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4-
■순례지 : ○ 도척성당 : 10시미사
○ 시어골, 사기소
○ 소틔, 진말, 가래실, 노루목, 바위성골, 텃골
○ 둔전리, 전대리
○ 오산소공소, 사기막
○ 김수환추기경 묘소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4. 24.(일)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조화수
- 김광자
- 전춘화
- 김기혁 (자료정리)
신앙유적지답사
도척성당-시어골-사기소-소틔, 진말, 가래실, 노루목, 바위성골, 텃골
-둔전리, 전대리-오산소공소, 사기막- 김수환추기경 묘소-양화진(18:00)
도척성당(031) 761-5146 FAX (031) 763-8298
/시어골 공소 회장 이찬우 베드로 (031) 762-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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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소공소와 사기막교우촌
병인박해 이전의 형성된 성소의 못자리요 순교자의 탄생지 교우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는 해주 오씨(海州吳氏) 집성촌으로 입향조 오희문을 비롯하여 후손들의 산소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오산이라 함은 오씨 문중의 산이라는 뜻으로 오산수·오산수골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해주 오씨의 본향으로 해주 오씨 묘역과 시조단이 있다. 천주교 공원묘원이 있으며, 사기막에는 천주교 공소와 교우촌이 있었는데 박해 시절에 형성된 곳이다.
오산소 공소의 행정 구역상 이름은 오산리 사기막(砂器幕)으로 이곳에는 윗사기막(윗골)•사기막•아래 사기막 등 세 마을이 있었다. 그중 공소의 중심지는 사기막이었는데, 가장 큰 마을인 아래 사기막은 법화산(385m)의 가파른 계곡을 뒤로 하고 있어 ‘낭떠러지’라고도 불리었다.(Le Gac 신부 보고서, 1910년). 이 사기막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91년 무렵이었다. 1986년 이곳 공소가 폐지되기 전까지 제16대 공소 회장을 맡았던 유호종(劉浩鐘 알비노, 1937년생, 유재덕 회장의 차남, 현 신갈 거주, 2015년 9월 18일 홈지기와 면담)씨에 의하면, 이곳 교우촌을 처음에 이룩한 신자 집안은 유(劉)씨네(본관 강릉) • 유(柳)씨네(柳秀徹 신부 집안) • 曺씨네(본관 창령) 등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박해 말기 충청도 청양(靑陽)과 옥천(沃川) 고향을 떠나 경기도 화성군 봉담면 갓등이[旺林]에서 일시 생활하다가 사기막에 정착한 것이었다. 그중 유(劉)씨네는 성인 유대철(베드로) 집안이었다고 하는데, 구전에 의한 것이어서 정확한 사실을 알 수가 없다.
사기막 교우촌의 신자들은 이곳에 정착한 이후 화전 등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갔지만, 신앙생활만은 매우 열성적이었음이 기록에 엿보인다. 신자들의 정착 5년만인 1896년에 이미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姜道永,마르코)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된 것도 그러한 열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때의 정식 명칭이 바로 ‘오산소 공소’였다. 한편 이곳 신자들은 1910년 4월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소 강당을 마련하게 되는데, 이때 이곳을 축성한 하우현 본당의 르각(Le Gac,郭元良) 신부는 그 기쁨을 다음과 같이 뮈텔 주교에게 전하고 있다.
“마침내 저의 거처(하우현)에서 남으로 50리 되는 곳 오산소(용인)에서 강당 짓는 것을 마쳤습니다. 이 집은 신자 수에 알맞게 지어졌습니다. 저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두세 마을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이 집에서 일련의 장기적 교육도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항상 같은 지역에 있게 될 것이고 여러 마을의 교우들도 이곳에 쉽게 모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강당에는 아주 보잘 것 없지만 신자들이 제게 마련해준 작은 방 하나가 있는 데,이것은 앞으로 있을 정기적인 오산소 공소 방문시에 편리할 것입니다.”
