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주간을 보내며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성찰
박동호신부(서울 신정동본당, 정의평화위원회)
필자는 사제생활 21년을 보내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주일학교제도가 없던 시절 부모님과 형제들과 함께 성당을 다녔고,가끔 저녁에 가족들이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 고상 앞에 모여 앉아 졸며 어머니의 지도(?)로 묵주기도를 한 기억이 있으며,그 추운 날 밤늦게 성탄 자정미사를 가족들과 함께 억지로 다녀온 기억도 있다. 고등학생 시절엔 텅 빈 성당에 앉아 괜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주일학교 교사 활동에 학교 가톨릭 학생회 동아리 활동에 기웃거리기도 했으며, 짧은 직장 생활에서‘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의미 있게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다, 얼떨결에 85년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리고 입학하자마자 선배들로부터 들은 교회에 관한 이야기에서 자주 언급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천주교 200주년 사목의안’이었다.
평범한 신앙인에 불과했던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 문헌의 내용이, 바로 교회의‘대형화’, 중산층화’, 그리고‘세속주의화’였다. 처음으로 교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며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으며 다녔던 그 교회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형화’는 인격적 만남을 어렵게 하고, ‘중산층화’는 사회적 약자를 배제할 위험을 지니고, ‘세속주의화’는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 때부터 필자는 스스로에게 매일 묻는다.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게 보일까?’ 이 물음 앞에 사제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아래 글은 학술 및 과학적 내용이 결코 아니다. 필자의 사목생활에서 겪은 주관적 체험에 바탕을 둔 관찰과 성찰, 그리고 부끄러운 고백에 불과함을 미리 밝힌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여러 모습 가운데 칭송하고 자랑할 만한 모습이 수없이 많이 있음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1. 1984년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대형화
2011년 현재, 교회의 대형화는 겉모습의 착각일 뿐이다. 물론 양적 팽창을 부인할 수 없다. 분명히 신자의 수는 증가했다. 그러나 필자가 착각에 불과하다고 보는 배경은 두 가지이다. 첫째, 도시의 인구 집중화에 따른 도시 교회의 자연스러운 양적 팽창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어느 곳에선가의 양적 축소를 가져왔다. 대형화된 교회는 눈에 드러나지만, 왜소해지는 교회는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다. 이는 지역 교회 곧 교구와 교구사이, 한 교구 내 도시와 농어촌이 공존하는 한 교구 내의 본당과 본당사이의 불균형을 의미한다. 둘째, 교적의 숫자로는 대형화되었을지 모르지만, 한 공동체 안에서 그 존재감마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의 숫자가 그만큼 만만치 않다. 대개 성사생활과 교구금 납부 정도로 성당에 가는 사람과 성당에 발길을 끊은 사람을 구별하는데, 이른바 ‘쉬는 교우’의 비율이 30%를 넘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일선 사목현장에서 필자의 경험은 50%에 육박하거나 그보다 높은 것으로 본다. 이 두 배경을 하나로 묶으라면, 필자는 ‘양적 팽창과 질적 허약함 혹은 불균형’으로 표현하겠다. 자료 및 통계는 뚜렷한 확장을 보여주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그 속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불균형이나 확장에 포함시키기에 석연치 않은 영역(쉬는 교우의 비율)이 너무 크다. 어느 자리에선가 필자는 이를 ‘체격(키와 몸무게)은 커졌으나 체력은 약해졌다’는 우리 청소년의 현실에 비유한 적이 있다.
둘째, 교회의 대형화에 따른 인격적 나눔과 사귐과 섬김의 장애물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물론 거의 모든 교구에서 ‘소공동체’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소공동체 운동은 본래 지향을 잃어버리고, 기존의 조직 관리 및 행정 운용에 동원된 형식적 수단으로 전락했다.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표현 그대로, ‘공동체’운동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체’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만들어가는 동력이 되기보다는 기존의 반과 구역, 혹은 신심단체의 활동에 부가된 프로그램 정도에 머물고 있다. 필자는 이 같은 현상의 근본적 배경으로 사목자와 교우들의 ‘교회관’을 꼽는다.
