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신앙유적지답사 : 수원교구 양근 용문지역

2016. 7. 29. 오후 2:54:58

글자

[신유답2016-7]

양근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7-


  ■순례지 :  ○용문성당
              ○곡수공소
              ○한강개
              ○용문산 (조동섬관련)
              ○양근 조동섬생가터 경당터
              ○양평 대감마을 권철신권일신 생가터A
              ○양근 갈산리 권철신권일신 생가터B
              ○양근 참수터, 오밋다리참수터
              ○양근 관아터(표지석), 옥터순교터
              ○양근 감호암
              ○(광주 천진암일원)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7. 16.(토)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김 혁
                - 김광자(자료정리)
                - 전춘호
                - 김기혁
               
               


신앙유적지답사모임


[용문성당]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다문리 386-2번지(수원교구 소속)

1908년 3월 원주교구의 원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으며, 초대 주임으로 조제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양평 용문면 일대는 병인박해 이후 숨어든 신자들이 옹기를 만들어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천주교가 뿌리내리기 시작한 곳이다. 신자 수가 늘어나자 뮈텔 주교는 1908년 3월 5일 조제 신부에게 이곳의 사목권을 맡겨 관리하게 하였고, 조제 신부는 덕촌리 퇴촌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덕동에 한옥을 매입하여 덕동성당으로 불리다가 3대 주임 손성재 신부 때는 덕동의 성당을 팔고 마룡리에 중국식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이때 마룡리(마내) 본당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성근 신부 때에는 이전에 300여명이던 신자 수가 9년 만에 1000여명으로 늘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본당이 폐지되고 양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으며, 6·25전쟁으로 성당 건물의 절반이 파괴되는 불운이 있었다. 이후 양평 본당의 지원으로 1955년 5월 마룡리 성당 터를 팔고 현재의 위치에 성당 신축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1956년 10월 7일 성당 신축공사를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으며, 1958년 김영근 신부가 부임하면서 용문 본당으로 부활되었다.
2008년 4월 26일 교구장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본당 모든 신자들과 본당 출신의 사제, 수도자, 본당에서 사목했던 전임 주임 신부, 양평군 및 용문면 각 기관장 등 2000여명의 축하 속에 용문성당 본당설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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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공소](신자들이 아무도 없던 마을에 뿌리내린 공소)

곡수리는 신자가 없는 마을이었다. 1949년 곡수리에 정착한 김영수(요셉)씨의 선교로 1955년 김복수(요셉·곡수공소 초대회장)씨가 세례를 받으면서 공동체가 생겨났다. 1960년대부터 꾸준히 영세자가 늘면서 1966년에는 신자수가 20여 명이 돼 공소로 인준 받았다.
여건은 열악했지만 선교를 향한 열정은 뜨거웠다. 사제를 만나기 위해서는 관할 본당인 양평 본당을 찾아야 했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았고 버스도 거의 없었다. 산을 돌아가면 20km 가까운 길을 가야했다. 일 년 중 사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봄과 가을, 두 번의 판공 때뿐이었다. 공소 건물도 없어 공소 회장 집에서 공소 예절을 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세례 받는 이가 꾸준히 있어 1970년대에 들어서자 신자가 40명이 넘었고 1980년에 들어서면서는 70여 명으로 늘었다. 1982년 곡수보건소 소장으로 성가소비녀회 수녀가 파견되자 수녀들과도 교류하면서 예비신자 교리가 활성화 돼 단 3년 동안 82명이 세례를 받기도 했다.
신자들은 공소의 크고 작은 일에 힘을 모았다. 1981년 첫 공소건물은 신자들의 땀으로 만든 공소였다. 공소회장이 구입한 산을 곡괭이와 삽으로 깎고 사제관의 헌 자재를 가져와 신자들이 직접 공소를 지었다.
공소 뒤편 산에 우거진 잣나무 숲도 공소 신자들이 공소운영 기금 마련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비록 관리할 사람이 없어 잣 수확은 어렵게 됐지만 1983년부터 자그마치 7년 동안 제초 작업을 하며 공소의 모든 신자들이 노력해 가꾼 숲이다.
지금은 인근에 진출한 개신교회의 신자가 더 많지만 그동안 왕성했던 공소의 선교로 아직도 곡수리 마을 220세대 중 40세대 이상이 신자들의 집이다.
공소 3·6대 회장을 역임한 한기수(요한·65)씨는 “곡수공소 신자들은 교리지식은 많지 않아도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공소 일에 힘을 모았다”면서 당시 공소 분위기를 설명했다.
1999년 공소 건물을 신축했지만 신자 수는 감소해갔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마을 인구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공소 미사에 60여 명이 참례했지만 지금은 그 반가량으로 줄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고령자로 미사 참례를 할 뿐 활동할 수 있는 신자들도 많지 않았다. 공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공소 교육관을 피정의 집으로 활용해보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관리할 사람이 없어 운영이 중단됐다.
이런 공소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3년 전부터다. 매주 오전 8시30분 봉헌되는 공소 미사에는 인근 부대 4곳에서 온 병사 80여 명의 목소리로 활기가 넘친다. 군종교구 결전본당(주임 손해락 신부) 소속 병사들은 매주일 공소 미사에 참례할 뿐 아니라 독서와 반주도 도맡아한다. 미사도 양평 본당 주임 신부와 결전 본당 주임 신부가 번갈아 주례하며 신자들과 병사들의 성 사생활을 돌보고 있다. 공소 신자들은 병사들을 위해 매주 간식을 준비하고 군종병들이 교육관을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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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와 옛 양근지역]

