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콜라 같은 여자

2008. 1. 19. 오전 2:58:54

글자
 
 
 
<최미란. 당년 36세. 카피라이터. 현재 독신.>
한국에 있는 친구 김영준이 보내온 그녀에 관한 정보는 이것이 전부였다.

발신인이 '가람기획'으로만 되어있는 항공엽서가 느닷없이 날아든 것은 보름전이었
다.
<멀미나는 권태를, 온몸이 다 부셔지도록 태고의 소리에 말끔이 씻어내고 싶어
서... . 그리고 긴 세월 동안 많이 풍화되었을 '그대'라는 초상이 갑자기 그리워서...
> 그래서 나이아가라 폭포와 나를 찾아 훌쩍 날아오겠다는 그런 내용의 엽서였다.

나는 아까부터 뒤뜰 흔들의자에 홀로나와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로부터 날아 온
뜻밖의 소식은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그녀가 한국에 김영준을 거리에서 우연히 만
남으로 해서, 질긴 인연의 끈이 다시 이렇게 이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다분히 감상적인 글체, 그 속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함이 묻어났다.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한 줌 바람에도 까르르 쓰러지다가 일어서는 갈대숲처럼, 그녀는 즉흥적이기 일쑤
였다. 그것은 이따금 발랄내지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상징하려는 의도적인
몸짓으로 보이기도 했었다.
여기에서 '의도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은, 어떤 기회에 그녀의 또 다
른 일면을 엿 볼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그 해 팔월. 폭염 속에서도 데모는 활화산처럼 타 올라, 대학로 거리를
매캐한 연기로 가득 메웠다. 화염병 투척 후 좇고 쫓기는 숨박꼭질은 그칠 줄 몰랐
다. 그 팔월의 암울한 하늘.
그때 나는 포장마차에 쑤셔박혀 소줏병만 작살내고있었다. 그리고는 취기가 혀 끝
을 바짝 당기고나서야 이 불확성시대에 보다 확실한 것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
렇게 추적거리는 빗속에 흠뻑 젖어서는 발길 가는데로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어느 새 그녀의 아파트에 다다랐다. 그녀 또한 눈물나는 이 개같은 세상에 넌더리
가 났는지, 얼마 전에 휴학계를 내던진 처지였다. 아니면 햇빛 따사롭던 날, 교정
뒤편 숲속에서 갑자기 내 입술을 덮치며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을 때 처럼, 단지 세
상이 너무 따분해서, 좀더 화끈한 것을 찾아 자유분방하게 다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자기 멋대로 거칠 것 없이 사는, 그래서 짐짓 헤플 것 같은.

나는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서 잠시 망설여야 했다. 나도 화끈하고 아찔한 것을
찾아 왔노라고 할 것인가? 지독히도 따분해서, 아니 이대로는 미쳐버릴 것 같아서...
. 그때 마침 문이 열렸다. 그녀가 막 외출준비를 한 채 나서려는 듯 했다. 나는 아
무렇게나 벽에 기대어 선채, 손바닥으로 비에 젖은 얼굴을 훔쳐내렸다. 그때문인지
복도에 걸린 백열전등이 출렁하다가 멈추었다.
"그래, 어차피 휘청거리는 세상이라구. 무얼 망설여. 쪼다같이."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목줄기까지 흘러내리는데도, 심한 갈증이
목젖을 잡아당겼다. 나는 확실한 먹이감을 발견한 야수의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
았다. 천천히... .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 그 발끝까지 핥듯이 훑어내렸다. 그때 그
피사체는 그냥 한 마리의 암컷에 불과했다. 마른 침이 꿀꺽했다.
"널 갖고 싶어. 네 알몸을... . 이제 나한테 살아있는 순수라고는 이처럼 꿈틀대는
원초적인 본능 밖에 없다구. 그래서 네 알몸 속에서 미쳐버리고 싶어. 알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다시한번 힘껏 젖은 얼굴을 훔쳐내렸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그 알 수 없는 침묵이, 마침내 나를 한 마리의 들개로
만들어 버렸다.