교우들도 사목자도 교회를 ‘하느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세상의 수많은 기능적 조직이나 사회 체계 가운데 하나쯤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당연히 인격적 나눔과 사귐과 섬김을 갈망하지 않는다. 조직과 체계를 관리하기에 효율적인 수단을 찾을 뿐이다. 대형화된 교회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구역과 반을 나누었으며, 그 구역과 반은 관리의 대상일 뿐, 살아있는 세포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이라 여기지 않는다. 구역이나 반의 고유함이나 다양성은 찾아보기 어렵고, 일사분란한 획일성만 요구될 뿐이다. 중앙(본당 사목협의회)에서 지시하면 일선 현장(구역과 반)에서는 집행하면 된다.
도시 본당의 경우 구역장과 반장이 남녀교우 합하여 적게는 수 십 명, 많게는 백 여 명을 훌쩍 넘으며, 그래서 지구, 지역, 교구의 차원으로 합하면 수 천 명에서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어느 교구의 통계에 따르면 반장으로 활동하는 교우들 가운데 세례 후 2-5년 사이의 반장이 50%를 넘는다고 한다. ‘교회 실정을 잘 모를 때 얼떨결에 반장을 맡기지 않으면 반장을 하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웃어넘긴 적이 있다. 또 열심히 본당에서 활동하다가 임기를 마치면 ‘이제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려고 합니다.’하는 교우들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아무런 강제장치나 현세적 동기부여가 없는 교회의 구역이나 반, 혹은 단체의 구성원들을 관리 운영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제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고 혹은 얼떨결에 그 직책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일까.
요약하면, 교회의 대형화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교회란 무엇이며, 그 교회를 작동하게 하는 원리가 무엇인지부터, 곧 교회의 정체성부터 정돈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문제, 곧 ‘교회의 중산층화’와 연결된다.
2. 1984년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중산층화
교회 안에서조차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이 무한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로 막무가내로 진화했을 때 교회 역시 그 보조를 맞추었다. 필자가 도시 교구에서 사목하기에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꼽는 두 가지 현상이 있다. 하나는 본당에서 활동(봉사?)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여유 있는 시간과 재력이 그것이다. 자기 생활에서 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엔가 매어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이는 바로 경제적으로 쪼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시간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어렵고 힘든데도 불구하고 귀하고 아까운 시간과 재력을 본당에서의 활동을 위해 내놓은 분들이 많다. 그러나 대개 본당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는 분을 찾을 때 사회적 조건을 검토한다. 점잖게 말해서 ‘사회적 조건’이지만, 편하게 이야기하면 ‘시간이 많고 돈 좀 쓸 수 있는, 사회적으로 내놓을 만한 신분이나 직업 혹은 지위에 있으며 신앙심 깊은 교우’ 정도가 되어야 회장감이 된다. 그 쯤 되어야 여러 모임과 활동을 격려할 수 있고, 이른바 ‘빨랑카’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조직을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다. 일종의 윤활유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본당에서의 ‘가난한 이’ 곧 ‘사회적 약자’는 우선적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여분의 선택 혹은 시혜 활동 대상에 불과하다. 본당 구조 밖의 ‘사회적 약자’는 더더욱 관심의 대상에서 멀리 있다. 흔히 본당이 활성화되었다거나 침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무엇이 활성화고 무엇이 침체인지 조심스럽게 따져봐야 한다고 본다. 대개 규모가 큰 본당이든 작은 본당이든, 사목자든 본당의 봉사자든, 본당이 활성화 혹은 침체 되었다고 말할 때 규모의 상관없이 2-300명 정도의 본당 봉사자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본다. 이 정도 규모의 교우들이 여러 분야에서 중복 활동한다. 이들의 정서가 본당의 분위기를, 곧 활발함과 침체를 반영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교우들은 멀찍이서 방관자로 있거나,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멀찍이서 그저 바라만보고 있는 교우들의 교회를 향한 시선이 어떤지, 눈길은커녕 발길조차 끊은 이들의 마음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않는다. 당장 눈에 보이는 2-300명 정도의 교우들의 표정과 행동으로 활발함과 침체를 가늠할 뿐이다. ‘가난한 이’가 물론 경제적 빈곤으로 고통 받는 이를 말하기는 하지만, 교회의 관심에서 벗어난 이 역시 ‘가난한 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본당의 사목은 우선 앞에서 말한 2-300 여명(적극적 참여자라 할 수 있다)을 그 첫 대상으로 삼고, 본당 교우들 가운데 구역이나 반 모임에 가끔씩이라도 출석하거나, 주일 미사에 나름 정기적으로 오는 이들이 그 다음으로 본당 사목활동의 대상이 된다. 그 나머지 교우들은 울타리 안에 있지만, 누구도 부르는 이 없어 저 만치서 머뭇거리거나 서성인다.