경기도 양평의 양근(楊根).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치기 전 양평의 지명이다. ‘버드나무 뿌리’라는 뜻의 양근은 한국교회가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양근 성지는 양근의 순교자와 신앙 선조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됐지만 사실 이 양근 지역 자체가 신앙 선조들의 자취로 가득한 지역이다.
천진암 강학을 주도한 권철신·일신 형제가 이곳 출신이었고, 정약전·약용 형제, 이벽, 이존창, 유항검, 홍낙민, 이승훈 등이 권철신에게 천주교를 전해 받았다. 천주교를 학문에서 신앙으로 끌어올리고, 성사에 대한 갈망에 가성직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곳 양근이었다.
성지에서 남한강을 따라 1㎞ 가량 떨어진 곳에는 감호암(鑑湖岩)이 있다. 이 감호암 위에 감호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박학다식한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거나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했던 권일신은 이곳을 자주 찾기 위해 양근리 갈산에서 감호정 인근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 감호암은 성지의 수상성지순례 코스를 따라 모터보트를 타고 찾아볼 수 있다.
초기 신앙 선조들의 터전인 만큼 순교도 많았다. 성지를 나와 남동쪽으로 양근교를 향해 가면 양근교 좌우측에 양근섬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신앙 선조들이 처형 당하던 순교터가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순교자들은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오밋다리 옆 백사장에서 치명했다고 한다. 지금은 오밋다리도 없고, 팔당댐 건설로 지형이 변해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어 양근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이곳 근처를 순교터로 추정할 뿐이다.
이곳에서 지난 2014년 시복된 조숙(베드로)과 권천례(데레사) 동정부부, 윤유오(야고보), 윤점혜(아가타),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이 참수에 처해졌다. 신앙선조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양근섬에는 순교 상징 조형물 ‘영원으로 가는 사다리’가 세워졌다.
또 다른 순교지는 양평역. 양평역 후문 양일고교 아래 마을 인근은 옛 양근 관아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조상덕(토마스), 장사광(베드로), 손(막달레나) 등이 1801년 신유박해에 옥중 순교했다. 이 두 순교지를 합쳐 기록에 남아있는 순교자는 14명에 이른다.
양평역을 떠나 남쪽을 향하면 다시 신앙선조들의 삶의 발자취가 펼쳐진다. 용인대리구 양평 성당은 양근 지역에서 신앙 선조를 이어 신앙을 지키고 전해온 신자들의 성전이다. 양근의 신자들은 연이은 박해로 겨우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남아있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얻으면서 공소와 본당을 설립하며 지금까지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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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섬 기념경당터]

