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신앙유적지답사: 수원교구 안성지역

2016. 7. 29. 오후 2:42:34

글자



안성지역 성지순례
- 기도하며 순례하기 2-


  ■순례지 :  ○ 안성성당(구포동성당) : 10시미사
              ○ 바울교우촌 
              ○ 갈전리 성당
              ○ 던지실 성당
              ○ 미리내성지
            


  ■순례목적 :  순례봉사자 기도하며 순례하기
          
  ■순례일시:  2016. 2. 28.(일) 08:00 절두산출발 ~

  ■순례자  :   - 양재권
                - 김광자
                - 정철
                - 백현숙
                - 신동호
                - 이윤신           
                - 김기혁 (자료정리)
               



기도 순례
2016.2.28. 눈오는날

■바울공소
여우석 (1957) 010 2372 8431
민병헌토마(1960?) 010 8968 2430
김낙한가밀로 031 672 8103
■갈전리성당
미리내성요셉애덕수녀회  도미니카수녀님

■안성성당
박종권암부로시오(1940) 010 8159 2855
              









■ 안성성당

 경기도 지역 초기 본당 중의 하나로 현 수원교구 소속.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소재. 1900년 10월 19일, 충청도의 공세리 본당(貢稅里本堂)으로부터 분리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착한 의견의 모친. 관할 구역은 안성시 동쪽 지역과 보개면 · 서운면 · 금광면 일부.

공소 시대  안성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이미 박해 시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전후해서는 이웃의 죽산(竹山)과 안성군 소촌만면(所村萬面, 현 대덕면)의 모산리와 명당리, 서리면(西里面, 현 안성시)의 계촌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는 박해로 와해되어 버렸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신자들이 모여 새로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다. 기록에서 이들 교우촌의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3년으로, 당시 충청도와 경기도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가 그 해 안성 지역을 방문하고 ‘바울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馬山里의 岩洞)를 설립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때 죽산과 직산(稷山) 등지에도 공소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에는 ‘궁말 공소’(현 충남 천안시 성환읍 安宮里)를, 1887년에는 ‘선바위 공소’(현 안성시 금광면 梧山里의 立岩)를 설립하였다.

1922년 공베르 신부가 건립한 옛 안성 성당. 1985년 6월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이후 안성 지역은 수원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 있던 앙드레(Andre, 安學吉) 신부, 충청도 간양골 본당(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間良里)의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가 차례로, 혹은 지역별로 사목을 맡게 되면서 공소가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 공세리 본당이 설립된 뒤에는 그 초대 주임인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천안 · 직산 · 진천 등과 함께 안성 지역의 공소들을 순방하였으며, 1896년 경기도 미리내 본당이 설립된 뒤에는 이곳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가 안성 북쪽 일부 지역을 맡아보았다. 또 1900년 1월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하였는데, 당시 안성 일대의 신자수는 7~8개 공소에 모두 350명 가량이었다.

본당 설립과 정착  안성 지역의 신자들이 본당 설립 운동을 펴게 된 것은 뮈텔 주교가 이곳을 방문한 뒤였다. 당시 이 지역의 신앙 중심지는 바울 공소와 질구비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後坪里), 갈전리 공소(현 안성시 미양면 葛田里) 등지였으며, 안성읍에는 한 가족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차 설립될 본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읍내에 성당과 사제관이 건립되어야만 했고, 이에 신자들은 드비즈 신부와 협의하여 구포리에 있던 현재의 성당터를 매입하고, 그 자리에 있던 기와집 21칸을 성당(8칸)으로 개조한 다음, 1900년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 아래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기본 여건이 갖추어지게 되자 드비즈 신부는 즉시 뮈텔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본당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그 결과 1900년 10월 19일자로 안성 본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목재를 이용해 한식으로 장식한 옛 성당 내부.이때 뮈텔 주교가 안성 본당의 초대주임으로 임명한 사람은 10월 9일 동생인 공베르(J. Gombert, 孔安世)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형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신부였다. 당시 그는 한국말을 배우기도 전에 본당에 부임했으므로 첫 해에는 드비즈 신부가 계속 공소 순방을 해주었고, 이듬해 가을부터 비로소 공베르 신부 자신이 공소 순방에 나서게 되었다. 초창기 안성 본당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안성시, 평택시, 천안시, 진천시 등으로 공소수는 모두 19개소였고, 신자수는 600여 명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이후 1909년 1월,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 학교(安法學校, 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하기 시작하였으며, 일제 초기인 1912년에 여자부를 함께 신설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 수녀 2명을 초빙하였다. 이 수녀회에서는 이후 현재까지 본당의 전교를 돕고 있다. 또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 때에는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 안으로 들여보내고, 사제관 앞에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뒤 치외 법권을 주장하며 왜경의 성당 진입을 막아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고, 흉년이 들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다.