구체적으로 본당 재정운용 상황을 보면 이는 더욱 뚜렷해진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가난한 이를 위한 사목활동에 시간이나 인력이나 재정을 우선적으로 투입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본당(필자가 사목하는 본당을 포함해서), 어느 교구 살림살이를 보더라도 이를 드러내는 표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목활동이나 재정운용에서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우선순위에서 거의 마지막 자리로 밀려난다. 토목건축에 막대한 예산과 열정을 투입하고, 본당의 단체나 봉사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그리고 전체 행사에 투입하고, 그 다음에 여력이 남아 있으면 선별적으로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을 실천한다.
일부에서는 교회의 중산층화를 걱정하기보다는 당연하다고 여긴다. 오히려 발전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교우도 있다. 그만큼 잘 살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중산층으로 구성된 본당이 있을 수도 있다. 맞을 수도 있으나, 버젓이 부자의 문 밖에 가난한 라자로가 굶주리며 웅크리고 앉아 있음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이 역시 교회의 교회다움을 다시 묻게 한다. 창립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과 박해, 그리고 비움과 버림으로 세상 구원 사명을 완수한 것처럼, 교회도 똑 같은 길을 걷도록 불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서 사람들은 교회를 보고 의구심을 품는다. 교회와 세상이 무엇이 다르냐고!
3. 1984년 200 주년 사목의안 - 교회의 세속주의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광주 대교구장이셨던 최창무 대주교가 신학교에서 강의할 때, 세속화와 세속주의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를 세상과 유리시키지 않고 세상과 대화함으로써 인류를 구원에로 이끄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이기에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일이지만, 교회의 세속주의화는 조심 또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세속주의화는 교회가 세상의 여러 조직가운데 하나쯤으로 환원되는 것이라 했다. 기억대로라면, 교회의 세속화 과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에의 참여일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세속주의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를 가리거나 희석하는 셈이 될 것이다.
교회의 세속주의화를 이야기할 때 필자가 자주 이야기하는 내용이 있다. 교회의 여러 모임은 ‘주님의 기도’로 시작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드러나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적어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 모임에서. 그러나 안건토의 혹은 의사결정 시간이 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기 보다는 개인의 욕망이 충돌한다. 아버지의 나라보다는 단체 및 조직의 이익만이 유일한 목표로 드러난다. 물론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개 ‘영광송’으로 모임을 마친다.
일선 본당 사목현장에서건, 지역교회 전체의 사목에 있어서건, 창립자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이루려하셨던 ‘아버지의 뜻과 나라와 이름’에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매달리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와 뜻은 교회에게 때로는 희생과 비움과 버림을 요구하는데, 그런 경우를 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구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교회 혹은 교회 내의 조직 그 자체가 목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물론 교회는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성사적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그 얼굴에서 드러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도구로서의 성격에도 충실치 못하고 오히려 목적으로 자리잡으려하고, 성사로서의 성격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가려버린다는 비판을 받곤 한다.
