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르디니'와 함께하는 '예비기도학교'/ 김영국 옮김..

2006. 7. 4. 오전 12:51:55

글자

 

 

'과르디니'와 함께하는 '예비기도학교'  중에서..

 

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 영 국 옮김

 

 

 

1. 기도

 

'신앙'에 의하면, 우리의' 첫 번째 묵은 삶' '하느님에 의해 두 번째' 삶으로 깨어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일에 대해서 매우 불안정하고 모순된 태도를 취합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하느님이 필요함을 압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그분을 찾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상관 관계를 외면하고, 하느님을 피하거나 그분을 거역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이러한 모순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기도의 성스런 봉사를 인정하고 실행하면 진리를 느끼고 편안함을 얻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입니다.. 기도의 첫걸음은 '집중'이고, 둘째 걸음은 하느님 실재의 현재화와 자신이 피조물임을 '확인'하고 그에 맞게 '처신'하는 일입니다. 셋째 걸음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찾는 일' 입니다..

집중을 제대로 하면 차츰 이 진리를 내적으로 깨닫게 되며, 사람이 "하느님 앞에"- 오로지 하느님 앞에만 참으로 그분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배운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나'라고 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느님은 나를 부르시고 당신과 단둘이만 이룰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싶어하십니다. 기도는 바로 이 사랑의 신비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방 한구석에 십자가를 걸고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으며, 혹은 벽 한곳에 성화를 걸고 경외심을 갖고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성화는 단순히 기억이나 현재화를 위해서만 있지 않고 더 큰 의미를 갖습니다. 성화가 그리스도 자신이나 주님의 어머니 혹은 구세사에 등장하는 인물 자신은 아니나, 그림이나 암시 이상의 그 무엇입니다. 이 무엇이 집에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 권고하고 경고하고 질서를 잡아 주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공동의 기도를 바칠 수 있고, 꽃으로 장식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무릎을 꿇는 것' 입니다. 이 자세는 존재요 주님이신 분께 드리는 경건함을 표현하고,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준비시킵니다. 반쯤 기댈 것이 아니라 제대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이것은 편한 자세가 아니고 수련 자세이며 몇 분간은 계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과 경건함과 순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기 제가 있습니다!'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거룩한 곳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이 성스런 장소는 외적으로 가장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십자성호는 신앙, 경배, 그리고 어떤 내적 행위의 표현입니다. 기도란 여러 형태의 공허함이 있으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사람은 죄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만은 아님을 압니다. 이는 부도덕뿐 아니라 거룩하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분의 가치를 지각할 수 없어도 신앙을 가지고 그분께 손을 뻗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그분과 친교를 이루고 그분의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느님의 진리에 관한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완료했을 때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토마스, 나에 대해서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무얼 해주기를 바라느냐?" 이에 대해 토마스는 "주님, 당신 자신을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성녀 데레사는 더욱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합니다." 인간이 갈구하는 가장 깊은 근원, 가장 높은 정점,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개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느님을 원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본질을 "하느님을 담을 수 있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기도'는 그저 '사랑'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이란 살아 있는 인격적 존재를 소유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체험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또 다른 하느님의 실재의 특징은 하느님의 크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물들은 하느님이 정해 주신 그 부분만을 안고 존재하지만, 그분은 하나이요 전부인 분이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일을 도와드릴 수 없고, 모든 것을 그분 혼자 하십니다. 그분은 세상보다 더 크실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크신 분, 크신 분 자체이십니다.

 

반면 세상은 그분을 통해서 그분 앞에서만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그저 최고의 실재이실 뿐 아니라 가장 선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진리"란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충만하고 순수하게 개방되어 있는 의미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하느님이십니다. "정의" "순수" "질서"란 말들은 우리가 그분을 암시하는 방식들입니다.

