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체험
나가사키의 추억
2월 6일, 오늘은 일본의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새벽미사에 참례하면서 저에게는 2010년 5월에 집사람과 함께 닷새 일정으로 나가사키 성지순례를 하였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나가사키 성지순례 여행은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은 기억과 감동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나가사키는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복음을 전한 이래 일본의 천주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으며 1945년에는 원자탄 피폭의 비운을 당했던 도시입니다. 현재 일본의 교세는 미약하여 신자수는 인구의 0.3%에 해당하는 45만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순교 역사는 조선시대의 100년 순교역사에 비하여 그 처절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에 일본 오사카 인근에서 태어나 예수회 소속의 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25명의 동료 순교자와 함께 붙잡혀 1597년 2월 나가사키의 니사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 처형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하였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잘 들으시오. 나는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이 이유 때문에 죽으며, 죽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은 하느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커다란 은혜입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단언하며 주저하지 않고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는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증오도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제 바오로 미키는 순교하기 전에 25명의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1596년 12월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900km에 이르는 순교의 길, 생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12세 소년에서부터 60이 넘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 멀고 먼 길을 추위와 허기를 견디면서 동상에 걸려 만신창이가 된 다리로 걸었습니다. 12세의 루도비코는 “신앙을 버리면 살려주마”라는 말에 “이 세상의 짧은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바꿀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미키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25인은 1862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또한 니시자카의 순교기념관에는 한 여인이 세 아이와 함께 순교하는 장면이 그린 그림이 있었습니다. 테끌라 하시모토라는 이 여인은1619년 교토대순교 때 세 자녀와 함께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한명의 자녀를 품에 안고 있고 두명의 자녀는 어머니를 얼싸 안고 있었으며 불길이 이들에게 닥아오자 아이들은 뜨거움으로 몸부림치며 “엄마 뜨거워요” 하자 이 여인은 “이제 조금 있으면 하늘나라가 보일 것이다”하며 비장한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니시자카 순교 기념관에 비치된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 했습니다.
또 이태리에서 카밀로 신부가 일본에 입국할 때 이를 도왔던 사카모토라는 신자는 스스로 배의 노를 저어 처형장인 나카에노시마라는 섬으로 가면서 “가세, 가세, 천국으로 가세”라는 노래를 부른 후 섬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묵었던 집주인의 아들 키무라 세바스찬은 일본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후 사목활동을 하다가 스즈타 옥에 갇힌 바 되었습니다. 그곳은 다다미 10조 정도의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3년간 36명이 갇혀 지내는 지옥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살갗이 서로 부딪혀 짓무르고 그안에서 대소변을 해결해야 하는 인간극한의 상황에서 신부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을 잊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키무라 신부는 후일 니시자카에서 화형당하여 순교하고 복자의 품에 올랐습니다. 일본에는 42명의 성인과 393명의 복자가 있으며 수많은 순교자가 있습니다. 현재 그 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2만명이 믿음으로 인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성지순례에서 잊지 못할 감동은 나가사키의 성자로 불리웠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생활했던 여기당(如己堂)이라는 가옥터와 나가이 박사 기념관에서 그분의 손자를 만났던 사실입니다. 여기당은 “남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如己愛人)”란 박사의 뜻에 따라 지어진 이름입니다.
나가이 박사의 기념관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투하되던 순간 묵주기도를 하고있던 박사의 부인 미도리 여사가 들고 있던 묵주알이 뜨거운 열에 엉겨붙어 있는 것이 전시되어 있어 제 마음을 찡하게 했습니다. 나가이 박사의 책 “묵주알”에는 부인의 죽음에 맞닥뜨렸던 나가이 박사의 슬픔과 이를 이겨내게 하였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가이 박사의 사랑과 희생의 일생은 일본에서 25년 이상 생활하였던 호주출신의 신부, 폴 글린이 쓴 “나가사키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책의 역자인 김승희 강원대 영문학 교수는 번역후기에서 책을 번역하면서 여러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또 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에서 한 폴란드 병사를 대신하여 아사방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막시밀리안 콜베 성인이 1931년부터 6년간 사목을 하시던 수도원과 성인이 만든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그곳에서 만났던 것도 참으로 큰 감동이었습니다.
한없이 감동적인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내 마음속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속에 나오는 기치지로라는 나약한 한 인간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관헌들의 협박에 못이겨 로드리게스 신부의 거처를 알리고 양심의 가책으로 끝없이 고뇌하였습니다. 그는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왜 하느님은 순교자들에게는 강한 믿음을 주셨고 왜 저는 이렇게 나약하게 창조하셨습니까?”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나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마저도사랑하신다는 것이 작가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가지 희망을 얻었습니다. 비록 연약하고 보잘 것없는 믿음일지언정, 순교성인 앞에서 낯을 들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신앙일지언정 하느님께서 여전히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가 2년 여전 나가사키의 성지순례에서 얻은 가장 값진 보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김원율 안드레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