○ 도곡리
 도곡리 3 번지 조동성 유스티노와 그 아들 조상덕 토마스 순교자를 기리는 경당을 지을 장소로(도곡리 3 번지) 이동해서 조동섬 유스티노와 조상덕 토마스 순교자들의 삶을 배운다. 현 도곡리 244번지는 1911년 이상화 신부가 잠시 사목을 하던 성당이었던 곳이다. 후일 이곳은 조씨 가문의 순교를 기리는 작은 경당이 세워질 예정이다.
조동섬 유스티노는 명례방 사건이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용문사에서 8일간 침묵 피정을 하였고, 1800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년 2월 12일 양근에서 다시 체포되어 서울 금부로 이송 되어서는 2월 26일 배교후 30년 유배형을 받는다. 함경도 무산으로 유배를 간 조동섬 유스티노는 그곳에서 배교를 깊이 뉘우치고, 무산까지 찾아온 정하상 바오로에게 신앙교육과 한문 교육을 가르치고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에 적극 힘써 줄 것을 당부한다.
조상덕 토마스는 아버지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이 없습니다. ” 하면서 양근 관아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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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마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양평읍내에서 양평대교를 건너 44번 국도를 따라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세월초등학교를 지나면 대감마을(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대감A)
길 양편에 마을이 있는데 권철신 형제가 살던 곳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다른 의견이 있다.
대감마을은 초기 한국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형제의 고향이며 녹암계(鹿菴係)가 형성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또한 교회 창설에 앞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거나 토론하던 곳이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복음의 뿌리를 둔 곳이다. 따라서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초기 순교자들과 관계가 깊은 천주교회의 요람지다.
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된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 1769~1802)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에 전국 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은 천주교 신자가 배출되었다. 충청도 내포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 전라도 전주 초남(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대감 마을에 대한 이견 (대감B)
근래 천진암의 변기영 몬시뇰은 권오규 변호사(권일신의 5대손 1900~1996) 등 권씨 후손들의 구전과 다산의 문집 등을 토대로 대감 마을을 양평읍내로 비정하였으며 감호를 양평읍내 북한강 북안으로 보고 있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던 마을은 양평군 강상면 대감 마을이 아니고 양근면 갈산리로, 현재도 갈산리로 부르며,
*양평읍 사무소와 도서관이 있는 곳이라고 하였다. 대감 마을은 안동 권씨 선영, 즉 선산이 있는 곳으로 이 모씨네가 늘 대대로 내려오면서 권씨네 시향제를 차렸었다고 한다.
강북의 양근면 양근리에 연결된 바로 상류지점인 갈산 옆을 흐르는 물결이 늘 맑고 잔잔하여 노 젓는 배를 대기 쉽고 또 권씨네 형제들이 사는 양근리에 붙은 갈산리에 많은 선비들과 손님들이 오고 가므로 갈산 나루까지 있던 강북의 갈산(葛山), 양근(陽根), 덕곡(德谷 : 감호정(鑑湖亭)이 있던 마을)마을의 앞 강물을 감호(鑑湖)라고 불렀고, 그 마을들에 사는 이들이 자연스레 물 맑은 감호에 거한다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감호정은 현재 양근 성지가 있는 일대의 어느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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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감개]

양근의 한강개는 지금의 행정 구역상으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앞에 있던 나루로, 여주ㆍ양평군의 경계에 있는 양자산(704m)과 그 남서쪽의 앵자봉(667m)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합쳐져 흐르는 완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완계천은 바로 양평군과 여주군의 경계이다. 한강개의 동쪽 강안은 양평군 개군면인데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 줄기는 바로 강상면과 개군면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일명 감호(鑒湖)라고도 하였다. 거울처럼 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한강개는 세월리 뿐만 아니라 위쪽 대석리에 있는 대감 마을까지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이 마을은 한강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강에서 직선거리로 약 3km 서쪽에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마을 어귀 언덕(이웃 세월초등학교 뒤편의 언덕)에서 보면 감호가 맑게 펼쳐져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대감 마을의 이름은 대감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한강개가 이화(異化) 작용을 거쳐 한감개로 변하고, 일제 치하 때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다시 대감(大監) 마을 또는 대석리로 변경된 것이라 한다. 현재 대석리 한강개의 도로 위편 북서쪽 100m 지점에 있는 넓은 밭 주변이 권철신 형제가 거처하던 집터로 추정하고 있다. 일설에는 도로 남쪽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집터 뒤로는 효자봉(481m)이 솟아 있는데, 그 남쪽 자락 7부 능선쯤에 위치해 있던 권철신ㆍ일신 형제의 무덤은 1981년 11월 29일에 천진암으로 이장되고 부친 권암의 무덤만 남아 있다.
대석리 한강개는 권철신의 제자로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밀사로 활약하면서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를 입국시킨 후 1795년의 을묘박해로 순교한 윤유일(바오로 1760~1795)과 그의 아우 윤유오(야고보 ?~1801)의 고향이기도 하다. 권철신ㆍ일신 형제가 살던 마을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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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정(鑑湖停)과 감호암(鑑湖岩)