 

"당신은 하느님, 저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영원히 참으로 존재하시는 분, 저는 당신을 통해 당신 앞에서 존재합니다. 당신은 온갖 힘으로 채워진 본질, 충만한 가치, 지고한 의미를 가지고 계시며,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시고 당신만으로도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의 현 존재의 의미는 당신을 통해서만 제게 주어집니다. 저는 당신의 빛으로 살아가고, 제 현존재의 기준들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찬미를 수련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을 넓고 아름답게 합니다. 푹 쉬고 일어난 아참에 테데움이나 시편 148장을 기도한다면 그 하루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아침기도가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겠습니까? 성서 전체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계시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의 전 생애가 이를 선포합니다. 이것은 참된 계시입니다. 세상이나 인간 존재로부터는 결코 알 수 없는 무엇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려지는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이 당신의 피조물을 호의를 갖고 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육화를 통해 확인되는 그런 진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이 사랑에 바치셨고, 일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사랑은 운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2. 주님의 기도

루가복음 11장에서 스승은 청원기도만으로 되어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는 인간의 모든 삶을 담고 있는데, 이 삶은 하느님께 달려 있고 그분으로부터 얻게 된다고 말해 줍니다.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산상설교라 부르는 가르침들을 통해 설명됩니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 예를 들어 방탕한 아들의 비유를 통해 조명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살아 있는 길이 됩니다. 그러면 그분의 얼굴이 우리를 비추고,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청원기도란 단순히 도움을 얻기 위한 외침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은 하느님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즉 사람은 자신의 본질과 존재, 삶과 의미, 힘과 자유를 하느님의 창조적인 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활동하심에 의존해 생활하고 행동하므로 언제나 청원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숨쉬기와도 같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청원기도에서 다른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들을 잘 알고, 어느 누구보다도 더 순수하고 힘있게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고 축복할 수 있는 힘을 갖고 계십니다.

 

기도 중에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사랑으로 그들의 특별한 어려움, 아픔, 갈망을 감지하고 이를 하느님 앞에 내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하느님과 함께 걱정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하느님과의 연대 안에 보호받고 있음을 아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답답하게 하거나 괴롭히지 못하게 됩니다. 설령 이 모든 것이 나중에 반복될지언정, 짧은 기도 시간 동안이나마 우리의 정서는 심호흡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의미 있고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이 세상을 인정하십니다. 그분은 차분히 진행되는 세상의 일들을 존중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물 안에, 사물 뒤에, 사물 위에, 사물 저 편에 있는 당신의 현실을 알아볼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을 신뢰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볼 수 있습니다.

 

청원기도는 인간이 믿고자 하는 마음의 준비와 순종의 자세를 가지고 항상 반복해서 하느님과 연관을 맺고자 하는 움직임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사물들이 본래적인 현실로 여겨지고 세상의 일들이 위력적으로 보이며, 하느님은 비현실적이고 무력해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원 무궁하신 하느님의 실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 앞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만 살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이 청원기도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신 안으로 움츠리는 불필요한 자존심, 혹은 창피한 감정도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청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존심이란 일종의 경직이며,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이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진리이고 동시에 겸손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이를 배워야 합니다.

 

청원기도란 거룩한 활이 우리에게 건너오기를 바라는 끊임없는 외침이며, 감사기도는 끊임없이 건너오시는 하느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감사기도를 통해 우리는 "오 하느님 제가 당신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당신의 빛 안에서 인식하고 당신의 힘으로 활동하고 당신의 사랑으로 거룩해짐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느님 안에도 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만 그리고 혼자서 그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위격 존재는 다릅니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신적인 것이 나타나는지, 어떻게 그분이 "하느님"을 부르시고 상대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분에게는 오직 한 분,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 위에 주님이신 분, 살아 계시고 거룩하신 하느님만이 계심을 감지하게 됩니다..

 

사람은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와 달리 자신의 고유한 삶 안에서 이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합니다.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 즉 부보, 형제자매, 남편 혹은 부인, 자녀, 친구, 직장 동료들에 의존합니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은 '아버지'이시며, 이 단어 안에 지상의 부성과 모성이 완전하게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아들과 딸, 생명의 상속자를 의미하는 하느님은 아들이신 탄생의 신비가 실행됩니다.