유호종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공소(오산리 462번지)는 초가 공소였는데, 1920년의 대홍수로 유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에 낙담하지 않고 그해 7월25일에는 사기막 429번지에 초가 10간의 공소 건물을 다시 건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12월 30일에는 용인 본당의 김효신(金考信, 마티아) 신부와 오스트리아 후윈회의 지원에 힘입어 그 자리에 양옥 강당(32평)을 준공하고 다음 해 1월 7일 당시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주교를 맞이하여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오산소 공소가 이 일대 교우촌 신자들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미 1898년경 부터였다.〈교세 통계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자료를 볼 때도 이곳 신자수가 1896년에 20명, 1897년에 36명이었던 것이 1898년에는 갑자기 125명으로 증가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빈양이 • 조당골 • 소리 등 이웃 교우촌 신자들이 이곳에서 공소를 치루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 신부는 오산소와 사기막(아래 사기막)에서 두 번의 공소를 치루게 되었다. 이곳에 모이는 신자수가 많아진 반면에 이들을 수용할 강당이 아직 마련되어있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때(1900년, 1901년) 그는 이웃의 소리에서도 공소를 치룬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신자 수는 28명이었다.
그후 1909년에 이르러 오산소 공소는 하우현 본당에 있던 르각 신부의 방문을 받게 되었으며,다음 해에 이르러는 첫 공소 강당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강당이 마련됨으로써 오산소 공소는 크게 번창한 것으로 나타난다. 1909년에만 해도 오산소(사기막 58명)와 낭떠러지 공소(118명)를 합쳐 176명이었던 신자수가 1910년에는 348명으로 증가하였고,새로 마련된 강당 한 곳에 이들을 모두 수용하게 된 것이다. 홋날의 증언에 따르면 ‘‘이웃 마을의 신자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숙식을 하며 미사에 참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모이던 신자들은 1920년대 이후 점차 줄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웃 공소에서 강당을 마련하게 되었고, 일제 치하에서 생계 수단인 화전 • 담배 농사에 대한 여러 제약이 있게 됨에 따라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한 때문인 듯하다.
오산소 공소가 이렇게 그 명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신자들과 함께 공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한 여러 회장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들 집안에서 많은 성직자들이 배출되어,작은 교우촌으로 시작된 오산소 공소는 드물게 보이는 성소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우선 이곳 출신 성직자들을 살펴보면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김경민(金景旻,루도비코) 신부,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신부, 양병묵(楊炳默 루가) 신부 등 4명이 있는데,오산소 공소와 관련이 있는 신부들은 이밖에도 여러 명이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생존해 있지 않다. 유수철 신부는 1977년에 지병으로 사망했고, 양병묵 신부(수원교구 부교구장)는 2014년 5월 20일 선종하고, 유재옥 신부와 김경민 신부는 6 25때 순교 하거나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오산소 공소는 1986년 골프장 88컨트리클럽 기공으로 매몰되고 신자들도 모두 그곳을 떠나 이제는 사기막과 아래사기막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섰고, 윗사기막과 공소터는 88컨트리클럽내에 위치하여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순교자
◆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1898∼1950.10. 5) 신부 <근·현대 신앙의 증인 81위>
유재옥 신부는 오산소 공소 유호종 16대 회장의 백부로 1898년 1월 19일 수원 갓등이에서 유장열(劉章烈, 요한:제4대 공소 회장)과 柳 바울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용인의 오산소에서 보냈다. 남달리 신심이 깊었던 그의 부친 유 요한은 아들 4형제 중 한 명만이라도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하였는데, 그중에서 유 신부가 부친의 뜻을 받들어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후 1925년 6월 6일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유 신부는 개성 본당의 보좌신부, 양양 본당의 주임신부(1927년 6월)를 역임하고,1939년 7월 20일에는 황해도 송림(松林)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곳에 부임한 이후 그는 성당 건축과 교세 확대에 힘쓰면서 성소 계발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황해도 천주교회사, pp539∼543). 그러나 이 본당이 그에게는 마지막 본당이 되고 말았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던 날, 유재옥 신부는 겸이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유는 평양교구의 메리놀 외방선교회 미국인 신부들과 연락해서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유 신부는 이듬해 4월 18일 138일 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8.15광복 후 북한 당국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더니, 1950년 6월 24일, 유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납치, 수감되었다가 1주일 후 해주(海州)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 해 10월 4일 유 신부는 수감자들과 함께 동해주 해변으로 끌려가 자신들이 생매장 당할 구덩이를 팠고, 이튿날 새벽에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어 순교하였다.