세상은 가난 대신에 풍요로움을, 박해 대신에 안락함을, 희생 대신에 이익을, 비움과 버림 대신에 채움과 남김을 위해 마음과 정신과 목숨을 다한다. 만일에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표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혹은 교회의 모습에서 세상 다른 이익집단과 다른 점을 볼 수 없어서, 사람들이 ‘도대체 교회와 세상이 무엇이 다른가?’하며 비판한다면, 게다가 교회의 구성원, 교우들과 성직자 수도자들조차도, 교회를 세상의 여러 조직 가운데 하나쯤으로 여긴다면, 교회는 세속화를 멀리하고 대신에 세속주의화 되었다고 현세적 영광을 추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교회의 대형화, 중산층화, 그리고 세속주의화의 현상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사회학적, 종교적, 혹은 신학적으로 분석하며 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나, 이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의 몫이다. 일선에서 사목하는 필자로서 다만 사목활동 가운데 성찰한 내용의 일부만을 소개한다.
4. 성경의 사유화(私有化)
필자는 무엇보다도 성경의 사유화를 앞의 현상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싶다. 물론 성경이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냥 독립된 ‘나’보다는 공동체와 인연을 맺은 ‘나’에게, 더 나아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공동체’에게 드러내주신 하느님의 계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바람, 하느님의 열정,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의 하느님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아버지이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보잘 것 없었던 유목민족과 그 역사의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동행하셨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신약성경은 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 예수가 무엇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무엇을 드러내보였으며, 어떻게 이루었는지를 제자와 군중(보통 사람들, 약하고 억눌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준, 신앙의 언어로 고백한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경을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가두어놓는다. 사회적 맥락, 공동체가 직면한 사회문제, 공동체 역사의 여정에서 동행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에게, 그것도 나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은밀하고 사적이며 영적인 하느님으로만 받아들이려 한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나의 마음과 기분에 하느님을 맞추는 격이다. 그 같은 현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교회 안에서 성경과 관련된 여러 모임이 있다. 성경공부모임, 성경필사, 모임에서의 ‘말씀나누기’에 이르기까지 성경 말씀은 교회 안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교우들 사이에 회자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개인의 구원보다는 공동체와 세상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경륜를 계시하지만, 우리 교우들은 세상 구원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와 인간의 타락과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도 개인사가 아니라 인류와 세상과 하느님의 관계(조화)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사건역시 세상의 억압과 착취구조와 하느님과의 대결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예언서들과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어떻게 세상의 제국과 다른 모습으로 사회를 형성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이런 내용들은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의 연구 결과로서 동의한다. 그리고 바로 이 성경의 계시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성찰하도록 안내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성경의 이런 사회적, 역사적, 공동체적 맥락은 아주 간단하게 잊혀지고, 대신 성경은 읽는 개인의 마음에 떠오르는 감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창세기를 읽으며 인간의 욕망을 깊이 있게 성찰하며, 오늘날 현실을 반성적으로 재구성하려하지 않는다. 탈출기를 읽으며 무력과 금력으로 무장한 억압세력의 착취구조를 깊이 있게 성찰하며, 이스라엘 같은 사회적 약자 계급의 신음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예언서를 읽으며, 공동체 내 중앙집중화된 권력이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 성찰하며, 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보지 않는다.
신약성경의 예수님 주변에 왜 사람들이 그토록 몰려들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했는지, 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복달했는지 그 사회, 정치, 역사적 배경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예수님의 은총만이 내게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바오로 사도가 성찬례의 거행에 가난한 이를 위한 배려를 핵심의 내용으로 삼은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대신에, 성찬례에 거룩하게 참여하는 자신만을 그린다. 이스라엘, 그리고 그리스도 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하고 성찰해야 할 묵시문학은 미래의 불길한 파국을 점치는 판타지쯤으로 읽는다.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주관적으로 읽는데 그치기 때문에, 신앙과 성경, 신앙과 생활, 생활과 성경은 서로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성경은 개인의 독서 취향에 맞게 사유화된다. 그 대신 신앙은 몇 몇 교회 규정을 지키는 것쯤으로 환원되고, 세상의 가치 혹은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사목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만 설명하려 한다. 구체적인 생활환경은 당연히 현대 사회의 교우들에게는 경제, 정치, 국제질서, 제도와 법, 교육 따위의 구체적인 영역으로 드러난다. 교우들의 경제생활은 구체적이며 실재이며 현실이다. 다른 영역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현실을 다루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성경을 그냥 추상적으로 혹은 일반적으로만 설명하려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을 개인이 알아서 나름대로 대하도록 함으로써 발생하는 성경의 이 사유화는 필연적으로 신앙의 개인주의화를 불러온다.
