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지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5-
■순례지 : ○ 요당리성지 : 11시미사
○ 남양성모성지
○ 느지지길
○ 갓등이교우촌(왕림성당)
○ 비봉 점말 교우촌(쌍학리) +개무동 공소
○ 홀연이 교우촌
○남양 활초리 교우촌
○양감 용소리 공소 :(양감=양간면+감미면)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5. 29.(일)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곽현숙
- 김광자
- 전춘호
- 김기혁 (자료정리)
신앙유적지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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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성지
간략설명 내포지방과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의 교두보
지번주소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 191-1
도로주소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길 155
전화번호 (031)353-9725
팩스번호 (031)353-9785
홈페이지 http://www.yodangshrine.kr
전자메일 yodang-hl@casuwon.or.kr
200년 넘게 우리들 기억에서 잊혔던 곳. 하지만 이곳만큼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얼과 발자취가 스며있는 곳도 드물다. ‘느지지’로 불렸던 요당리 성지는 장주기(요셉, 1803-1866년) 성인이 태어나 신앙 기반을 다지고 주위 친척과 교우들에게 신앙을 전파한 곳이다. 또 장씨 집성촌으로써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장 토마스(1815-1866년, 장주기 성인의 6촌)를 비롯해 장씨 일가의 터전이기도 하다.
장주기(요셉) 성인 신앙의 요람터
성 장주기 요셉 회장 영정.장주기 요셉 성인은 이곳에서 성장하며 세례를 받고(1826년) 가족과 일가친척에 복음을 전했다. 박해를 피해 배론 성지(원주교구)로 이주(1843년)한 후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도록 봉헌하고,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등 신학생 및 선교사들의 뒷바라지에 헌신했다. 이후 병인박해(1866년)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돼 1866년 3월 30일 성 금요일에 충남 보령, 현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황석두 루카 회장 등과 함께 참수치명 당했다.
이곳 출신 순교자로는 지 타대오, 림 베드로, 조명오(베드로), 흥원여(가롤로)와 장주기 성인의 친인척인 장경언, 장치선, 장한여, 장요한, 방씨 등이 있다. 또 민극가(스테파노, 1787-1840년)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회장을 지낸 정화경(안드레아, 1808-1840년) 성인이 신앙을 전파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다 체포되어 순교한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와 이를 도운 손경서(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있기도 하다.
선조들의 숨결과 얼, 박해의 피로 이룩한 요당리
특히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지역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하면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옛 지명 : 양간공소)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바닷물이 유입돼 뱃길이 열렸던 당시에는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루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며, 기해년(1839년)과 병인년(1866년)에 일어난 두 번의 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했던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이라고 전해진다.
기도의 광장 오른쪽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 이숙자 체칠리아 수녀 작품이다.약 2만 500㎡(6200평) 부지에 아담한 성전과 깔끔한 조경이 참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예쁜 성지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그 흔한 십자가나 성모상 하나 없이 허허벌판에 천막 성전과 컨테이너 사무실, 화장실이 전부이던 성지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다. 요당리 성지 초대 전담 김대영 신부는 2006년 12월 24일 이곳에 천막을 세우고 첫 미사를 봉헌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계단을 몇 개 오르니 ‘기도의 광장’이 먼저 순례객을 맞는다. 중앙에는 성모상이 모셔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이, 왼쪽으로는 묵주기도 길(로사리오 길)이 조성돼 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묘사한 ‘십자가의 길 14처’로, 조각가 이숙자(체칠리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가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많은 기도와 묵상 끝에 나온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도의 광장’ 중앙의 성모자상은 어딘지 낯이 많이 익다 싶더니 남양 성모성지의 성모상과 같은 것이다. 요당리 성지 개발 초기에 남양 성모성지 전담 이상각 신부가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대성당 제대.14처를 따라 십자가의 길 기도가 끝날 무렵이면 ‘성역화 광장’에 이른다. 대형 십자가 아래로 요당리와 관련된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돼 있다. 물론 시신이 안장돼 있지 않은 의묘(擬墓)이지만 성지에서는 장주기 요셉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순교선조들을 현양하고 있다.
성인과 순교자 묘역을 참배한 후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넓은 잔디밭 너머로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2008년 3월에 착공해 1년 3개월여의 공사를 마치고 2009년 6월 4일 입당미사를 봉헌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 나무 기둥과 서까래에서 솟아나는 은은한 나무향기를 맡고 벽화의 아름다움을 즐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대성당과 소성당의 제대 벽화는 도예가 박성백(모세, 대구 신암동본당)씨 작품이다.
