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6-
■순례지 : ○ 여주성당, 관아터, 순교터
○ 여주 주어사터
○ 여주 부엉골 신학교터
○ 여주 점뜰마을
○ 여주 도전리공소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6. 25.(토)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김광자
- 전춘호
- 김기혁 (자료정리)
신앙유적지답사
여주성당
2004년 9월 순교자성월에 여주성당 경내에 세우진 여주 순교자 현양비.
초기 신앙선조들이 하느님을 배우기 위해 넘었던 앵자산이 자리한 여주. 용인대리구 여주본당은 순교자들이 피 흘리며 신앙을 지킨 이 땅에 공동체를 이루며 자리잡았다.일찍이 신앙선조들은 천진암과 주어사를 찾아가기 위해 여주 지역을 지나갔지만 이것이 여주지역 신앙전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알기 어렵다.다만 1801년 신유박해부터 여주 지역에서 신자들이 붙잡히고 순교한 기록을 볼 때 박해시기에 이미 신자들이 여주지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확인된 여주지역 순교자만도 11명에 이른다. 본당은 순교자들이 부활잔치를 벌였던 양섬과 순교한 비각거리에 기념비와 현양비를 세우고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여주지역 신앙여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박해시대부터 이어오는 공소들과 부엉골 신학교다. 여주 북내면 중암리의 완장이공소와 강천면 도전리의 원심이공소 등은 여주지역의 초기 신앙을 이끌던 주역이었다. 아직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1885년에는 강천면 부평리의 부엉골에 신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신학교는 불과 2년 후 서울 용산구 원효로로 이전했지만, 신학교에 상주하던 사제의 사목활동으로 여주지역에 신앙이 깊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본당이 설립되던 1950년 당시, 성당이 자리한 여주읍내에는 천주교 신자라고는 3세대뿐이었다. 지역은 여주읍에 위치했지만, 여주지역 공소 중 오감·독바위·학동공소가 본당 공동체의 모체가 됐다. 본당 설립의 기쁨도 잠시, 본당은 주임신부가 부임한 지 2달 만에 6·25전쟁으로 군종신부로 파견되면서 다시 3년 동안 공소가 됐다.1953년 휴전 이후 다시 주임신부가 파견됐다. 본당은 마라우고개의 한옥을 구입해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전쟁으로 지역이 폐허와 다름 없었다. 이에 지금의 성당 터인 하리에 1000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주한미군의 원조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1954년 성전을 건립할 수 있었다. 이때 본당 신자는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본당은 성전신축과 함께 유치원도 세웠다. 당시 여주에는 유치원이 없었기에 성당 건축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원아들이 모였다. 본당은 유치원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본받아 참 인간을 육성하고자 했다. 본당 부설 소화유치원은 지금도 여주지역의 어린이들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여주 관아 남문 밖 순교지
여주는 우리나라 복음화 여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못자리다. 1779년 권철신(암브로시오 1736~1801) 주도로 이뤄진 한역서학서 강학이 이뤄진 주어사 터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124위 중 5위가 피를 흘린 순교의 땅이다.
특히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하품리 주어사 터는 최근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 교구신도회가 천주교 강학이 이뤄진 역사의 터전으로 복원에 나서 종교 간 화합의 본보기가 될 전망이다.
124위 중 여주 출신 순교자는 9위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1752∼1801) 신부 영입에 크게 기여한 한국천주교회 밀사 윤유일 바오로(1760∼1795)이 첫 손가락에 꼽히고, 동생 윤유오 야고보(?∼1801)도 있다.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ㆍ조이 바르바라(1790∼1840) 부녀, 정광수 바르나바(?∼1802)ㆍ순매 바르바라(1777∼1801) 남매, 교회 설립시기에 활동한 이현 안토니오(?∼1801), 사촌 사이인 이중배 마르티노(?∼1801)와 원경도 요한(1774∼1801)도 여주 출신이다. 이 가운데 여주 출신으로 여주에서 순교한 순교자는 최창주ㆍ이중배ㆍ원경도ㆍ정광수ㆍ정순매 등 5위다. 윤유일은 포도청에서, 윤유오는 양근(오늘의 양평)에서, 이현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최조이는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다.