 

아들로서의 존재의 완전한 자유가 실현되면서도 아들의 자율성이 하느님의 일체성을 파괴하지 않는 것은 하나의 거룩한 힘을 통해 가능한데, 이것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어떤 분, 즉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하시는 사랑이십니다. 성령은 '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주실 성령께서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식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모습과 복음이 오해와 왜곡 그리고 적대감에 휘말려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가는 길을 찾도록 우리의 마음과 감각을 확고히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고 유일한 분이시며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바오로의 말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식"을 주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만나는 것, 그분의 본질과 음조, 그분의 목소리, 그분의 내적인 뜻을 감지하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오셨고 사랑으로 우리를 향하고 계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게 하는 것, 우리가 이를 따르고 이에 맞춰 살 수 있는 것, 이 모두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을 감추십니다. 그분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말슴하시는 듯합니다. 그분은 겸손하신 분, 숨어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아들의 얼굴을 확신을 가지고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언젠가 존재했고, 자신의 행위와 업적과 함께 남겨진 흔적을 통해 알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역사의 한 인물이 아니라,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항상 계시고 영원히 머무르십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는 신비에 대해서 거듭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내재는 믿은과 세례를 통해 그 기초가 마련됩니다. 이것은 그러나 성체성사를 통해 특별히 견고해지고 심화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는 항상 새로이 우리 삶의 양식이 되어 주십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몸을 먹고 그분의 거룩하신 피를 마심으로써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뭅니다"(요한6,56)라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실현됩니다.

 

마음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언젠가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신앙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사색해 왔는데, 불현듯 하느님 자신이 다가와 계심을 알게 됩니다.

 

기도자가 특별히 신심이 깊다든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기도자를 사로잡았다든가, 기도자의 마음이 하느님께 대한 강한 사랑을 느낀다든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무엇이 전혀 새롭고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체험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성장하게 될 하나의 씨눈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섭리에 대해 듣고, 과감히 투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섭리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일과 하느님의 섭리가 모순되어 보일 수 있고, 섭리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섭리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이해하고, 내적으로 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기도에 대해서 다룰 때에, 이 기도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섭리에 대한 복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섭리에 대해 다루는 예수의 말슴들, 앞에서 언급했던 산상설교의 대목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 나오는 가르침과 비유 말씀들이 그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기도자는 세계와 역사를 섭리의 맥락으로부터 이해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인간의 눈은 우유부단, 게으름, 소심함, 이기심 때문에 감겨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하느님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그 깊은 내면으로부터만 열릴 수 있습니다. "아직 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는 것 역시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께로 향해 진행되는 삶의 지속적인 요소임을 깨닫게 된 사람은 기도를 삶 전체로 확장시키고자 합니다. 삶 자체가 기도가 되며, 이것은 매우 깊은 체험들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제9권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엄청난 치통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기도를 하자 그 고통이 사라졌다고 전합니다. "어떠한 고통이 어떻게 가셨는지 내 주 천주시여, 정말 나는 놀랐음을 여쭈어 드립니다. 철난 때로부터 그런 일이라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시에 나의 가장 안에 당신의 뜻을 느끼게 되어 나는 믿음 속에서 즐거워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찬미하였사옵니다."

 

고통이란 언제고 있을 수 있고, 고통이 사라진 이유도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안에서 그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신비, 섭리를 체험합니다. 일상적인 일들이 어는 한순간 "눈짓"과 "표지"가 되고 체험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분명해집니다."

 

투르의 마르티노, 아우구스티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시에나의 카타리나, 튀링겐의 엘리사벳, 아빌라의 데레사 같은 분들은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삶이 내포하고 있는 필연성과 불완전성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인간들의 사랑이 매우 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뼈빠지게 일하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피를 흘립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고,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며, 모든 영광은 그분의 것입니다. 미사의 [대영광송]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고, 홀로 높으시도다"라고 노래합니다.