제대 앞 십자고상은 지금까지 본 성전 십자가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십자가상이다. 힘없이 늘어진 팔과 어깨를 보면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느껴진다.
관광 아닌 참 순례의 성지
소성당의 ‘십자가의 길 14처’ 역시 참으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조각가 이효주(아나스타시아, 서울 중림동 본당)씨가 1998년 2월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서울대교구 중림동약현 성당의 불에 탄 목재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불에 타다 남은 목재에서 아름다운 성물을 조각해 낸 것은 모진 박해를 겪고도 굳은 신앙의 싹을 피워낸 선조들의 숨결과 닮았다.
대성당 정면.불과 얼마 전만해도 허허벌판의 초라한 모습이던 요당리 성지에 이렇듯 아름다운 성당이 세워지고 각종 성물이 갖춰진 데는 방윤순(마리아, 수원교구 과천 별양동 본당)씨의 봉헌이 큰 힘이 됐다. 경제 불황의 여파로 성지에도 후원이 크게 줄고 있는 상황에서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대 성지전담 신부는 “순례객들이 좀 더 경건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성지를 순례할 수 있도록 성당 건축과 조경공사를 서둘렀다”면서 “순교자들의 피와 얼이 서려있는 요당리 성지를 순례하면 공경심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닌 말 그대로 ‘순례’입니다. 단순히 볼거리를 찾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지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얻어 가시면 좋을 것입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에 성지미사가 봉헌된다. 단체 순례객들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별도의 미사봉헌과 하루 피정(묘역 참배, 미사, 유해 친구, 영성 강의, 성시간)도 가능하다. 사무실에 미리 요청하면 식사(한식 뷔페)도 주문해 준다. 2014년 5월 6일에는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대성당 앞에 장주기 요셉 성인 흉상을 제작 설치했다. [출처 : 평화신문, 2009년 9월 6일, 서영호 기자, 내용 일부 수정(최종수정 2015년 5월 18일)]
(자료출처: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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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당리는 박해 초기 시대부터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서, 장주기 요셉 성인과, 하느님의 종 장 토마스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이다. 정화경 성인이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던 곳이다.
요당리(蓼塘里)란 지명은 ‘여뀌 풀(蓼)이 무성한 못가의 마을’을 의미한다. 조선 후기의 경우 서해 바닷물이 아산만 쪽에서 현재의 발안천을 따라 고잔 저수지를 거쳐 양감면 요당리 느지지 일대까지 밀려 들어왔다. 현재는 남양 방조제로 가로막혀 바닷물의 유입은 중단된 상태다.
이곳은 장주기(張周基, 일명 낙소, 1803~1866, 요셉) 성인과 장주기 성인의 6촌 장 토마스(1815~1866) 외에도 순교자 지 타대오(다두, 1819~1869), 임치선(1845~1871, 베드로), 조명오(曺明五, 1823~1872, 베드로), 홍기현(洪基賢, 1851~1871, 베드로), 홍원여(1850~1872, 가롤로)의 고향이기도 하다.
1803년 요당리 느지지(현 요당3리) 마을에서 태어난 장주기 요셉 성인은 1826년경에 세례를 받았고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에 의해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1843년부터 제천 배론에 정착하였다.
1855년 ‘성 요셉 신학당’이 설립되자 메스트르 신부에게 초가 3칸짜리 자기 집을 학교 건물로 내주었으며, 자신은 한문 교사와 공소 회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사형 선고를 받고,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재건, 1813~1866, 루카)와 같이 충청도 갈매못으로 내려가 64세의 나이로 3월 30일에 참수 치명하였다.
또한 이곳은 한국 교회 최초로 교회 재정을 확보하기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서 그 책임을 맡았고, 끝내는 순교한 민극가(閔克可, 1787~1840, 스테파노) 성인과 이곳에서 공소 회장을 맡으며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1807~1840, 안드레아) 성인이 활동하던 곳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성인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상게’로 피신하였다가 순교하였으며, 성인의 피신을 돕다가 순교한 손경서(1799~1839, 안드레아)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공소 회장을 맡으며 신앙 전파에 힘쓰다 순교한 정화경 안드레아 성인은 충청도 정산 출신으로 양간 지방(화성시 양감면)으로 이사와 회장 소임을 맡았고, 앵베르 주교가 상게로 피신할 때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순진했던 정화경은 배교자 김여상의 꾀임에 빠져 앵베르 주교의 피신처를 알려 주었고, 또 다른 포졸에게 속아 모방 신부의 명을 받아 상경하던 최형 베드로를 잡히게 하기도 하였다. 결국 세번째 잡혀 포도청에 올라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교수형으로 치명하였다.