순교신심이 깃든 도시
지금도 그리 크지 않은 인구가 11만 명이 채 못되는 소도시 여주에서 이렇게 많은 순교자를 낸 건 어째서일까? 한역서학서 강학에서 비롯된 연면한 신앙의 전통이 오늘날 순교의 땅 여주를 있게 한 듯하다. 여주 출신 순교자는 124위에 포함된 9위를 포함해 모두 19위에 이르고, 인근 양근 출신 조용삼 베드로(?∼1801)까지 포함하면 20위에 이른다.
여주본당과 여주시가 2009년 여주시 여흥로 105번길 일대에 세운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
이들을 기려 여주본당과 여주시는 2009년 6월 현재 여주시 여흥로 105번길(홍문동 48-7)에 가로 150㎝에 세로 220㎝, 폭 70㎝ 크기의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를 세웠다. 최종철 스테파노(여주대 건축학과) 교수의 작품으로, ‘순교자 찬가’와 여주 출신 순교자 20위 명단을 한글로 새겨 넣었다. 화강석 상단부에 오석을 배치, 죄수 목에 씌우던 칼 형상으로 형상화한 이미지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다만 현재 비석이 세워진 곳은 물론 정확한 순교터가 아니다. 정확한 순교터는 이기경의 벽위편(闢衛編)에서 여주 관아 문에서 남쪽으로 1리쯤 떨어진 큰 길가에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들을 법률에 따라 참수했다고 기록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옛 비각거리 인근 대로변 이다.
우연히 장터에서 만나 순교치명기념비까지 함께한 임종화 에드워드(북여주본당)씨는 지금은 비각이 남한강변 여주대교 건너 영월루로 옮겨갔지만, 이들 순교자들은 당시 옛 비각거리 대로변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방도로를 내면서 길도 넓히고 비각도 이전하면서 전보다 길을 넓혔다고 귀띔했다.
살아 숨쉬는 순교자의 삶
빗돌에 새겨진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이들의 삶을 떠올렸다. 경기도 여주 양반 집안 출신인 이중배와 원경도는 양반의 특권을 포기하고 신앙의 길을 걸은 인물들. 소론(少論) 출신 이중배의 신앙생활이 길었던 것도 아니다. 이중배가 노론(老論) 출신 천주교 신자인 김건순 요사팟(1776∼1801)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것이 1797년이니 신앙을 접한 지 불과 4년 만에 순교한 셈이다. 원경도 또한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온 가족을 입교시켰으며 최창주 마르첼리노(1749∼1801)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황사영 백서 8행에 나오는 이중배와 원경도에 관한 기록은 유명하다. 1800년 경신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두메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날이 저물도록 큰 소리로 희락경( 부활삼종기도의 옛말)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며 부활의 기쁨을 누렸던 것. 이 사건으로 이중배와 원경도 그 일행, 최창주 등이 체포돼 여주에서 순교했다.
여주 부곡(현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도곡리) 양반 집안 출신인 정광수는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인물로 입교 이후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살던 윤운혜와 혼인한 뒤 서울로 이주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천주교 공동체 내에서 교회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으며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과 성모님 상본이나 묵주를 제작해 신자들에게 판매하거나 나눠줬다. 가까운 교우들과는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했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됐으며 고향 여주로 끌려가 순교했다. 초기 조선교회에서 특별한 위상을 갖고 있던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이던 정순매 또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가혹한 문초와 형벌 가운데서도 뛰어난 용덕을 보여주고 여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여주 주어사 터
주어사(走魚寺)는 여주군 산북면 하품2리(점란산골) 앵자봉 서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정확한 창건 및 폐사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한 승려가 절터를 찾던 중 잉어를 따라 가던 꿈을 꾸고 얻은 터라는 창건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리고 1779년(정조 3) 권철신의 주도 아래 한역서학서의 강학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나라 천주교의 요람지로서 주목받아 오고 있다. 당시 강학에 참석하였던 사람으로는 정약용을 비롯하여 정약전ㆍ김원성ㆍ권상학ㆍ이총억 등이 있었고, 후에 한국 천주교의 성조인 이벽이 가담하였다.
이처럼 주어사는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의 요람지로서 그동안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성격이 제대로 조명이 되지 않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주의 종교관련 문화재이다.
19세기 중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어사는 그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이후 1960년대 초에 남상철의 노력으로 천주교 강학과 관련한 주어사의 위치가 밝혀졌으며 1970년대부터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주어사지가 속한 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매입 또는 불하하여 관리하고 있다.
