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이 눈을 번쩍 떴어요.

2007. 3. 1. 오후 11:32:01

글자

우리 집엔 골동품(?)이 많다.
골동품이라면 오래 묵어 값이 나가는 그런 물건들이겠지만
우리 집의 골동품은 차원이 좀 다르다.


오랜 세월 부대끼다가 헉헉 거리는 전자제품들
이제 다니기 힘들다고 달릴 때마다 꺽꺽거리는 차 기타등등

 

고장나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바꾸지 않는다는 울 서방님의 지론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도 LG시대의 것도 아닌 금성제품들이 터억 버티고 있다.

거실의 TV는 이제 늙어서 켜면 바로 소리도 못 내고 한 참을 뜸을 들여야 소리를 낸지 수 개월이 되었다.
화면 비율도 맞지 않아 글씨는 잘리고 흐리멍텅한 컬러에 소리는 또 왜 그리 지직거리는지...
그래도 절대로 바꾸지 않는 울 서방님은 검소한 걸까 지지리 궁상인 걸까?
 우리 가족들은 저 눔의 TV가 언제나 확 고장이 나나 모두들 목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그 TV가 드디어 돌아가셨다.

 

며칠 전 아침
거실 TV를 분명 켜 두었는데 갑자기 소리가 안나 '누가 껐나?'
하고 다시 켜 보았더니 이젠 완전히 나갔다.
방에서 출근 준비를 하느라 옷을 입고 있는 울 서방님을 향해
"드디어 그 분이 돌아가셨어" 하니까
울 서방님, 으아한 표정으로 "누가?" 그런다.
"누구긴 누구야, 울 TV지"
"허어~~"
그 한 마디 남기고 출근했다.
저 냥반이 언제쯤이나 TV를 살래나 내심 조바심이 났지만 내가 사자고 조르면 또 반대하겠다 싶어 입 꾹 다물고
에이 이 참에 책이나 읽어야쥐.. 남편 앞에서 내숭 떨어가면서 눈치만 살폈다.

 

그런데 토욜에 갑자기 "하이마트에나 함 가 볼까?"한다.
헉! 이게 웬 일?
난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래"
얼른 웃 갈아 입고 잽싸게 앞장서 갔다.
TV매장엔 비까번쩍한 TV들이 화면도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우와~~. 좋다"
혀에 기름칠을 하고 서방님 귓전에다 대고 우와 좋다를 연발했다.
화면도 선명한 LCD 앞에서 이게 좋다를 남발해 댔더니 울 남편도 은근히 맘에 들어하는 듯 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우와 좋다를 계속 연발했다.
이거 할부 되는지 묻는다.
LG카드는 4개월 무이자 할부란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얼른 "나한테 LG카드 있어"
쉴 틈도 주지 않고 카드를 내밀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의 TV가 세대교체를 했다.


매장을 나오면서 하는 말
"하두 니가 좋다 좋다해싸서 샀다. 그냥 나오면 니 또 꼬라지 피울까봐서. 내가 그 꼴을 또 어찌 보냐"이런다.
힛,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리요. 샀으면 되었지.ㅋㅋㅋ

 

아무런 예고가 없이 들여온 TV에
저녁 퇴근해 온 아이들의 반응은
울 아들넘 " 와 와 와, 왜 이런 사고를 쳤어? 우리 집이 이래도 되는거야? ㅇㅎㅎㅎㅎ" 입을 다물지 못한다.

두 번째로 둘어온 우리 큰 딸 "어머머, 이게 먼 일이래. 엄마 어쩌자고 이런 사고를 쳤어?"
우리 둘째 딸 "아무도 없었으면 우리 집 아닌 줄 알고 나갈뻔 했어, 이런 사고 쳐도 되는 거야?" 등등
아이들의 눈이 둥그래져서 난리다.


그런 아이들에게 난 또 점잖게
"으음, 그 분이 가시고 이 분이 오셨단다. ㅍㅎㅎㅎ"
울 서방님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우리 식구들 정신없이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집에선 이렇게 쉽게 물건이 들어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날 몇 일을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참말로 밥 같으면 죽이 되도록 뜸을 들여야 겨우 하나 사들이는 터인지라.ㅋㅋㅋ.


꼬진 TV 보다가 거실 벽 가득 차지하고 있는 색상도 선명한 것으로다 보니 심봉사가 눈 떴을 때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눈이 화안해 지면서 정말로 장님 눈 뜬 듯 하다.

 

울 서방님이 닭띠다. 그래서 애칭이 장닭이다.
그러나 화가나서 씩씩거릴 땐 쌈닭이요,
정말로 미울 때는 달구새끼라고 한다(속으로만ㅋㅋ)
그런데 이렇게 이뿐 짓 할 땐?
이쯤 되면 봉황이라고 해 줘 볼까나? ㅎㅎ

AC~, 남들은 진즉에 보고있는 TV 하나에 울 가족은 왜 이렇게 호들갑인거야?


오늘도 난 아직도 후줄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골동품들을 향해 , "이것들아. 더이상 이승에 대한 미련일랑 접고 어서어서 돌아가시게나...ㅍㅎㅎㅎㅎ"

댓글 2

  • 2007년 3월 6일 오후 8:08

    언제나 웃음 가득찬 행복한 가정이 부럽네요.지휘자님 파이팅!♡

  • 2007년 3월 6일 오후 11:06

    울 신랑이랑 넘 재미 있게 읽었네요. 저희 신랑이 작가 하셔두 되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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