▒ 민극가의 《삼세대의(三世大義)》
기해박해 순교자 민극가 스테파노가 지은 천주가사다. 삼세(三世)는 천당ㆍ지옥ㆍ십계(현세)를 말한다. 신자들이 삼세의 의미를 잘 새겨 현세에서 교리를 실천해 내세에 천당에 갈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 저술했다. 총 287구로 형식상 4ㆍ4조, 4음 보격을 이루고 있다. 현존하는 《삼세대의》는 모두 원본의 전사본이다.
◆ 장주기 요셉 순교 이후 일화 : 시신 보존
갈매못의 수영에서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요셉이 치명한 후 그 시신 중 황석두 루카만이 가족들에게 넘겨지고 나머지 시신은 조선 법에 따라 형장 모래밭에 묻혀 있었다. 근처에 살던 신자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낼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서슬퍼런 박해의 칼날이 무서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순교지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이 내려와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다녔는데, 그 사람은 바로 장주기 요셉의 아들 장노첨이었다. 그는 만나는 신자들을 붙들며 순교자의 장례를 치르자고 설득하였다. 감시의 눈이 번뜩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신자들을 찾게 되었냐고 묻는 말에 그는 "제 부친이 꿈에 와서 '아무데 사는 아무 사람이 내 시체를 거두려하는데 너는 무심히 있느냐?“하고 두세 번 나타나시기에 당신의 이름을 알고 찾아 왔습니다." 하자 그 용기에 감복한 신자들이 4월 8일에 같이 장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이때 장노첨은 장례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고 자기를 도와줄 사람들을 구해 약속한 날에 신자들을 찾아왔다. 그 중에는 장주기 요셉의 조카 장치선도 있었다. 그는 리델 신부를 조선 밖에서 탈출시켰던 사람으로 나중에 서울에서 가족과 함께 잡혀 교수 치명하였다. 이때 장치선은 직접 장례에는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장례에 필요한 물품과 일꾼을 조달하는데 큰 몫을 하였다.
아무튼 장주기 요셉의 아들과 용기 있는 신자들이 모여 목숨을 걸고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 나섰는데 시신을 묻은 곳에 잔돌로 봉분처럼 쌓아놓았기 때문에 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근처에 주막이 있으므로 소리를 낼 수 없어 맨손으로 무덤을 헐어 시신을 찾았다. 이때 시신들은 몸과 목이 맞춰져 있었고 허리에 두른 칡 줄기에 나무패가 달려 있었는데 한글로 성(姓)을 써놓아 시신을 구별할 수 있었다. 장노첨 등은 네 구의 시신을 널빤지에 놓고 삼베로 감은 다음 지게에 얹고 거기서 10리 밖에 떨어진 곳에 이장할 수 있었다. 남의 눈을 피해 밤에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멀리 가지 못하고 하나의 봉분에 구덩이를 네 개 파서 각각 모실 수밖에 없었다.
7월에 가서야 다시 신자들이 모여 시신을 남포 서들골로 안전하게 이장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이장 때는 장노첨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그의 노력과 주선이 없었더라면 네 명의 순교자 시신이 안전하게 보존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신은 1882년 블랑 주교의 명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1900년 명동 성당에 옮겨졌다가 1967년 절두산 지하 성당에 모셔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장주기 요셉 순교 이후 일화 : 가족들의 운명
장주기 성인의 치명 이후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박해가 극심해지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에 따라 가족들은 서울로 올라가서 어떤 동네에 숨어 살았다.