해운당대사의징지비와 출토 유물의 성격으로 볼 때 조선시대 중기부터는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후반 주어사에서 천주교 강학이 이루어졌음을 그간의 여러 사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주어사는 조선후기 진보적인 남인 실학자인 권철신이 그의 동료들ㆍ제자들ㆍ아우들 등과 함께 강학을 하며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사상 체계를 모색하던 중요한 자리였다. 그들은 도덕적 쇄신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을 논의의 주된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할 새로운 유교사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진유학에 근거하여 각종 철학적 원리들을 설명하고 있는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도 일부 연구함으로써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주어사는 천주교 신앙이 싹튼 자리이자 신앙의 요람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주어사 터는 교회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민족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적지라고 하겠다.
여주 부엉골 신학교터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581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소재한 부엉골은 1882년에 공소가 설정된 곳이며, 1885년 개교한 예수 성심 신학교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부엉골은 박해기의 배티, 배론 신학교 등을 계승한 신학교 터로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을 있게 한 모태이다. 성소의 못자리를 태동케 한 거룩한 땅이다.
부엉골에 신자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박해 이후에 교우촌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2년에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에 의해 공소로 설정되었다. 로베르 신부는 그 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요한) 주교의 명에 따라 신학교 교사와 사제관 겸 성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두막 두 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이어 블랑 주교는 새로 입국한 마라발(Maraval 徐若瑟, 1860~1916 요셉) 신부를 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임명하였고, 1885년 10월 28일자로 소신학교를 개교함과 동시에 그 이름을 예수성심신학교로 명명하였다.
블랑 주교는 당시 국내 사정이 여전히 불안할 뿐만 아니라 인원도 부족해서 신학교의 설립을 망설이고 있었으나 페낭 신학교의 한국 학생들이 그곳의 기후와 풍토를 이겨 내지 못해 그곳에서의 철수가 시급해졌고 이미 1884년에 일부가 귀국함에 따라 신학교의 설립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페낭 신학교에 보관된 자료에 의하면 1884년에 전 안드레아, 이내수(李迺秀 1862~1900 아우구스티노), 한기근(韓基根 1867~1939 바오로)이 귀국했고 이듬해에 최태종 루카가 귀국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서둘러 개교한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교장 서 요셉(마라발) 신부가 홀로 교수직을 맡고 페낭에서 돌아온 학생 4명, 조선에서 입학한 3명을 포함해 모두 7명의 신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부엉골 신학교는 그리 오래 운영되지는 못하였다. 시설이 좋지 않은데다 학생 수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동안 콜레라로 인해 한문 교사 한명과 학생 한명이 사망하였다. 1886년 6월 6일 한불 조약이 체결 비준되면서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묵인하게 되자 블랑 주교는 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개교 후 2년이 지난 1887년 3월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용산 함벽정(涵碧亭 현 용산구 원효로 4가)으로 옮겨졌다.
한편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부엉골 공소는 신학교의 본당 격으로 승격되었으며 교세도 점점 확대되어 갔으나 신학교 이전과 동시에 공소로 바뀌었다가 1889년 르비엘(Le Viel 申三德, 1863~1893 에밀리오) 신부에 의해 다시 본당이 되어, 마르탱(Martin 沈良, 1866~? 레옹) 신부, 부이용(Bouillon 任加彌, 1869~1947 가밀로) 신부 등에 의해 본당이 유지되었으나 1900년 초에 이르러 폐쇄되어 점차 교우촌의 흔적이 사라지게 되었다.
페낭 신학교 출신의 한국인 사제들
페낭 신학교는 1808년 파리외방전교회가 말라카 해협 북부에 있는 페낭(Penang) 섬에 세운 신학교로 한때 아시아 지역 사제 양성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1854년 초 당시 조선 교회의 장상이던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배티 신학교의 이만돌 바울리노, 김 요한, 임 빈첸시오 등 3명이 유학길에 올라 1855년 6월 페낭 신학교에 도착한 것을 필두로 개항 이후 블랑 주교가 강성삼, 이내수 등 7명을 다시 페낭 신학교로 보내는 등 1882년부터 1884년까지 모두 22명의 유학생이 페낭으로 파견되었다가 1892년 뮈텔 주교의 소환령에 따라 모두 국내로 귀국하였다.
이들 중에서 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한기근, 김성학, 이내수, 김원영, 홍병철, 이종국, 김양홍, 김문옥, 김승연 등 모두 12명이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에서 나머지 신학교 수업을 마친 후 1896년부터 1900년 사이에 사제품을 받았다고 한다.