5. 신앙생활의 개인주의화
모든 인간의 존엄함은 절대적이다. 당연히 한 개인의 존엄함 역시 그 무게를 측량할 수 없다. 어떤 이(프란츠 파농)는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와 깊이는 우주보다 바다보다 무겁고 깊다고 했다. 개인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는 개인을 독립적 존재로 이해하지 않는다. 신앙의 언어로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존재로, 세상의 언어로는 타인과 사회와 관계를 맺은 인간, 곧 관계의 인간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하고, 신약성경은 줄기차게 ‘이웃’을 강조한다. 분명히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관계를 배제한 모나드(단자)로서의 개인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되었다. 게다가 기복적이기까지 하다. 기복적이라도 공동체의 복을 바라는 것이라면 그나마 바람직하다 하겠다. 이 ‘기복’이라는 것도 자신 혹은 좀 더 범위를 넓히면 자신과 이해관계로 인연을 맺은 이들의 복을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거론하기 거북하지만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자. 우선 우리나라의 교육과 관련된 내용이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도 해결하지 못할 사회문제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의 교육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산투기 문제란다. 입시철이 되면 전국이 몸살을 앓는다. 사찰이며, 예배당이며, 성지며 성당이며, 유명한 산이며 할 것 없이 자녀의 수능을 앞둔 부모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물론 겉으로는 최선을 다하라는 정성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안타깝게도 속내는 고득점이다. 정성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속살은 철저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다. 교육제도와 환경을 개선하려는 뜻을 모으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이기심과 개인주의 앞에 이 상식은 속절없이 무너진다. 백번 양보해서 만일 보통의 평범한 부모의 간절함을 이해하고 존중하더라도, 교회든 성당이든 사찰에서든 이른바 ‘00일 기도’ 따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묵인한다. 사실상 조장이 아닌가! 자식 사랑이야 누군들 마다하겠는가? 내 자식 소중하듯이 남의 자식 소중하다는 것쯤 누군들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교육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공동의 의지와 뜻을 모으라고 인도하고 격려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그럼에도 개인주의화된 신심은 그런 식으로 점점 강화된다.
다른 예를 우리는 미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우들에게 미사에 참여하여 무엇을 기도했는지를 물어보라. 우리가 애용하는 매월 발행하는 ‘매일미사’에는 보편지향기도가 실려 있다. 물론 각 공동체가 나름대로 공동체의 지향을 담아 바치는 것이 좋다고 적혀있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 그대로 하거나 약간 고쳐서 사용하는 형편이다.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공동체의 선익을 위한 것들이다. 그러나 미사를 마친 다음에 교우들에게 오늘 우리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하느님께 바친 기도가 무엇인지 기억하는지를 물어보라. 필자의 경험으로 그 지향과 내용을 기억하는 교우들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자신의 개인적인 청원만을 마음에 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자신이 마음 쓰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미사가 실제로는 공동체의 제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신앙의 개인주의화는 그 배경에 교회와 세상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교회가 세상 안에 있는 실재임을 인정하더라도 고립된 실재쯤으로 인식한다. 세상 다른 분야와 구별되더라도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실재 정도로 본다.