어느 날 장주기 요셉의 손자가 길에 나가 놀다가 포졸들이 앞잡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손자가 급히 들어와서 본 대로 얘기하자 어른들이 상의하여 다른 곳으로 피하기로 했다. 하지만 때마침 장주기 요셉의 아들이 외출하여 날이 저물도록 오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온 집안이 다 마음을 졸이고 오장이 타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도망갈 차비를 하여 옷가지와 물건을 모두 싸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마음이 답답해지자 포교들의 눈을 속이려고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는데 얼마 후에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집안으로 처 들어 왔다. 모두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배교자가 큰집 식구들만 대어주고 무슨 마음인지 장주기 요셉의 아내와 손자는 대어 주지 아니 하며, '저 사람들은 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였다. 포교들이 그 말을 듣고 큰집 식구들만 묶어 앉히고, "저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이냐?' 묻자 묶여있던 이들이 한결같이 "저 사람들은 이사 가는 사람으로서 날이 저물어 더 가지 못하고 내 집에 우연히 들어와 오늘 밤에 머무는 중이다"고 대답하였다. 포교들이 살펴보니 이삿짐도 한편에 있고 또한 배교자도 대어주지 아니 하여 그들을 가만 두었다.
조금 지나서 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나고 방문을 열고 들어오려 할 때에 별안간 방에 켜놓은 불이 꺼져 버렸다. 여러 식구들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이가 온 줄을 알고 포교의 눈에 들키지 않게 할 생각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 "어떤 사람이기에 이 밤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 하였다. 방으로 들어오려 하던 장주기 요셉의 아들이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아뿔사! 밤에 길을 잘못 들어 남의 집으로 들어왔으니 대단히 미안합니다." 하고 바로 도망을 쳤다. 그가 다른 데에서 밤을 새고 그 이튿날 와 보니 큰댁 어른들은 전부 포교의 손에 잡혀가고(여기서 잡혀간 큰댁 식구들은 1868년 서울에서 잡힌 장치선의 가족일 가능성이 있다) 자기 식구들만 남아 있었다.
■ 순교자
◆ 성 장주기 요셉(1803∼1866)
‘낙소’라고도 불렸던 장주기는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나 1826년에 세례를 받았다.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였고, 회장이 되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에는 자신의 집을 임시 신학교로 내어 주고,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땅에서 농사일을 하며 잔일을 도맡아 하였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신부와 박 신부가 체포되자 장주기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하였지만,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자수한 뒤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견뎌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 거더리에서 끌려 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사망한 뒤 아버지가 중년에 이르렀을 때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20세 때 아내를 잃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나 6,7년 뒤 재혼한 아내와 딸마저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극가는 집을 나와 서울 경기 지역을 전전하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하였다. 또 어디서나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고 또 자선 사업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회장에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열심히 이행하던 중, 그 해 12월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온갖 수단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민극가는 모든 위협과 유혹을 물리쳤다. 또 옥에서 배교하였거나 마음이 약해진 교우들에게 신앙을 권면함으로써 배교자 중 여럿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옥 생활에서도 회장의 본분을 다하던 민극가는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정화경은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장성해서는 더욱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해 살았다. 이곳에서 회장을 맡아 보며 자기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또 서울을 왕래하며 힘자라는 데까지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화경은 매일같이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의 마음을 북돋아 주었고, 박해를 피해 내려온 범 라우렌시오 주교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주교를 찾고 있던 밀고자 김순성(일명 여상)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 주었다. 서양 신부를 잡으려던 김순성 일당은 정화경을 이용하여 신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계략을 눈치 챈 정화경은 도망하여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9월에 체포된 정화경은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이듬해 1월 23일 33세의 나이로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 복자 장 토마스 (1815∼1866년)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는 1866년에 순교한 성 장주기(요셉)의 6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가 시작된 후,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얼마 안되어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있은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청주시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토마스는 대자 되는 사람이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자료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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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왕림(갓등이)성당
병인박해시 순교자를 낸 초기 교우촌 갓등이 공소
왕림 성당은 병인박해 때 순교자를 낸 초기 교우촌 갓등이 공소에서 유래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언제 교우촌이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앵베르 주교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이미 1839년 이전에 형성된 교우촌인 듯하다. 옛날에는 이 고장 지명을 따서 흔히 갓등이[加等里] 공소로 불렸다.