유재옥 신부가 신학생일 때 다니던 공소가 바로 1910년에 설립한 첫 공소 강당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부지를 구입하여 어떤 표지를 하는 것이 비록 이곳을 떠났지만 오산소 공소 교우들의 바램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청덕동 산13-12에 있는 유씨 가족묘에는 유재옥 신부의 가묘가 설치하여 유 신부의 순교를 기억하고 있다.
◆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
유재옥 신부와 마찬가지로 김경민 신부도 6월 24일 공산당원에게 피랍되었다. 용문 성당 제6대 주임과 1943년 황해도 재령 본당 6대 주임을 역임한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는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황해도 안악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에 김 신부는 안악 정치보위부에 의해 연행된 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유엔군 북진으로 북괴당국이 후퇴할 때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오산소 공소는 한편으로 성소의 못자리요, 다른 한편으로는 순교자의 탄생지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사라지고 말았지만,이곳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한 이곳은 영원한 복음의 남은 자리가 된 것이라 믿는다. (자료출처: 순교의맥을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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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척성당+ 시어골+ 노곡리
김대건 신부가 직접 사목한 교우촌 마을들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노곡리 지역은 산세가 험준한 태화산을 중심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한 천주교 신자들이 일찍부터 교우촌을 형성하며 신앙생활을 영위하던 곳이다. 특히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경기 용인의 골배마실에 인접한 은이 공소에 잠시 머물며 인근공소 교우들을 사목할 때 직접 전교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에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0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 등과 함께 충청도 강경을 통해 해상으로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해 11월부터 다음 해인 1846년 4월까지 약 6개월간 서울과 경기도의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입국 직후 페레올 주교가 서울에 정착하기 전까지 대략 2개월 정도를 주로 서울에서 활동을 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김 신부가 1846년 초부터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로 가서 그곳을 중심으로 광주, 이천 등 인접 고을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성사를 집행하거나 교리를 가르친 기간은 대략 4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이 기간 중에 김대건 신부가 사목 방문한 곳을 《79위 시복 조사 증거서》에 나오는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 살펴보면, 용인, 양지의 터골, 이천의 동산 밑과 단내 등으로 드러난다.
사목 방문 지역의 북쪽 한계 지역은 이미 1830년대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의 사목 방문 지역이었던 태화산 주위의 여러 교우촌들이 김대건 신부의 공소 방문 권역 내에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어골 이찬우 베드로 공소 회장은 김대건 신부가 태화산 주변 광주 도척면 시어골에도 방문하였다는 구전을 전해 주었다.
박해 시대의 순교자 증언록 등에는 김대건 신부의 사목 지역으로 노곡리, 시어골 등이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약 4개월 동안의 부활 판공을 겸해 성사를 집전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의 수원교구에 해당되는 지역 중에서도 이들 노곡리나 시어골, 사리틔를 포함하여 용인, 광주, 이천 등 3개 고을에 걸친 다수의 교우촌들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도척면은 앞고지 성당 관할로서 솟티(소틔), 진말, 가래실, 노루목, 바위산골(바위성골), 텃골 외에 상림리에 사기소와 시어골 등의 공소가 있었다. 이 주변 지역이 초기 천주교회의 중요한 사적지이나 점차 잊혀져 가는 것 같다. 본당 구역 내에 시어골이라는 곳과 그 주변 지역을 김대건 신부가 경유해서 전교 활동을 하였다는 구전을 간혹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 건축한 지 약 50년 된 시어골 공소는 강당이 현재 남아 있으나 개인에게 임대된 상태이며, 공소 예절은 없다. 도척 성당과 시어골 중간 지점에 있는 사기소 공소는 도척 성당 건축 시에 철거하고 종탑 철골만 남아 있었으나 2008년에는 그나마도 철거하여 이제는 흔적이 없다.
