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2013. 1. 27. 오후 11:36:53

글자

 
  김원율  l  2013/1/26 17:38 ㅣ 추천수: 2
 
신자들이나 사제들이 한번쯤 생각 해볼만한 글이라는 생각에서 다른사람의 글을 퍼-와서 올립니다.-呂>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김 <원율>

베네딕토 16세 교황성하께서는 2007년 11월,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모든 평신도에게 보내신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Spe Salvi: In Hope we were saved)에서 “신앙은 곧 희망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희망의 참 모습은 기도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활동과 고통 안에서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약성경과 초기교회에서의 신앙을 바탕으로한 희망의 개념”(The concept of faith-based hope in the New Testament and the early Church)이라는 소제목을 읽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피나는 투쟁에서 실패한 스파르타쿠스처럼 사회개혁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또한 바라빠나 바르 코크바처럼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 담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곧 최고의 주님이신 살아계신 하느님과 만남, 종살이의 고통보다도 더 강력한, 그래서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도록 해주셨습니다.
Christianity did not bring a message of social revolution like that of the ill-fated Spartacus, whose struggle led to so much bloodshed. Jesus was not Spartacus, he was not engaged in a fight for political liberation like Barabbas or Bar- Kochba. Jesus, who himself died on the Cross, brought something totally different: an encounter with the Lord of all lords, an encounter with the living God and thus an encounter with a hope stronger than the sufferings of slavery, a hope which therefore transformed life and the world from within.

작년 12월 19일 우리는 18대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당 내의 일부 성직자에 의한 선거개입은 도를 지나쳐서 신자들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선거 당일 춘천교구의 거두리 성당에서 벌어진 일을 한 교우께서 “광야의 소리” 자유게시판에 게재하였던 내용의 일부입니다.


아침을 먹고 그날 하루의 의미를 묵상하고자 거두리 성당에서 10시 30분 평일 미사에 참례 하였다. 이명호 베드로 주임신부가 미사진행 후반에 불쑥 이런 가르침도 아닌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오늘이 투표일이지요? 어제 저희 춘천지구 신부들이 함께 모여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즉 내일 투표에 누구를 지지할까였습니다. 한 신부님이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9절에 관련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나는 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건 농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의 농담인지 잘 참고하세요.” 그는 성스런 제제 위에 서서 예수님 말씀을 핑게로 농담을 하면서 그의 진심을 예수님 앞세워 전하려 하였다.

모든 신자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춘천교구 신부들이 좌파성향의 야당을 지지한다는 것쯤은 오래되었고 이제 신자들 눈에는 상식 수준이 되었지만, 그래서 신자들이 각본당에서 벌써부터 종북좌파지지 성직자들에 대하여 넌더리를 내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가톨릭 천주교회는 지금 이런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 가관인 것은 미사를 마치고 본당문을 나오는 나이 많은 신자들에게 원장 전마리안나 수녀가 일일히 할머니들을 붙들고, “아까 신부님 강론의 의미를 잘 알아 들으셨지요? 꼭 그대로 하셔야 됩니다” 이렇게 말하였다.


이 교우는 항시 깊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온 분입니다. 사제의 강론에 참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도 참고 또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어이없어 이 번만은 그냥 넘길 수 없다 하여 이 사실을 팩트(Fact)에 근거하여 가톨릭 평신도의 인터넷 저널 “광야의 소리”(www.aware.co.kr) 자유게시판에 게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천주교 사제로서 행하였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38세의 한 신부가 73세의 동 교우에게 다음과 같은 막말을 댓글로 단 것입니다.


이태원 : 이명호 베드로 신부님.. 그렇지 않아도 성당 빚 갚느라고 골치 아프시다.. 고마 해라, 미친 놈아, 벌받기 전에. (2012-12-31 오전 8:21:)


이외에도 천주교 사제의 대선개입의 예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12월 9일 일요일 성당미사에서는 주보의 간지로써 제31회 인권주일 담화문이 실렸고 이중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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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천주교회는 오래전부터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법률과 정책들을 반대하였고, 최근에는 환경과 생태계, 인간생명, 정의와 평화를 위협하는 4대강 개발, 핵에너지 확산정책,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 이번 선거에서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존중하고 국민을 섬길 줄 아는 지도자가 선출되기를 기도하며,∙∙∙∙∙∙”


이 인권주일 담화문은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의 이름을 빌려 대선에 공공연히 개입하고자 하는 일부 좌파 주교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있습니다. 전남 고흥의 한 본당에서는 신부가 강론 중에 공공연하게 “독재자의 딸을 이 나라의 지도자로 뽑으면 안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 연말의 주일에 강남의 어느 본당에서는 문재인은 디모데오라는 본명을 가진 엄연한 신자인데 박근혜는 세례를 받았다가 배교한 사람이라고 강론 중에 주임신부가 이야기하였습니다. 만약 희망안에서의 구원을 말씀하신 교황 성하의 뜻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였더라면 이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겁니다.