수원에서 충청도로 가는 좁은 산길에 위치한 왕림리는 박해 시대에 전교 여행을 다니는 선교사들이 많이 이용했던 곳이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아니라 교우들이 사는 곳이기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곳 공소에 은신하고 있었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서도 순교자가 탄생하게 된다. 1867년 1월 갓등이 교우 최 야고보가 충남 해미에서, 1871년 3월 한 안드레아가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치명사적》, 《치명일기》 등 병인박해 관련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수원 유수부에 출생, 거주, 활동 등의 연고가 있는 순교자가 모두 30명 이상인데, 그중 갓등이에 가까운 지방의 순교자로는, 건이에 거주했던 권 요한, 이원일, 임치선(1845~1871, 베드로), 임(서방) 등 4명이 나타나고, 양간 출신의 조명오(曺明五, 1823~1872, 베드로), 홍기현(洪基賢, 1851~1871, 베드로), 홍원여(1850~1872, 가롤로), 지 타대오(1819~1869) 4명이 드 러난다. 병인박해 때 갓등이 인근 지방에 혹시 살아남은 교우들은 다른 교우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1880년 이전 일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으나 교세 통계표가 남아 있는 1883∼1884년도 당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보고한 경기도 지역 교세 통계표에 의하면, 수원 지방(유수부)에 갓등이, 건이, 느지지 등 3개 공소가 있었는데, 신자 수는 건이가 105명으로 제일 많고, 갓등이는 102명, 느지지는 47명이었다.
갓등이 지역을 포함하여 한강 이남 경기도 지역을 담당한 최초의 선교사는 뮈텔 신부(1890년부터 주교)였다. 그는 1883년부터 3년간 갓등이 지방의 공소를 방문하고 판공성사를 주었다. 서울의 주교, 신부들이 돌보던 이 갓등이 공소는 1885년경부터 서울의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르) 신부가 혼자 맡아보다가, 1888년 7월 앙드레(Andr´e, 安學古, 1861~1890, 야고보) 신부가 초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한강 이남 경기도 최초의 본당이 되었다. 이듬해에 앙드레 신부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가 성당을 지었다. 현재 성당은 1971년에 새로 건립한 것이다.
이 본당에는 부설로 서당인 삼덕학교(三德學校)를 1907년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뒷날 1914년 4년제 신명의숙(新明義塾)으로 개편하여 인재를 양성하다, 1945년 광성국민학교로 발전하였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그 자리에 수원 가톨릭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고(故)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가 바로 신명의숙 출신이다.
▒ 광성학교(光星學校)
왕림은 기해박해(1833년)를 피해 온 교우들이 옹기를 구우며 삶을 꾸려 가던 곳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에는 2명의 교우가 순교한바 있는 독실한 신자들의 교우촌이다. 이곳에 학교가 들어선 때는 1892년 5월 1일 왕림 본당이 설정된 4년 후 파리외방전교회소속 알릭스(J. Alix, 韓若瑟) 신부가 이곳에 한문서당을 설립하면서 이 학교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듬해인 1893년 4월 1일 한문서당은 삼덕학교(三德學校)란 교명을 내걸고 1개 반 60여명의 학생을 모아 정식 학교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6·25 전쟁으로 여러 차례 폐교를 당하면서도 학교명을 신명의숙, 왕림학원, 개량서당, 봉담고등공민학교, 광성국민학교 등으로 바꾸면서 존속해 왔다. 1949년 국민학교의 인가를 받은 후부터 1980년 2월 28일 재정난으로 폐교할 때까지 배출한 학생 수는 총 1,308명이다.
▒ 갓등이 성당
왕림 성당은 ‘갓등이’ 성당이라는 별칭도 있다. ‘갓등이’는 신부님이라는 의미의 ‘갓을 쓴 등불’이라는 뜻으로 박해시대 때 왕림 교우들이 사용하던 은어였다고 한다. 특별히 ‘갓등이’라는 은어가 남아 있는 것은 이곳이 박해시대 때 피신 다니던 신부들의 은신처로 자주 활용되었기 때문인 듯 하다.