▒ 주변 공소와 교우촌터
○ 추곡리(가래실) 공소(1832) : 경기 광주시 도척면 추곡리, 가래실은 추곡저수지 위쪽 마을이다.
○ 바위성골 공소(1850) : 경기 광주시 도척면 유정리, 바위성골은 유정저수지 하류 '작은 안나의 집' 주변이다.
○ 사기소 공소(1865) : 경기 광주시 도척면 상림1리, 도척 성당에서 시어골 방면으로 약1km 거리 사기소교 건너편에 있다
○ 솟티 공소(1870) : 경기 광주시 도척면 진우리, 솟티골은 진우저수지를 약 1km 지나 중부고속도로 밑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맞은편 산골짜기이다.
○ 시어골 공소(1887) : 경기 광주시 도척면 상림1리, 시어골은 상림1리 끝 마을이다.
◆ 도척성당 (都尺聖堂)과 공소들
1977년 12월 16일 광주성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1920년대 초 광주군 내 공소는 서울 명동성당(당시 종현성당), 수원 의왕면 하우현 성당, 용인 포곡면 앞고지[前垈里]성당의 관할로 분할되어 있었다. 도척면은 앞고지 성당 관할로서 소틔, 진말, 가래실, 노루목, 바위성골, 텃골 외에 상림리에 사기소와 시어골 등의 공소가 있었다. 1927년 앞고지 성당의 폐지와 함께 용인군 내사면(지금의 용인시 양지면)에 남곡리 성당이 설립되어, 도척면 내 공소는 남곡리 성당 관할이 되었다.
1940년 11월에는 이천성당이 창설되어, 소틔·진말·사기소·추곡리·유정리 등 여러 공소를 다시 관할하였다. 그 당시 이천 성당 관할지역은 대부분 광주 지방으로서, 그중에서도 도척면에 신자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는데, 사기소와 시어골은 신자수 100명 이상의 큰 공소였다.
그 후 1958년 6월 경안 성당(지금의 광주 성당)이 설립되면서 광주시 내 공소는 경안 성당 소속이 되었고, 마침내 1977년 12월 도척면 노곡리 공소가 광주 성당에서 분리되어 성당으로 승격하였다. 서울과 수원교구 소속 여러 성당의 도움으로 1979년 9월 29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 축성하고 1988년 12월에는 교육관을 신축하는 한편, 사제관 옥상에 수녀원을 증축하여 1990년 7월 봉헌식을 가졌다. (자료출처:순교의맥을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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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추기경 묘소
김수환(1922~ ). 서울 대교구장. 대주교. 추기경. 세례명 스테파노. 본관은 광산(光山).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여 1941년 동성상업학교 을조(東星商業學校乙組)[소신학교 과정, 성신중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도일(渡日), 조오찌(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중 일제에 의해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고 이 대 동남아 일대에서 여러 번 사선을 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성신대학(聖神大學)[가톨릭대학의 전신]에 입학, 사제수업을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에서 대구교구 사제로 서품되어 경북 안동본당 주임신부로 첫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대구교구장 비서, 대구교구 재경부장, 해성병원장, 1955년 경북 김천본당 주임신부, 김천 성의중고등학교 교장, 대구교구 평의원을 역임한 후 독일 뮌스터(Munster)대학에 유학, 동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였다. 1964년 귀국하여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후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5월 29일 주교로 성성되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하자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임되었고 이듬해 3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되어 4월 30일 로마에서 산 펠리체(Titolo di San Felice da Cantalice a Cenella) 명의 추기경으로 서임식을 가졌다. 그 후 1970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과 여러 분과위원장을 역임하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역임했으며 1974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미국 노트르담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0년 과도정부의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에 따라 가난하고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하여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보수적인 주교단의 제동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치현실과 노동문제에 강경발언을 서슴지 않아 대내외적으로 인권옹호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동선의 추구로, 모든 사회구조나 정치형태는 공동선을 추구함에 있어 평등적 권익으로 보장하고 특권의식과 배금주의를 버리며 혁신과 정화의 근본이 되는 인간내면의 회심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교회는 이러한 공동선의 추구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의 사회교리에 대한 의식으로 한국 천주교회는 제3공화국 이후 현재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받아 왔지만 그 희생과 고난의 대가로 한국 천주교회는 대내외적으로 지위가 크게 격상되었고 또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종교로서의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자료출처: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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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명 스테파노.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1944년 1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8·15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7년 가톨릭대학의 전신인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하고 1951년에 졸업,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후 안동 천주교회에서 주임신부로 사제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1953~55년 대구 대주교의 비서신부·재정부장, 해성병원 원장을 지냈다. 1953년에는 대구교구가 설립재단인 김천시 성의(聖義)중·고등학교 교장과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의 주임신부를 겸임했다.