덕원 수도원 목공부 출신 원제동 씨가 1925년에 제작한 제대 뒷벽면 목조 장식이 독특하다.
한편 공베르 신부는 여러 해 동안 성당 신축 기금을 모금해 왔는데, 1922년에 어느 정도 기금이 모아지게 되자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3월에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대축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10월 4일 서울교구의 보좌 주교로 있던 드브레(Devred, 兪世俊)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건평 80평, 경기도 기념물 82호)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초기 성당사에서 나타나는 토착화의 양식을 잘 반영하였다. 당시 공베르 신부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의 설계를 토대로 중국인 기술자의 힘을 빌려 이를 완공하였는데, 기와와 돌 등은 안성군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유교 강당을 헌 자료를 이용하였고, 목재는 압록강변과 서산 지방의 것을 이용하였다. 그는 또 2년 뒤인 1924년 1월, 안법 학교 개교 15주년을 맞아 ‘안성 천주교 소년회’를 창립하였다.

성장과 분할  공베르 신부는 당시 안성 일대뿐만 아니라 천안군 목천면 일부, 진천군 백곡면 일부, 평택과 그 인근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중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진위(振威) 군청이 자리잡게 된 병남면 평택리(현 평택시) 인근의 통복(通伏) 공소가 장차 발전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공베르 신부는 1926년 12월 6일부터 수원군 태장면 병점(餠店, 본래 갓등이 본당 소속)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몰리마르(Molimard, 矣) 신부와 협의하여 현 평택 성당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고, 1928년 초 몰리마르 신부를 이곳으로 이전토록 하였다. 이로써 ‘평택 본당’은 안성 본당에서 분할된 최초의 자본당이 되었다. 그러다가 공베르 신부는 1932년 9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고, 미리내 본당에 있던 뤼카(F. Lucas, 陸加恩) 프란치스코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1934년 6월 2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해 8월, 황해도 은율 본당에 있던 이순성(李順成)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옛 성당 옆에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건축된 새 성당 외부.이후 본당은 여러 신부가 거쳐 가면서 어느 본당 못지않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우선 이순성 신부는 본당에 부임한 뒤 냉담자 회두, 외교인 입교 권면, 상가 방문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나 연령회와 비슷한 ‘예수 성심 전교회’를 창설하였다. 또 제4대 이복영(李福永) 요셉 신부는 1936년 안법 학교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 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16일 정규 보통 학교로 인가받았다. 제7대 김제근(金濟根) 토마스 신부는 1947년 9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고, 제8대 임세빈(林世彬) 요셉 신부는 1950년 4월 교사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공사는 6 · 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임 신부가 제10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1954년 10월 연건평 258평의 2층 벽돌 교사로 준공하게 되었다. 임 신부는 다음해 고딕식 벽돌조로 종탑부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 본당 소속인 갈전리 공소의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제12대 정욱진(丁旭鎭)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때부터 본격적인 준비 작업을 시작하여 1959년 11월 ‘갈전리 본당’(葛田里本堂)으로 독립함으로써 안성읍 남쪽의 미양면 대부분 지역이 신설 본당으로 편입되었다. 이어 제15대 강주희(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 재임기인 1963년 3월에는 옛 안법보통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소화 유치원’(현 안법 유치원)을 개원하였고, 1963년 10월 7일 수원교구 설정으로 본당이 서울대교구에서 새 교구로 편입되었으며, 1966년 1월에는 안법 학교의 경영을 교구에서 맡게 되었다.

