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창조의 상징물과 부르심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성서의 구절들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통해서,
그 다음에는 각 사람과 온 세상 창조의 단일성에 대한
실존의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관상과
초자연적 생활의 변모적 일치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모든 것이 믿음의 주도하에 이루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은 하느님의 이러한
점진적 계시에 대한 확신이요 보호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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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를로 까레또의 매일 묵상 중에서
♬ Canto Gregoriano - Kyrie XI,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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