6. 세상 안의 교회/ 세상을 초월한 교회 - ‘지금 여기’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교회는 분명히 세상 안에 실재한다. 물론 여러 분야(정치, 경제, 문화, 교육...)와 구별되며 교회 그 고유한 사명과 특성을 갖고 있다.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고도(孤島)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 백성이 세상 한 복판에서 구체적인 생활환경에 놓여 있으며,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선의의 모든 이와 기꺼이 협력하고 대화함으로써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려 한다.
그러나 많은 교우들과 성직자들이 교회를 세상 한 가운데 떠 있는 고도(孤島)로 여긴다. 단적인 예를 우리는 이른바 ‘정교분리’에 대한 오해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이를 정치(the politics)와 종교(the religion)의 분리라고 이해하며, 때문에 교회가 세상일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정교분리’는 정부(the State)와 교회(the Church)라는 사회적 조직 사이의 구별을 의미한다. 이는 적극적으로는 신정체(神政體)의 극복을, 소극적으로는 교회와 정부가 독립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뜻한다.
정교분리를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오해하는 태도는 신앙인에게는 신앙과 생활의 철저한 분리 현상과 현대인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대한 무관심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의 분열현상이라 부를만하다. 투표를 하는 행위, 상행위를 하는 행위, 교육 행위, 교회 생활에 참여하는 행위 따위는 모두 한 인간이 수행하는 활동이다. 이런 다양한 행위의 배경에는 인간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인간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이웃과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무대이며,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화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현되어야 할 현장으로 가르친다. 때문에 투표를 하든, 상거래를 하든, 교육을 하든, 교회 생활에 참여하든, 그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인의 이 인간관,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실현하는 구체 행위들이다. 신앙과 생활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세상일에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 증진과 공동선 실현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세상일에 대한 불필요한(쓸데없는) 개입으로 치부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여기저기서 듣는다. 사제가 교리나 강론을 통해,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사회현상을 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을 두고도 ‘정치적 발언’ 쯤으로 치부하고 거북해 한다. 우리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 정책이 ‘재화의 보편적 사용의 목적’을 훼손하고 ‘재화의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경제는 경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비판한다. 하느님께서 선물한 인간의 자유와 국가의 권력 사이의 긴장 관계를 살펴보며 오늘의 현실을 성찰하는 것도 친정부 혹은 반정부, 좌 혹은 우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해버린다. 무엇보다도 우려할 만한 현상은 이 같은 비판과 더불어 빠짐없이 나오는 걱정(?)은 ‘쓸데없는’ 개입으로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킨다는 해석이다.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공동체이므로 불편부당해야 하며 교회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역시 같은 태도를 보인다.
이런 태도(세상과의 분리와 세상일에 대한 무관심)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가 당대 주변의 강력한 여러 제국과 구별되는 대조사회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무력과 금력으로 그 영광과 위용을 드러내는 제국과는 달리,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충실한 백성으로서 이웃, 특히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및 지지를 실현하는 공동체여야 함을 일관되게 가르친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제자공동체 역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당대의 유다이즘과 로마 제국과의 차별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지만 항상 세상과 구별되는 대조사회여야 한다. 세상을 넘어서는 교회란 초월적 실재로서의 교회(종말론적 실재로서의 교회)이긴 하지만 동시에 지금 여기의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는 항상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이 긴장은 현실이 불완전하며, 항상 변화 발전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긴장은 불편함을 수반하지만 이 불편함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과정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과 같다. 교회 전례력의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는 이를 분명하게 기념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불편함을 외면하려고 한다. 불편함 대신에 ‘평화’를 찾는다. ‘평화’라고 한 것은 그 ‘평화’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화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사랑과 정의의 열매로서의 평화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십자가 죽음이다. 철저한 자기 비움과 버림의 절정으로서의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완전한 실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완전한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은 고통스러운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며, 이 초대는 당연히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불편함을 외면하고 싶어 한다. (십자가 죽음을 외면하고 영광의 부활에만 시선을 둔)신앙생활은 여러 가지 여가 활동 가운데 하나 정도로 전락한다.