◆ 김대건 신부 순교사 그린 1920년대 연극대본 발견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2∼1846) 신부의 순교사를 그린 1920년대 연극대본이 발견됐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최근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연극대본 `金神父傳'을 공개했다. 이 대본은 당시 조선교구 보좌주교였던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 드브레 에밀 알렉산드레 조셉 주교(한국명 유세준)가 라틴어로 쓴 원작 연극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거주하는 한 교포가 소장하다 평화신문 미주 지사에 기증한 것을 평화신문측이 훼손방지를 위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다시 기탁함으로써 이번에 빛을 보게 됐다. 이 대본은 1921년 경기도 봉담면 왕림리 왕림 성당(옛이름 갓등이)에서 등사판으로 찍어 손으로 제본한 것으로, 제1막 `1836년 헌종 2년 병신년에 안드레아 김신부 조선을 떠나심이라'로 시작해 제7막 1846년 9월16일에 김 신부-새남터에서 참수치명하심이라' 등 총 140쪽에 걸쳐 총 7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각 막과 막 사이에는 연극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무대 장치로 대본과 함께 독창 및 합창 악보와 가사가 수록돼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서 담당 최승룡 신부는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대본이 온전한 책자 형태로 발견된 것은 교회문화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金神父傳' 라틴어 원본 작성자인 조셉 주교는 1877년 프랑스 태생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사제수품을 받고 1899년 조선에 파견됐다. 순교자들의 자료수집 등으로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그는 1926년 선종했다. 그가 창작한 순교극 `金神父傳' 라틴어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연합뉴스, 2004.3.16)
(자료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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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백학교우촌 (개무동공소, 점말)
남양 고을에 앵베르 주교가 성당 터를 닦아 놓았다는 구전 속의 교우촌
남양 백학 교우촌은 태행산과 삼봉산 기슭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형성 연대는 구전과 흔적으로 보아 18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서울에서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앵베르 주교의 사목 활동과 연관성을 추정해 볼 수도 있는 곳이다. 성당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았다는 성당터가 있다.
백학은 현 지명으로는 화성군 비봉면 쌍학3리에 위치한 곳이며, 교우촌 형성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구전과 흔적으로 보아 1800년대 초반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생존한 이들의 증언 및 기타 문서자료를 토대로 구체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시기 혹은 전성기는 대략 1800년대 후반으로 보는 주장이 우세하다.
태행산 줄기와 삼봉산 줄기가 끝나는 곳, 바닷물이 들어오던 갯벌에 세워진 마을벌말(쌍학1리)과 배터가 있었던 정주개, 갯벌이었던 개무동에서 백학 교우촌까지는 개천 길을 따라 만들어진 마을길을 걸어서 약 40분이 소요된다. 그래서 백학 교우촌은 깊은 산골 속에 위치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을 입구 동네가 개무동이고, 그곳에 현 공소 건물이 있다. 그 위로 동학동, 상동학동, 그위 태행산 바로 밑 옛 공소가 있던 지역(쌍학3리 835)을 점마을이라 부른다. 지금은 산 밑 동네가 없어지고 약 500m 정도 내려와야 마을이 있다.
향토사가 고(故) 한종오 씨의 1983년도 발표문 《남양 지역의 교우촌 형성과 치명 순교 성지에 대한 연구》에 의하면, 백학 상촌 태행산 밑 기슭에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가 성당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았다고 전해오는 성당터가 있는데, 백학 교우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서 태행산 기슭 위로 약 200m 오르면 넓은 공터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헌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교회 초기와 박해 시대에 남양 지역 내 백학 교우촌에 대한 문헌상 기록은 없으나, 현재 태행산 기슭에 400평의 평지가 있는 점 외에도 1838년 11월 앵베르 주교의 서한에, 백학에서 가까운 “갓등이 공소를 사목 방문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서울에서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백학 교우촌을 앵베르 주교가 공소 순방 길에 방문했을 가능성도 추론된다. 그러나 이는 아직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가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그곳에는 십자가와 제대를 설치해 놓고 있다.
백학에 관한 기록은 종교 자유의 여명기인 1885년경, 경기도 사목을 담당한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르) 신부가 1886년에 신자 수를 파악 기록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서한에 1886년에 61명의 신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한불 조약이 비준된 1887년에는 60명의 신자가 있다고 기록된 것이 첫 번째이다.
(자료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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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 홀연이 교우촌
박해시대에 피난해 온 교우들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지 교우촌
백학과 홀연이, 갓등이는 박해 시대에 피난해 온 교우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교우촌 형성에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다. 더구나 주위에 질그릇을 만들 수 있는 흙이 있어 옹기 가마를 만들어 그들의 생계를 꾸리는 데 더 없는 조건을 갖춘 천혜의 요지다. 태행산과 삼봉산의 깊은 산줄기에 서향으로 쌍학이 있고 동향으로 홀연이며, 앞산 사명산이 앞을 가로막아 홀연이 계곡 마을은 천혜의 은거처로 안성맞춤이다.