 

2. 성모님

예수의 어머니시고, 당신의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요한과 함께 지냈던 성모님을 그리스도인들은 신뢰했으며, 마리아는 성인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할 뿐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의 말처럼 그 안에 말씀(Logos)이 들어가 자리잡은 인간 예수의 어머니이실 뿐 아니라, 신인이며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는 "슬퍼하는 자의 위로자"며 "그리스도인의 도움"이고 "착한 의견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사람은 거듭 그녀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그녀 자신의 힘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나 성인들은 하느님처럼 자신들의 의지와 능력으로 도움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하느님의 뜻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머물고, 숨쉬고, 고요를 찾으며, 위로와 힘을 얻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다시 삶을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묵주기도는 머물러 휴식을 취하게 하며 그분과 가까이 있게 합니다. 동시에 그 안에서 마리아라고 하는 분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묵주의 기도에서 우리가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삶인데, 이 생애는 곧 그녀의 고유한 삶의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세상을 극복해 낸 승리"(1요한 5,4)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인간과 사물, 사건 그리고 외부적 상황들을 의미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온갖 긴장, 나약함 그리고 위기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3. 개인기도

개인기도란 한 사람과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자는 식구, 친구, 역경에 처한 사람 등 다른 사람들을 이 대화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기도자가 사심을 버릴수록 그의 염려와 기도의 영역은 더욱 넓어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기도자는 하느님과 홀로 있습니다.

 

 

4. 전례기도

개인기도는 하느님과 기도자 자신의 관계인 반면에, 전례는 전체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전례에서는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합계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 즉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개인이 공동체를 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전체로서 품에 안으시는 하느님의 창조적 의지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이 공동체를 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전체로서 품에 안으시는 하느님의 창조적 의지로부터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창립되었고 성령 강림의 날에 태어났고, 사람들과 시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존립합니다.

 

전례 안에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 자유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교회의 의지에 속합니다. 이 의지를 통해서 성령께서 지배하시며, 이 자유는 세상이라는 공간과 수백 년의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커다란 움직임들 안에서 효력을 드러냅니다.

 

전례적 행위와 기도는 따라서 개인의 기도보다 더 엄격한 의미에서 "봉사"(Dienst)입니다. 거룩한 전례 행위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오래된 전승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도문들은 교회에 의해 검토된 것들이고 그래서 전례서 안에 있는 대로 읽어야 합니다.

 

전례를 함께 거행하는 신자는 솔직하게 자신의 개인 소원들로부터 자유로워질수록 더욱 순수하고 올바르게 참여하게 됩니다.

 

 

 



 

댓글 3

  • 2006년 7월 4일 오후 2:07

    잠도 없나 봐유~~^^ 이렇게 긴 글을 올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늘 궁금~ 부러버라^^

  • 2006년 7월 4일 오후 4:29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책을 다 옮겨 놓으신 건가요...숨 차서 다음에 들어와서 더 읽을게요..아무튼 학우들을 위해 이렇게 긴 글을 써주신 예쁜 아네스님 감사합니다.

  • 2006년 7월 4일 오후 8:46

    쪼매 길죠? 담날 피곤해서 일에 지장을 주기도했죠, zzz 그래도 꼭 거룩하게 사실려면 참고 꼬옥 읽어보세요. ...

행동이 뒤따를 때 말의 효과가 있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2]06.07.06조회 65은 총[2]06.07.04조회 67'과르디니'와 함께하는 '예비기도학교'/ 김영국 옮김..[3]06.07.04조회 57수녀님 투병 수기^*^[5]06.07.02조회 73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7]06.06.30조회 81성 글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6]06.06.28조회 69고통스러울 때까지 사랑하시오[2]06.06.23조회 70하느님은 누구이신가?[3]06.06.17조회 90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동영상)[1]06.06.08조회 70유일하고 참된 선이신 하느님과의 일치 (성 암브로시오 주교)06.06.02조회 53영혼의 미각을 통하여 영의 분별력을 얻게 됩니다 (포티케의 디아도쿠스 주교)06.05.28조회 62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영화 "나자렛 예수"06.05.24조회 68주께서 물으실때[3]06.05.20조회 91그리스도 안의 부활의 첫 열매들 (성 이레네오)06.05.16조회 49주님께 대한 참된 두려움 (성 힐라리오)06.05.12조회 52모든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있었다 (위힐라리오)06.05.07조회 51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06.05.05조회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