7. 여가활동으로서의 신앙
어느 자리에선가 우리사회에서 불황을 모르는 분야를 찾으라면 바로 ‘종교 산업’이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종교가 고객을 만족시키는 서비스업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에 불쾌하기까지 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이든 불자든(소비자 고객) 교회와 사찰을 찾는 이유가 자기만족을 위한 것, 그것도 개인주의적 심리 및 정서적 만족을 위한 것이며, 교회와 사찰(서비스 공급자)은 이들을 어떻게 해서든 만족시켜야 하며, 그 만족을 주고받으며 둘 사이에 ‘돈’이 오고간다는 것이다. 성경이나 불경공부든, 교육프로그램이든, 봉사활동이든 그 참여자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면 발길을 끊고, 만족하면 기꺼이 재정적 지원이 뒤따른다는 내용이었다. 종교를 불황을 모르는 서비스 산업으로서 비판한 이 내용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우리나라의 어느 여성 ‘신학자’의 논문이었다.
여가활동을 즐길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수많은 가난한 이들이 있다. 어쩌면 레오 13세 교황이 1891년에 회칙 ‘새로운 사태’를 내놓을 때보다 현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더 심각해졌을지 모른다. 19세기 유럽의 노동자들이 교회를 떠나 사회주의 혁명의 물결에 휩쓸린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으나, 비참한 생활환경이 큰 몫을 했다는 분석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간단히 말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 팍팍하여 교회를 찾을 여유조차 없었다는 뜻이다.
필자가 여가활동의 하나로서의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들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활동에 익숙하고 적극적인 교우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교우들이 대부분이라 믿고 싶지만) 물리적 조건의 불편함이든, 정서적 불편함이든 불편함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쾌적하고 편한 조건을 채워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발길을 돌릴 태세다. 대형교회라는 말의 ‘대형’은 교인의 숫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 조건 자체가 쾌적할 뿐만 아니라 제공하는 프로그램도 다양하여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다. 인적 물적 자원이 풍부하다. 불편함을 최소화하고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불편함을 최소화한다는 것은 물리적 조건의 쾌적함을 제공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괜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연히 듣기 거북한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세상인데 교회에 가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한다. 이른바 ‘마음의 평화’를 위해 성당에 다닌다고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이는 정서적 심리적 만족을 주는 여가 생활쯤으로 해석할 만 하다. 불편한 진실은 덮어두어야 한다. 성경이든 교리든 논란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재들은 덮어두어야 하고, 가능하면 일반화 추상화시켜야 한다. 정서적 심리적 만족대신에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자극하고 형성하는 주제들은 가능하면 대화에서 피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불편함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사회교리의 외면을 초래한다.
8. 외면하는 사회교리
앞에서 신앙생활을 몇 몇 교회의 규정을 다하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했다.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인상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살펴보았다. 교우들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형화’, ‘중산층화’, ‘세속주의화’, ‘성경의 사유화’, ‘신앙생활의 개인주의화’, ‘고도(孤島)로서의 교회’, ‘여가활동으로서의 신앙’의 현상의 책임에는 지역교회 당국 혹은 필자를 포함한 성직자의 책임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그 공의회 문헌 가운데 네 개의 헌장이 있으며, 그 가운데 또‘계시헌장’과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이 있다는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별로 없다. 있다 하여도 그 문헌을 읽은 교우는 거의 없다. 계시헌장이 성경과 성전의 가치를 밝히고, 교회헌장이 교회의 정체성를 제시하고, 사목헌장 곧 사회 안에서 교회의 사명을 밝히는 최고 권위의 교회의 가르침이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을 다루고, 좀 더 구체적으로 혼인과 가정, 문화, 경제 사회생활, 정치 공동체 생활, 평화와 국제 공동체에 대해 교회의 공식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음을 아는 교우 역시 거의 없다.
알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외면 현상은 ‘사회교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의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존재했으며, 교회 내적으로는 교회생활을 쇄신 발전시키고, 외적으로는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는(복음화) 교회의 사명에 있어 핵심이었다.