1956년 10월 독일에 유학하여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 귀국했으며, 그해 1964년 6월부터 2년 동안 주간 가톨릭 시보 사장을 지냈다. 1966년 2월 15일 마산교구의 주교로 서임되었으며, 5월 31일 마산교구장으로 서품되었다.
196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 쇄신의 기류 속에서 노기남(盧基南) 대주교의 뒤를 이었다. 1969년 4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당시 전세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70~75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1차 부임했다.
1970년에서 3년간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으로 재임했고, 1981~87년까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으로 2차 부임했다.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1977년 5월 미국 노틀담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88년 11월 일본 조치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90년 5월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1990년 10월 미국 시튼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1994년 연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1995년 타이완 푸젠 가톨릭대학교 명예철학박사, 1999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 취임의 자리에서 그는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라고 말함으로써 교회쇄신과 현실참여의 원칙을 분명히 했다.
또한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교적인 양심으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교회는 정치적·사회적인 권력보다 인간 존엄성의 가치를 근본적인 신념으로 삼아 사회와 인류 안에서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종교적 현실 참여를 강조했다. 따라서 교회는 절대로 불의와 부정과 타협하는 교회 공동체가 아닌 인간 모두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 내면의 회심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과도기의 혼란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즉 물질만능주의의 현대 사회를 염려하여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 서로 밥이 되어주는 길이 인간회복의 길이며 민주화의 길임을 호소하여 사회인사들을 각성시켰고 소외계층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또한 아시아 주교회의와 세계 주교회의에 참석하여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100만 신도가 운집하고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 2세가 집전한 가운데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성회를 개최, 세계 최초로 교황청 밖의 시성식을 열어 한국의 순교자 103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으며, 1989년 10월 9일에는 교황과 세계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주제로 가톨릭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적 행사인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 103위 성인). 이 자리에서는 또한 헌혈, 안구·장기(臟器) 등의 기증으로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근본적인 나눔의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만에 은퇴하였다.
은퇴 이후 북방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2002년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여 북한선교를 위해서도 애썼다. 2005년 4월 8일 바티칸에서 집전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장례미사에 참석하였고, 24일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에서는 공동집전을 맡아 한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2007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오다가, 2009년 2월 16일 호흡 곤란과 혈압 저하로 인해 87세로 선종(善終)하였다.
빈소는 명동성당에 마련되었고, 장례는 닷새간의 일정으로 치러졌는데 이 기간에 시신이 유리관에 보관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20일 오전 가톨릭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이 교황특사 자격으로 장례미사를 집전한 뒤, 같은 날 오후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전에 생명 연장만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도록 당부함으로써, 산소호흡기나 심폐소생술 등의 처치를 받지 않고 생을 마쳤다.
이러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존엄사 논란은 물론, 국내 첫 존엄사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다. 장기기증 서약에 따라 선종 직후 안구 적출수술을 받았으며, 장례 절차 등도 '다른 신부와 달리 특별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추기경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졌다. 선종 이후 그를 추모하는 국민들의 열기가 뜨거워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이 40만 명에 이르렀으며, 장기 기증 서약도 확산되었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제13회 십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 공로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사회정의〉·〈평화를 위한 기도〉·〈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