“얼마전 우리는 선거를 치렀고 새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을 지지하였던 분도 계실 것이고 또 반대하였던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가 나라를 잘 이끌어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이 살아있는 복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도록 모두 기도합시다.”

사제를 우리는 성직자라고 부릅니다. 성스러운 직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왜 성스러운 직이라고 부를까요? 이는 성직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한 주간에 걸쳐 세속에서 상처받은 데 대한 위안의 말씀을 사제로부터 듣고, 죄지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주일에 교회를 찾습니다. 그러므로 사제의 말과 행동은 천금의 무게를 지녀야 하고 신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위로와 평화를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일부 사제의 말과 행동은 신자들에게 더할 수 없는 환멸을 주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감동을 얻으며 마음의 평화를 구하기 위하여 성당에 옵니다. 그들은 누가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을 듣기 위하여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신부가 여당을 지지하든 야당을 지지하든 강론대에서 정치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해답은 간단합니다. 너무나 간단합니다. 정치이야기를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부님 정치이야기를 삼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하면 좌파신부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세상에 육화되어 오신 것은 세상의 불의를 없애시기 위하여 오신 것인데 일부 기득권에 물든 신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세상의 정의를 가져다 주기 위한 사제의 메시지를 정치 이야기 운운하면서 막고 있다고 핏대를 올립니다. 참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사제가 나름대로 신자들의 호감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제의 말 한마디, 하나의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신부님이 감옥에 가면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여 드렸습니다. 지금 그런 시절의 사회적 명성과 인기를 그리워하는 사제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현 시절을 태평성대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난세로 만들고 평지풍파를 일으켜 자신을 핍박 받는 순교자, 독재정권 하에서의 영웅처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얼빠진 사제들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배웠습니다.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구원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가슴 속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을 바꾸겠다고 날뛰는 투사들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무생물 구럼비 바위를 지키겠다고 제주도에서 야외미사를 드리는 사제들을 신자들은 참으로 우려하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필자가 외인에게 입교를 권면했을 때 그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왜 신부들이 제주도에 내려가서 데모하고 4대강 반대 플라카드를 성당 문에다 걸고 그럽니까? 저는 그런 종교 믿을 수 없습니다.” 신부님! 신부님들이 신자들에게 왜 선교하지 않느냐고 책망하기 전에, 먼저 나라의 안전을 해하고 세속의 정책투쟁에 끼어드는 행동부터 그만 두십시오. 제발 부탁합니다.

진정한 희망의 구원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누구를 찍으라고 선거에 개입하는 것이 희망의 구원입니까?  우리 개인의 마음 속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이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전해지고, 다음으로 한 집단의 구성원, 그리고 하나의 나라, 더 나아가서는 세계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찰 때 진정한 희망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그러한 일을 하라고 이 세상에 성직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원을 갖고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교황님께서 가르치신 희망속의 믿음(Faith in Hope)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부님 한가지만 필자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갈려진 교회와는 달리 베드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황님의 수장권을 인정하고 따른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교황의 무류권 같은 거창한 말씀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 신자들이 교황성하의 가르침을 따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쉽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교황성하께서는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에 몸담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이루어주셨습니다. 바로 최고의 주님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과 세상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킨 희망과 만나도록 해주셨습니다.

신부님! 본분에 어긋나는 정치적 투쟁을 사목의 일부라고 거짓 주장하지 마세요.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강론대에서 특정 정파에 편드는 정치언동을 하여 교회법을 위반하지 말아 주십시오. 교황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께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에게 보내신 회칙의 한 구절을 다시 인용하면서 제 글을 마칩니다.

예수님은 스파르타쿠스가 아니셨습니다. (Jesus was not Spartacus.)




 

댓글 2

  • 2013년 1월 27일 오후 11:46

    언젠가 교황님은 하느님께 순명을 다 하고 추기경님은 교황님께 주교님은 추기경님께 신부님은 주교님께 우리신자들은 신부님께 순명을 다 하여야한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그것은 가톨릭의 질서다 라고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매님께서 필자를 비꼬는 말투로 신부님의 강론이 정의와 공정과 예절에 맞지않는 갈론이라도 순명을 해야 겠군요?하는 댓글을 올렸더군요.신부님께서 비근한 예로 퇴폐 이발관이나 그보다 더 나쁜곳으로 인도하더라도 그것이 신부님의 말씀이니 순명을 해야합니까 ? 라는 질문 같았습니다.그러나 이야기 상대하고 싶지않아 그만 둔 일이 있습니다.

  • 2013년 1월 27일 오후 11:59

    신자들 마음속에 저마다 하느님의 양심이라는 모상이 있기때문에 신부님의 바른 강론 하느님 모상과 전혀 닮지 않은 강론을 구별할수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을 귀 기우려 순명하면 되는 것이다.순명해야 할것과 순명할 가치가 없는 것은 순명과 거리가 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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