빛의 흐름을 강조한 100주년 기념성당 내부.1970년 7월 20일, 안성 본당은 다시 한 번 분할됨과 동시에 그 명칭이 ‘구포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분리 신설된 본당은 ‘대천동 본당’(大泉洞本堂)으로, 여기서는 안성읍 서쪽과 군내의 서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어 제21대 주임 이정운(李淨雲) 베드로 신부는 1975년 10월 수녀원을 신축하였고, 다음해 ‘죽산 순교자 기념 성당 건립 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이를 추진해 나갔는데, 1981년 11월 5일에 죽산 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1983년 7월 22일 본당으로 승격)됨으로써 본당은 모두 4개의 자본당을 갖게 되었다. 이후 본당에서는 1985년 6월 기존의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제24대 서명석(徐明錫) 안드레아 신부 재임 때인 1987년 11월 문화재 보수 사업에 의해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그리고 1992년 1월 27일 금광면의 ‘던지실 본당’이 분리 신설됨으로써 본당의 관할 구역이 현재와 같이 축소되었다. [출처 :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2권, 1995년]

구포동 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 명칭을 안성 본당으로 변경하여 옛 이름을 되찾았다. ‘100년에서 다시 태어나는 100년’을 주제로 다양한 기념행사를 가진 안성 본당은 2000년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초대 주임인 공 안토니오 신부 흉상 제막식, 로고스(Logos) 탑과 미래를 준비하는 십자가 축복식도 함께 이루어졌다. 11m 높이의 로고스 탑은 안성 지역에 하느님의 ‘말씀’이 뿌리내린 지 100주년을 기념하는 탑으로 관련 자료들을 탑 속에 넣어 100년 타임캡슐 봉안식도 가졌다. 100주년 기념성당 옆에 설치되어 본당 설립 200주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십자가’는 총길이 18m에 무게만도 13t에 이른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경기도 기념물 제82호인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모습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다. 윤성호 교수가 설계한 총건평 840여평, 지하 1층 지상 2층 기념성당은 옛 성당과 절묘한 신구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옛 성당에서는 ‘빛의 은은함’이 느껴진다면 새 성당은 오히려 ‘빛의 흐름’을 강조했다. 제대 위에 사각형의 천창(天窓)을 배치하여 말씀을 뜻하는 빛의 생명력을 강조했고, 성당 입구 상부 벽에는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세 개의 사각형 창을, 신자석 옆에도 창을 두어 성당이 일종의 ‘빛통’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2005년 5월 축복식을 가진 안성 성당(구 구포동 성당) 100주년 기념관.안성 본당은 2005년 5월 28일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2000년 본당설립 100주년을 맞으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보존 ․ 계승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왔고, 한옥 구조가 그대로 남아있는 옛 성당 건물은 경기도 기념물로서 신자들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관심도 높은 점을 감안하여 옛 성당 옆 터에 지하 1층(성체조배실), 지상 1층(전시실, 유물연구실) 규모의 기념관을 건축하였다. 전시실에는 100년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과 옛 성직자들이 사용했던 전례용구를 비롯해 각종 교리서와 성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안성 성당하면 초대 주임 공베르 신부와 포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01년 성당 마당에 무심코 심은 독일산 포도 묘목이 의외로 탐스런 과실을 맺자 공베르 신부는 안성 지역이 포도재배에 적합한 기후 및 토양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선교활동과 함께 지역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도 큰 힘을 기울이던 공베르 신부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오가며 안성의 토질과 기후에 적합한 포도 종자를 찾았고, 이를 적극 보급해 안성포도의 효시가 되었다. 또 성당 주변의 토지 50만 평을 매입하여 이웃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임대하며 지역민 전체를 품어 안았다. 안성에서 32년 동안 신자들을 돌보던 공베르 신부는 6 ․ 25 동란 때 체포되어 납북,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다가 1950년 11월 12일 동사하였다. 한편 안성문화원은 2012년 5월 공베르 신부를 ‘안성을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흉상 제막식을 가졌다. [출처 : 관련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3년 4월 30일)]

옛 안성 성당은 서양식 성당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전통적인 재로와 방식으로 건립되어 토착화된 성당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굿뉴스)