구약성경은 억압에서의 해방이라는 이집트 노예생활에서의 탈출을 원체험으로 삼아 십계명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사회)와 하느님의 관계를 가르쳤다. 고아와 과부와 몸 붙여 사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명령이었다. 예언서는 그 자체로 ‘사회교리’의 성서적 영감이었다. 신약성경의 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은 인간의 구원을 향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죽음과 부활)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까지 포함하는 인류의 구원을, 그것도 전인적 구원을 실현했다. 성경은 특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존엄성, 정의와 상호배려를 실현하는 (하느님과의) 계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 제자 공동체 건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 실패와 고통 속에서조차 지속되는 희망의 역사관 따위는 세상에 대한,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사명(인간 존엄성과 사회정의의 증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교회의 사상가들 역시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치고 있다. 떼르툴리아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파두아의 바실리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치스코 수아레스, 최근의 자크 마르탱, 도로시 데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가톨릭 교부와 사상가들이 끊임없이 신앙의 관점에서 당대의 사회적 물음에 응답함으로써 세상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을 제시하였다. 특히 자연법사상은 개인과 사회, 종교와 공공생활, 역사와 자연, 과학과 윤리 사의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면 관계상 한 가지 예만 제시한다면, 시장제도에서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와, 사회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부과되는 사회 및 공동체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에서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주관적 개인주의 따위의 극단적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데 가톨릭의 자연법사상은 기여하였다. 자연법사상에 토대를 두고 교회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존엄함 증진의 의무, 인간의 사회 및 정치적 본성, 공공질서와 공공의 평화, 사회정의의 기본 기준과 관련한 공동선 증진의 의무 따위를 국가의 기본 의무로 제시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극단적 개인주의에 대응하는 사회교리의 연대성의 원리는 빼놓을 수는 없다.
이처럼 사회교리는 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전승, 교회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자연법사상의 전통), 그리고 수많은 하느님 백성의 정의와 사랑의 삶을 통해 형성․발전한 교회의 가르침이다. 사회교리 혹은 가르침은 교회의 교도권으로 제시한 규범적 성격의 문헌들로 제한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891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노동의 조건’(새로운 사태)이후 일련의 교회 공식 문헌들 지칭한다.
교회는 수동적인 태도에 머물지 않았고 세상 변화에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개방적으로든 호교론적으로든, 진보적으로든 보수적으로든 응답하였다. 대체로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새로운 사태’는 최초로 종합적이며 체계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내놓은 응답이었다고 인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사회교리의 첫 문헌으로 꼽힌다. 회칙 ‘새로운 사태’ 이후 교회는 이 문헌을 기념하는 문헌의 형식으로 혹은 역사의 체험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면서 사회교리를 발전시켜왔다.
교회는 그렇게 사회교리를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는데,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낙수효과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낙수효과가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막대한 공적자금이 곳곳에 스며들지 않으며, 오히려 어디론가 새거나 어느 곳에선가 고일뿐이라고 한다. 교회의 사회교리의 처지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지막으로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밝히는 ‘사회교리’에 대한 구절을 인용한다.
“교회의 사회교리는 교회만의 특권이 아니며,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고, 편의를 도모하거나 간섭하려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복잡한 생산, 노동, 사업, 금융, 무역, 정치, 법률, 문화, 사회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복음의 해방 말씀이 울려 퍼지도록 사회 상황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교회의 권리이다.”(70항)
“교회의 이 권리는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교회가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충실성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개인의 양심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들에까지 이르는 복음화의 모든 길을 걸어가도록 촉구한다. 한편 종교는 순전히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 메시지는 우리의 지상 생활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없다는 다른 세상의 구원으로 치부되어서도 안 된다. 복음과 신앙의 관련성 때문에, 불의, 곧 죄악의 사악한 결과 때문에, 교회는 사회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다. 교회는 윤리 원칙들을 사회 질서에 관한 것까지도 언제나 어디서나 선포하고, 인간의 기본권이나 영혼들의 구원에 요구되는 한도만큼 어떠한 인간 사항들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릴 소임이 있다.”(71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