감호정(鑑湖停)은 양평군 양평읍 오빈리 484-4번지 일명 덕구실에 있던 정자다. 양근리 갈산에 살았던 권일신이 감호정이 있었던 덕곡, 덕구실로 이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학문을 좋아하던 권일신이 감호정에 박학다식한 선비들이 자주 모여 시회를 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호정은 학문을 좋아하던 조선의 선비들이 모여 시회를 열던 곳이다.
감호암(鑑湖岩)이란 감호정이 있던 덕구실 한강변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金石文)이다. 다산 정약용의 문집 여유당 전서의 권철신의 묘지명에는 “녹암이 거쳐하던 곳은 감호라고 불렀다” 감호란 거울처럼 맑고 호수처럼 잔잔한 강물이 흐르는 곳이다. 감호암이란 금석문의 발견으로 권철신ㆍ일신이 살았던 유택지(幽宅地)는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대감마을이 아닌 양평읍 양근리 갈산(현 양평읍 사무소 자리)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권철신 묘지명에서 신해박해(1791년)때 동생 권일신이 순교하자 권철신은 “문을 닫고 슬픔을 머금은 채 10여년간 산문(山門:뒤는 박히고 앞은 대문처럼 좁혀진 산 어구) 밖을 나오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러므로 다산이 권철신이 살던 곳을 ‘감호’라고 부른 것과 ‘산문’이 의미하는 지형과 일치하는 현 양평읍 사무소 자리는 권철신ㆍ일신이 살았던 유택지이다. 이는 권일신의 직계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하는 가정의 전승과도 일치한다. 현재 양평읍 사무소 안에는 큰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가물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의 식수용으로 사용되었고, 권철신네 여러 형제들의 많은 문족(門族)들을 비롯한 식객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명문가 이야기’를 쓴 조용헌은 사대부 가문의 특징을 지리적으로 외부에서 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기에 큰 우물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당 대의 대학자였던 권철신ㆍ일신의 유택지인 양평읍 사무소 자리가 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권철신ㆍ일신 형제 학문 토론지 강호암 발견(카톨릭 신문. 2010년)
한국교회의 창설 주역 권철신과 권일신 등이 학문을 토론했다는 감호암(鑑湖岩)이 경기도 양평읍 양근리(구 갈산리)에서 발견됐다. 정약용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감호’는 권철신이 살던 곳으로 이로써 권철신 생가가 ‘양평읍 양근리(구 갈산리)’라는 설이 힘을 얻게 됐다.
발견된 감호암은 경기도 양근성지 인근의 일명 ‘떠드렁산’이라고 불리는 섬에서 약 2km 떨어진 하류지점에서 발견됐는데, 바위에 한자로 ‘감호암(鑑湖岩)’이라고 뚜렷이 새겨져 있다.
신해박해(1791년)때 동생 권일신이 순교하자 권철신은 “문을 닫고 슬픔을 머금은 채, 10여 년간 산문(山門:뒤는 막히고 앞은 대문처럼 좁혀진 산 어귀) 밖을 나오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산문’이 현 양근리와 흡사한 지형을 보이고 있는 점, 그리고 양근 앞 강물을 ‘감호’라고 불렀던 점 등의 이유로 그동안 학계에서는 양근 성지가 위치한 양근리가 권철신의 생가 지역으로 유력시되어 왔다.
이러한 가운데 ‘감호암’이라고 적힌 바위가 양근 인근 지역에서 발견돼 권철신 생가의 위치가 확인된 것이다. 바위 위에는 권철신 형제가 선비들과 시회를 열고 학문을 토론하던 ‘감호정(鑑湖亭)’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만이 자리하고 있다.
권일수 신부(양근 성지 전담)는 “수상성지순례투어 중 몇 사람과 함께 우연히 감호암이라는 바위를 발견했다”며 “초기 신앙공동체가 시작된 이곳은 교회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라고 말했다. 권 신부는 또 “양평읍 사무소 앞 우물자리가 권철신의 가족들과 손님들의 식수가 됐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 말했다.