■ 미리내성지

 간략설명 은하수 별빛이 쏟아지는
 지번주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 
 도로주소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전화번호 (031)674-1256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습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에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성당 뒤편으로 옮겨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수도회에서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의 관할권이 수원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출처: 굿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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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성성당


 간략설명: 공베르 신부의 열정이 서려있는 안성포도의 고향
 지번주소 경기도 안성시 구포동 80-1 
 도로주소 경기도 안성시 혜산로 33
 전화번호 (031)672-0701
 문화정보 경기도 기념물 제82호    

 박해시대에 이미 복음이 전파된 안성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전후해서 여러 곳에 신자들이 거주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로 공동체가 와해되고 훗날 순교자들의 후손이나 다른 지역 신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새로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1883년 두세 신부가 안성 지역을 방문하여 바울 공소를 설립하고, 죽산과 직산 그리고 궁말과 선바위 공소를 차례로 설립했습니다. 1900년 1월 뮈텔 주교가 이 지역을 방문한 후 본당 설립 운동이 시작되어 안성읍내에 현 부지를 매입한 후 기와집을 성당으로 개조하여 그해 9월 드비즈 신부의 집전으로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어 10월 19일 안성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초대주임으로 임명된 공베르 신부는 1909년 사립 초등학교인 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여 자비로 운영했고, 1912년 여자부를 신설하며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교사수녀를 초빙했습니다. 또 공베르 신부는 1919년 3 · 1 운동에 참여했다가 왜경에게 쫓기던 사람들을 성당으로 받아들이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해 왜경의 진입을 막기도 했고, 프랑스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전답을 매입하여 소작 농민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으며, 흉년이 들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빈민 구제 활동도 벌였습니다.

1922년 공베르 신부는 신자들의 협력을 얻어 성당 건립 공사를 시작해 그해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첫미사를 봉헌하고, 10월 4일 드브레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성당은 한식(내부)과 바실리카 양식(외부)을 절충한 형태로 토착화의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1936년 제4대 주임 이복영 신부는 안법학교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에서 6년제 초등학교로 발전시켰으며, 다음해 4월 정규 보통학교로 인가받았습니다. 1947년 9월 김제근 신부는 안법중학교를 인가받아 개교하였고, 1955년 임세빈 신부는 고딕식 벽돌조로 성당 종탑부를 증축하고 독일에서 주문한 종을 설치했습니다.

안성 본당은 1970년에 대천동 본당을 분할하면서 구포동 본당으로 개명되었고, 1985년 6월 성당이 경기도 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 1월 1일 본당명을 안성 본당으로 다시 변경하고, 그해 10월 3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식 및 기념성당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성당은 붉은 벽돌의 옛 성당 모습을 살리기 위해 전혀 다른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흰색 건물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2005년 5월 안성 성당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출처: 굿뉴스)
2. 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에서 북쪽으로 40리쯤 떨어져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묘소와 그의 어머니 고(高) 우르술라, 김대건 신부에게 사제품을 준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미리내는 본래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을 이루었던 곳의 하나이다. 따라서 김대건 신부가 미리내에 묻힌 지 50년 후인 1896년 비로소 본당이 설정됐을 때 이곳에는 이미 1천 6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성 김대건 신부의 일생은 짧았다. 비록 26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지만 ‘뛰어난 지식, 열렬하고 꾸밈없는 신앙, 놀랄 만한 언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든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선진 서구 문명에 정진하기를 열 성상(星霜).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고국에 돌아온 그는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그의 빼어난 인품과 재능을 두고 “과연 그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맡길 만하였고 그의 성품이나 일하는 태도로나 지식 등 어느 모로 보든지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그를 잃은 것은 무엇으로도 대상(代償)하지 못할 재앙”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 앞 묘소.심지어 조정에서조차 많은 대신들이 외국 문물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그의 재능을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굽히지 않는 신앙으로 결국 헌종에 의해 직접 그의 사형이 선고되고 이튿날인 1846년 9월 16일 떠들썩한 규모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형장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김대건 신부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년)는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 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1907년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이 자연석을 이용해 건립한 성 요셉 성당.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순교자 옆에 묻어달란 주교의 유언대로 김대건 신부 옆자리에 그를 안장했다.