모로 돌아누운 내 등뒤로, 그녀의 과거가 등줄기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녀가
두 번의 이혼경력을 가진 홀어미의 외동딸이라는 것, 그 어미가 얼마 전 새파란 젊
은 사내와 다시 혼인이라는 법적근거를 남겼다는 것 까지. 그로인해 '가출'이라는
숨통을 찾아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 그리고 내 등줄기에 얼굴을 묻은 채 잠시
서러운 눈물을 흘렸던 것도 같다.
어쨌거나 뜻밖에 그녀의 처녀성은 저으기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 순간 떠 올린
'올가미'라는 것이, 달갑지 않은 그녀의 하혈보다 더욱 나를 매스껍게 했으니까.
그해, 나는 더 더욱 미궁에 빠져버리는 혼돈과 불확실성에 마냥 허우적댔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현실, 미래, 이상 그리고 동전 한 닢 같은 사랑마저도 끝
내는 후회 뿐이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머리 빡빡 깎고 훌쩍 군대에 자원해 버렸
다. 그리고 입영 전 날, 그녀에게 발신지 없는 짤막한 엽서 한 장 띄워 보낸 것이
전부이고 마지막이었다.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네가 내것이라는 것 조차도... . 간다. 군대로!>
그후, 나는 가난한 아버지의 소원대로 한때 착실한 공무원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십 여년 세월이 갔고, 종당엔 여기까지 흘러왔다.

한 여름밤의 풀벌레 소리는 처연하다. 착잡한 마음을 달래 볼 양으로 서너 병 비
워놓은 취기 탓 만은 아니리라. 그렇듯 지나 온 세월이, 두고 온 그 땅이, 갑자기
서글픔으로 다가오며 가물가물 노곤한 어깨에 내려앉았다. 이윽고 한껏 울어대던
풀벌레마저, 잠시 저민 가슴을 쓸어내리는지 침묵한 채 사위가 고요해 왔다. 마치
사위어 가던 불꽃이 재가 되듯이... .

그녀는 긴 빨대가 꽂혀 있는 큰 유리잔의 콜라를 거의 단숨에 비우고 있었다.
"이 레스토랑은 전망이 정말 좋군요. 한 눈에 폭포가 내려다 보이고... ."
그녀가 좀 멋적었던지 그렇게 화두를 꺼냈다.
"그런데 여전하시군요. 콜라 좋아하시는 것은?"
그제서야 그녀가 낌새를 알아챈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좋은 걸 어떡해요. 이젠 저도 못 말려요."
그 어깨짓이 사랑스러웠다. 순간 나는 그 옛날 발가벗겨졌던 그녀의 나체를 어렴
풋이 기억해 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그녀를 다시 품 안
에 안아 볼수 있다는 기대감이 실실 삐져나오려 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는 나
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누가 저 폭포에게 어서 떨어져 두려
워 말고 부서지라 했던가. 그리하여 추락하는 것은 아름답다 했던가.
그녀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는 정색을 했다.
"당신은 나의 첫남자였어요. ...그렇죠?"
그 순간 먼 발치의 폭포가 물기둥을 세우며 솟구쳐 올랐다.
"난 창녀가 아니에요. 그건 아세요?"
뒷덜미 쪽에서 신경줄 하나가 툭, 튕기 듯 아려왔다.
"이따금 지독히 혼자일 때 생각해 보곤 했죠. 만일 당신이라는 남자가 나를 소중
히 지켜주었더라면... ."
"취한 것 같소."
잠시 그녀가 나를 노려보다가 스치듯 짧게 웃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힘껏 움켜쥐었다.
"미란씨! ...모든 게 그냥 바람결이었소. 스치듯 지나가는...그러니 이제 그만 잊어버
려요."
"이것 보세요. 당신 이야기나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한 무리의 물보라가 유리창에 물투레질하듯 달라 붙었다가는, 이내 창틀 아래로
숨어들었다.
"꼭 해줄 말이 있었죠.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없는... ."
"내 말은... ."
"그만!"
그녀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손수건을 꺼내 눈가로 가져갔다. 이윽고
추스리듯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그래요, 알아요. 다 부질없다는 것."
그녀가 얕은 한숨을 폭포쪽에 날렸다. 한 동안 망연히 폭포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
내 자신의 핸드백을 열어 젖히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당신에게 줄 선물이 남았군요."
나는 의아해져서 그녀를 보았다.
"눈을 꼭 감고 이리 가까이 얼굴을 내밀어 보세요."
왠지 거부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하라는 대로 얼굴을 가져갔다.
"눈을 꼭 감으세요."
눈을 감았는데 일순, 뜨끔한 느낌이 목줄기를 쑤셨다.
"컥!"
"이것이 그 동안 내 가슴에 숨겨 온 할 말이었어요. 이제 당신에게 돌려주는 거죠.
어차피 당신 것 이니까."
그녀가 싸늘하게 웃으며 나이프를 한 바퀴 돌리자, 삽시간에 온몸으로 핏물이 튕
겼다. 나는 새하얗게 질린 채,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으윽! 살려 줘, 살려 줘!"

"여보, 여보!"
어디선가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눈을 떳다. 사위는 그대로 어둑해 있었다.
그 때문인가. 저편 뜨락의 풀벌레가 다시 목청껏 울어대기 시작했다.
                                                                                                                                     *

댓글 1

  • 2008년 1월 19일 오후 2:30

    읽으면서 긴장했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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