권철신 암브로시오(1736~1801)
남인(南人) 학자로 초기 천주교 신자의 한 사람. 세례명은 암브로시오. 호는 녹암(鹿菴).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또 제자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에는 북경으로부터 한역서학서가 많이 들어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권철신은 1777년 자기 고향 양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을 주도하고, 이벽(李檗), 제자인 정약전(丁若銓) 등과 같이 서학(西學)의 종교서적을 놓고 천주(天主)의 존재, 인생의 기본문제 등에 관해 연구회를 가졌다.
연구 결과 그들은 천주교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천주교 계명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을 제외하면 그것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과 같이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학덕이 높은 학자를 포섭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으로 1784년 9월(음) 먼저 양근의 권씨를 찾아가 입교를 권고하였다. 셋째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권철신은 처음에는 좀 주저했으나 결국 입교하였다. 그 후 권일신은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으나 권철신은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고 또 천주교 일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집에서 학문과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천주교 반대파들은 통문(通文)으로 때로는 혹은 상소로 그를 천주교 두목으로 몰았으나 정조(正祖)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이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권철신도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과 같이 잡혀 국문을 받았다. 그는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거부했고 마침내는 매를 맞아 2월 22일(음) 66세로 옥사하였다. 달레는 그를 순교자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황사영의 백서를 근거로 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의 말과 같이 2월 15일(음) 이전 사건에 관한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92)
한국 천주교의 창설을 주도한 3대 인물의 하나. 세례명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호는 이암(移庵). 조선조 중기의 실학자 안정복의 사위이며 권철신의 아우. 1784년 9월(음) 이벽의 권유로 즉시 천주교에 입교, 천주교의 열렬한 전파자가 되었으며 특히 제자 중 이존창과 유항검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호서ㆍ호남 지방에까지 전하였다.
1785년 명례방 김범우 집에서 종교집회를 가졌을 때 권일신도 그의 아들 권상문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때 형조관리에게 발각되어 검거되고 성물이 압수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중 김범우만 형벌을 받고 권일신 등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라 훈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형조로 들어가 성상(聖像)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뒤 그는 소위 가성직제도 때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되어 한때 성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의 여파로 홍낙안 등이 권일신을 천주교의 교주라고 고발해서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심한 고문에도 배교치 않아 사형시킬 것을 상소하였지만 정조는 사형을 허락지 않고 제주도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였다. 옥에서 나와 유배지로 떠나기에 앞서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형조에서는 그에게 팔순 노모에 대한 불효를 구실로 유혹하였으므로 그는 이에 굴복하였다. 그리하여 감형되어 예산에 유배키로 되었다. 그는 노모를 만나 본 뒤 유배지로 가는 도중 옥에서 받은 상처로 객사하였다. 때는 1792년 봄이었다.

조동섬 유스티노(1738∼1830)
세례명 유스티노. 양근(楊根) 출신의 덕망 높은 한학자. 입교한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초기 교회의 열렬한 신자로 손꼽힌다. 1800년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801년 2월 12일에 다시 체포되어 배교하였으므로 30년 유배형(流配形)을 받아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자신의 배교를 뉘우치고, 더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고, 훗날 정하상이 찾아왔을 때, 그의 신앙을 굳게 할 것을 격려하면서 교회 재건과 신부 영입을 위해 크게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고 한다. 1830년 8월 2일(음 6월 14일) 92세까지 장수하면서 유배지에서 죽었다.

용문산으로 가는 이유 ?
권일신, 조동섬이 용문산에서 침묵과 잠심(어떤 일에 마음을 두어 깊이 생각함 )으로 8일 동안 자발적 피정을 하셨다고 합니다.




천진암

한국 초기 가톨릭교 신자였던 이벽·권철신 등이 최초로 가톨릭 교리를 강론하던 가톨릭교 성지.
1779년(정조 3) 학자 권철신은 경기 여주시 금사면(金沙面)에 있던 주어사(走魚寺)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하던 중 정약용 등과 함께 강학회(講學會)라는 학문 강의 모임을 가졌다.
그후 장소를 천진암으로 옮겨 10여 일 동안 강학회를 계속하였는데, 이때 참석한 대표적인 사람은 권철신·정약용·이벽·정약전·정약종·이승훈 등이었다. 이 강학회에서 이벽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정약종은 ‘십계명가(十誡命歌)’를 지었으며 삼종기도(三鐘祈禱) 대신 주자의 사물잠(四勿箴) 같은 것을 경문으로 삼아 외우기도 하였다.
가톨릭의 교리를 탐구·신봉·실천·전파하기 시작한 것은 이 강학회를 계기로 비롯되었지만, 이 강학회가 처음부터 가톨릭의 교리 연구만을 위하여 계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천주학(天主學)을 하나의 단순한 학문에서 종교에로 이끈 동기가 되었는데, 이 일에는 특히 이벽의 역할이 컸다.
결국 천진암 강학회는 서학을 서교로, 천주학을 천주교로, 즉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변환시킨 일대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천진암은 경기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 있는 사찰 터로서 현재는 이벽·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승훈·정약종의 묘소가 이장되어 있으며 성역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순교자

복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복자 권 데레사(1784∼1819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아마도 포도청에서 죽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광희문을 거쳐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 다리 인근에서 강물에 버려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복자 윤유오 야고보( ? ∼1801년)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윤유오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복자 윤점혜 아가타( ? ∼1801년)  
윤점혜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때부터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복자 윤운혜 루치아( ? ∼1801년) 
윤운혜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그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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