그 무렵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하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선종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5월 20일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본당신자들과 함께 1906년 여름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초 자연석으로 건립하여 성 요셉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해에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학교 건물을 건립하여 해성학원을 열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신자 자녀들에 대한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1976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고, 같은 해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면서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정착하고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을 순차적으로 완공했다.

1991년 건립한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 기념 대성당 전경.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서 경당까지 길 옆에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장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들이 설치되어 박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03위 시성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발 뼈 유해 일부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103위 시성 기념성당 옆에 건립된 성모당 내부 모습.경당 앞마당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다. 성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도영 신부는 초대 미리내 본당 주임으로 부임해 선종할 때까지 34년간 사목하며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를 단장하고 기념경당을 건립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거룩한 순교자 곁에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최문식 신부는 한국교회 열아홉 번째 사제로 미리내 본당 3대 주임을 지냈다. 경당 밖 왼편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가 나란히 누워 있다.
미리내 성 요셉 성당 위 광장 중앙의 대형 십자가 왼편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여기저기 나뒹구는 바위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겟세마니 동산을 꾸며 놓았다. 여기에는 피땀 흘리며 기도를 바치는 예수와 잠에 곯아떨어진 제자들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놓았다.
내려오는 길 오른쪽 등성이에는 수원 교구 성직자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 상단에는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사적비가 있다. 1976년 순교자 현양사업을 진행하며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17위를 이곳에 이장해 모셨다. 그 중에서 6월 24일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대구대교구로 이장해 이듬해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1988년 9월 20일 미리내에 천묘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나머지 16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 중에서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는 2013년 10월 22일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손골 성지로 이장해 현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묻혀있는 12위는 모두 용인 내사면 대대4리의 목 없는 순교자 줄무덤에서 이장한 유해이다.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되었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수고해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의지를 밝혔다. 2015년 4월 7일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23m x 5.5m, 최영철 바오로 작)을 제작 설치하고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2월 2일)]

경기도 지역에서 유명한 교우촌으로는 미리내(안성군 양성면 미산리)가 있다. 그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은이 공소에서 큰 산을 넘으면 닿게 된다.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는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00여 년 전인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신부의 부임으로 본당이 설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인박해의 순교자 이윤일(요한) 성인과 다른 무명 순교자들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으며, 김 신부의 모친 고 우루술라도 이곳에 묻혔다. 또 1853년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한 뒤 교회에서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김 신부 곁에 그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현재 이곳 성지 입구 왼편에는 103위 시성 기념 성당이 건립되어 순례자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1975년 10월 6일에 창립된 성모 성심 수녀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처럼 103위 성인 중에서 두 분의 유해가 있던 곳인 만큼 기념 성당이 건립될 만한 곳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많은 신자들이 이곳을 순례하면서 가장 뒤편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기념 경당, 입구 오른쪽 위에 있는 이윤일 성인의 무덤 자리와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 그리고 작고 초라하지만 선조들의 신앙이 담겨 있는 미리내 성당을 둘러보지 않고 되돌아가는 신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은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로 이장되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다.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 옆에 안치된 성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묘.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최양업) 토마스, 잘 있게.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나의 어머니 우루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도록 부탁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히 당할 수 있으리이까? (김대건 신부가 스승 신부에게 보낸 1846년의 옥중 서한)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출처: 굿뉴스)

 



----------------(다음은 순교의 맥을 찾아서)
성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가 있는 박해시대의 교우촌

 미리내는 본래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성 이윤일 요한 등의 시신이 이곳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던 순교 성지이기도 하다. 그 후 두 성인의 시신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당, 천주 성삼 성당이 있고, 페레올 주교와 무명 순교자들이 안장되어 있다.
미리내는 순수한 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인데, 이 산곡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경기 남부 지역의 신자들 및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속으로 옮겨 살면서 형성되었고,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성지 또는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부터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미리내로 옮겨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증언들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지시에 의해 당시 교회 법원 판사 푸아넬(Poisnel, 朴道行, 1855~1925, 빅토르) 신부와 서기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5, 플로리아노) 신부(1911년 주교로 서품) 등이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옮겨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도착,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교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