태행산과 삼봉산 사이인 가파른 홀연이 고개를 넘어서 완만하고 긴 산골길을 700m 정도 가면 농장 사옥 한 채가 오른쪽 산골 속에 있는데, 이 계곡 이름이 ‘멍우리’라 하고, 이곳에 점터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오면 왼쪽으로 ‘윗말’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 아래 동네가 ‘홀연’이다. 홀연에서 도곡으로 가는 길 왼편 사명산 뒤 기슭에 점마을이 있었고 점터도 있었으나 이제는 과수원이 되어 버려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홀연이 고개에서 가마리까지는 매우 긴 산골로 이어져 있어 홀연이는 교우들이 안심하고 은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교우촌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에 홀연 공소가 있었다. 왕림 본당 초기에 신부들의 기록에 홀연 교우촌 신자들의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1883년 5월부터 1884년 4월까지 경기도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했던 뮈텔 신부의 교세 통계표에는 마침내 수원 고을에 속한 갓등이와 함께 남양 고을에 속한 것으로 표기된 ‘호련이’(=홀연이) 공소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2년 후인 1885년 5월부터 1886년 4월까지 이 일대를 방문했던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르) 신부의 교세 통계표에는 ‘호련이’와 ‘백학’ 공소가 등장한다.
1886년에 홀연에 58명의 신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한불 조약이 비준된 1887년에는 51명의 신자가 있다고 기록된 것이 첫 번째이다. 갓등이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어 초대 신부로 앙드레(Andr´e, 安學古, 1861~1890, 야고보) 신부가 부임한 1888년에 홀연의 교우 수는 39명으로, 1889년 갓등이 2대 신부인 알릭스(Alix, 韓若瑟, 1861~1948, 요셉) 신부 부임 시에는 29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홀연과 백학 교우촌은 모두 박해 시대에 수원 일대 교우촌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갓등이 공소에 가까운 교우촌들이었는데, 개항 이후의 교세 통계표에 등장한 순서를 보면 갓등이에 보다 가까운 홀연이가 먼저이고 홀연이에서 태행산을 넘어야 했던 백학이 홀연이 보다 2년 후에야 등장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자료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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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성모성지
성모 성지로 선포된 병인박해 순교자 치명터
남양 성모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지다,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공식 선포된 곳이다. 이후 남양 성지에서는 조국의 평화 통일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성모님께 기도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남양 반도는 박해 시대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숨어 살면서 옹기를 구워 연명함으로써 인근에 백학, 홀연, 활초리 등 여러 공소들이 형성되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에 위치하는데, 포구가 발달하여 해상으로 서해안의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등은 물론이고 중국과의 연락과 이동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남양은 도호부(都護府, 종3품 아문)가 위치한 곳으로 지금의 남양 성모 성지 자리는 병인년 대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붙들려와 갖은 고문과 매질로 배교를 강요당하고, 배교하지 않을 경우 처형을 당했던 장소이다.
이곳 남양의 향토사가로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던 홍승길 씨와 황창호, 홍순환 씨 등 지역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이곳 성모 동산 일대는 ‘건넝골’로 불리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지로서 밤나무 등이 우거진 으슥한 곳이었고 약간의 전답이 있었으며, 신자들을 산 채로 생매장한 곳이라고 한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는 남양의 순교자들로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덕골)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명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여러 사실들로 미루어 남양에 일찍부터 신앙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남양 포졸들이 멀리 충청도에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다 처형했던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남양 성지는 다른 성지들과는 달리 대부분 무명 순교자들로 구성된 치명터였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다가 1983년, 당시 남양 본당의 박지환 요한 신부에 의해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남양 본당 전 신자들은 기금 마련과 함께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였고, 특히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김남수 주교에게 남양 성지를 성모 성지로 개발하고자 하는 의지를 전하면서 이후 성지 개발은 전 교구민의 관심 아래 진행되었다.
특히 1991년 9월 한 달 동안은 교구 내 모든 본당에서 기도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묵주 기도의 성모 축일이며 수원교구 설정 기념일이기도 한 그해 10월 7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모 성지로 선포되었다. 이후 남양 성지에서는 조국의 평화 통일과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24시간 묵주 기도 고리 운동, 십자가 로사리오 순례 운동, 낙태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도 운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 순교자
◆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남양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나섰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 세였다.
(자료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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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감면 용소리공소
양감면 1914년 통합 (양감면,상홀면,감미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