부엉골 신학교 터의 위치
한국 가톨릭 신학 교육사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사에서도 반드시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 중요한 사적지는 불행하게도 그 위치를 정확히 밝혀 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때문에 그 위치는 교회 내에서 전해오는 단편적 기록과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회 내에서 논의되어 온 위치는 이상은씨의 증언에 기초했던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589번지 일대와 그후 새로운 증언자인 이은구씨에 확인된 581번지 일대였다.
강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589번지 일대는 한강의 지맥과 연결되는 계곡의 입구 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아직 경작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그 경작지 내에서는 도기 파편들이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 더욱이 집터로 추정되는 단단한 지반들이 대여섯 군데 발견되어 교우촌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만일 이 장소를 교우촌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신학교는 교우촌에서 조금 떨어져 보다 깊숙한 곳에 위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589번지 일대에서 산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581번지 일대에서는 신학교 터로 추측이 가능한 곳이 두 군데 발견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신학교는 사방 7m 이상의 규모였고, 사제관은 길이 3m, 폭 2m 50cm, 높이 1m 71cm의 작은 규모였다. 신학교는 통나무와 밀집으로 엮어 7~8cm 두께의 진흙 벽돌로 쌓았으며, 신부댁 역시 기와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도 여기 저기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어 신학교 터로 보기에 의문점이 있다.
부이용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부엉이들의 골짜기라는 이곳이 마을에 한 극단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곡은 아주 협소하고, 양쪽 산들이 가파라서 태양이 지는 것을 오후 3시쯤에는 볼 수 있는 험준한 골짜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과 계곡 입구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해 있고 적어도 당시 선교의 자유가 아직 보장되지 않은 상황을 고려한다면 위기 때 산 속으로 피신해 갈 수 있는 581번지 일대가 보다 신빙성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 찾아가는 길
점뜰마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여주 점뜰 마을은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밀사 윤유일 바오로와 그의 아우 윤유오 야고보의 고향이다.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가 바로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셔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승훈 베드로(1756~1801)가 북경에 들어가 영세하고 돌아와 1784년 한국 교회가 창설됐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평신도가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는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됐다.
스스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승훈,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742~1792) 등 교회 지도자들은 1789년 10월 예비신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의 북당 천주교회로 파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청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견진까지 받고 돌아왔다.
평신도의 성무 집행은 안 된다는 회답을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1790년 9월 재차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해 성사를 집행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고 그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든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 사바(일명 지홍, 1767~1795)와 함께 북경으로 길을 떠나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1752~1801) 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 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 신부는 서울 북촌(지금의 계동) 최인길 마티아(\1765~1795)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6개월간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신입 교우인 한영익의 밀고로 주 신부는 몸을 피해야 했고 윤유일, 지황, 최인길 세 사람은 체포돼 비밀리에 정식 재판 절차 없이 고문을 받아 치명하였다.
조정은 주 신부 입국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1795년 6월 28일 밤 이들 셋을 은밀하게 타살한 후 시신들을 강물에 버렸다. 아마도 포도청에서 죽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광희문을 거쳐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 다리 인근에서 강물에 버려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날이 1795년 6월 28일 윤유일의 나이 36세였다.
한편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돼 신안 앞 바다 먼 섬인 임자도로, 그 숙부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됐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 안드레아, 그 동생 윤유오 야고보(?~1801)는 순교했다.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 아가타(1778?~1801)는 1801년 양근에서 참수됐고, 윤운혜 루치아(?~1801,)는 1801년 5월 1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 순교자
복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복자 윤유오 야고보( ? ∼1801년)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윤유오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 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 찾아가는 길
여주 도전리 성당공소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도전리(道全里)에 있는 공소(公所).
도전리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로, 1957년 3월 22일 지었다. 대지면적 1,175㎡에 지상 1층 규모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지붕이 목조 트러스 구조였고 내부는 흙, 외부는 나뭇가지와 흙으로 마감했으나 현재는 그 위에 슬레이트 판을 덮었다. 현재 상태는 골조를 제외하고 모두 수리한 상황이며, 외관을 석재 조적조로 수리하였고 내부벽체는 시멘트로 새로 발랐다. 이곳에서는 한 달에 한두 번씩만 미사를 드리고 있으나 항상 개방해놓고 있다. 골조를 빼고 전반적으로 수리했으며 외관은 석재를 이용한 조적식 구조로 바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