이와 함께 본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1928년에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 건립되었다.
한편 1876년 6월 24일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 성인의 유해가 용인 먹방이(용인시 이동면 묵리)에서 미리내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 내에 조성된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성인으로 시성된 지 2년 뒤인 1986년 12월 20일 대구대교구 발굴단에 의해 대구 관덕정 기념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1853년 2월 3일에 사망한 페레올(Ferr´eol, 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시신도 이곳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 무렵에 사망한 김대건 신부의 모친 고 우르술라의 시신도 그 인근에 안장되었고, 김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했던 이민식도 김대건 신부의 경당 앞에 있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후 1965년에 이 공동묘지가 광장으로 조성되면서 고 우르술라와 이민식의 유해가 현재와 같이 경당 옆으로 이장되었다.
이어 1976년에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된 후, 4월 23일에는 음다라니(응달아니, 응다라니, 용인시 양지면 대대리)에서 12구의 순교자 시신이, 12월 17일에는 시봉골(또는 서봉골, 용인시 수지구 신봉리)에서 4구의 순교자 시신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 미리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美山里)에 위치한 이 산골은 1846년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 교우들이 옮겨와 안장한 후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성지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된 곳이다.
천주교가 이 지역에 전파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1846년 한강변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이곳 신자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등 여러 교우들이 옮겨 와 안장한 것으로 보아 이미 그전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리내에 공소가 개설된 것은 프랑스 선교사가 작성한 경기도 교세 통계표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1884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이민식 빈첸시오의 기록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나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미리내 북쪽 거문정이에 살았던 이민식 빈첸시오와 관련된 기록이다. 김 신부가 은이 마을에서 전교 활동을 할 때 열심한 신자로서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은 김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고 유체를 수습하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40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유체는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머리는 안고, 동체는 결방하여 짊어지고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유체를 옮기게 된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검은 돌(黑石洞)을 지나 동작리(鋼雀洞) 뒷산을 타고 남태령을 넘어 청계산 골짜기에 이르니 날이 밝기 시작하였다. 어두워질 때까지 유체를 다래 덩쿨에 숨겼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여 하우 고개[鶴峴]를 돌아 묘론이 고개, 너덜이(板橋)를 거쳐 태재(泰峴)에 이르니 용인 땅과 가까운 능골 앞산이었다. 끊임없이 묵주 기도를 바치며 밤을 틈타 유체를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고 한다. 
되도록 위험한 큰길을 버리고 참바대 고개를 넘어 태화산 기슭의 퉁점(銅店),드렝이 고개를 거쳐 마침내 은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은이 마을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 고개에서 날이 새는 바람에 유체를 콩밭에 숨겨 놓고 밤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 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히 넘기기를 빌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유체를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 신부의 유체를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외 여러 가지 증언
 이 밖에도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다섯 사람의 증언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김 프란치스코라는 시람에 의하면 상여에 실어 양성에 있는 미리내에 묻었다고 했고(《기해병오 순교자 증언록》 282쪽), 박 베드로라는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임시로 문배부리(지금의 용산구청 자리)라는 곳에 묻었다가 양성 미리내로 옮겼다고 했고(위 증언록 285쪽), 서 야고보라는 사람은 새남터에서 조금 떨어진 왜재에 매장했다가 다음 날 왜고개(현 국군 중앙 성당 자리)로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뤘다고 했다(위 증언록 289쪽).
또 김대건 신부 유해 발굴과 이장 기록 보고서에 의하면 1846년 9월 30일 교우 14명이 미리내로 옮기고 그해 10월 26일에야 미리내에 유체를 안장했다고 한다. 이민식의 증손자 이순교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민식을 비롯 세 사람이 옮겼다고 한다. 각종 문헌과 자료를 토대로 30여 차례에 걸친 현지 답사와 8,90대 노인들의 증언들을 종합 분석하여 지도상에 그 경로를 재현해 본결과 한강 도강 과정 누락, 유체 단독 이장 등 과장 부분을 제외하면 용인천주교회사에 수록되어 있는 이장 경로가 당시 실제 상황과 부합되는 측면이 크다고 여겨진다. [자료 참고 : 한국순교자현양회]


(출처: 순교의 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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