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 장명길 (펌)

2007. 10. 2. 오전 12:31:43

글자
 

큰 애야. 가을이다.

이제 머지않아 헐벗은 나목 아래 낙엽이 수북이 쌓일 것이다.
하긴 그렇게 떠나는 것이 어디 낙엽뿐이겠느냐. 아마 이 맘 때쯤이었을 게다. 먼발치 만장 펄럭이며 황톳길을 오르던 상여꾼의 종소리가 아직도 유년의 기억 속에 아득하구나. 철딱서니 없던 코흘리개 시절, 고향땅 들녘에서 바라보던 풍경인데 그 딸랑거리던 종소리가 어쩌자고 그리도 어린 가슴을 때리던지... ,

 큰 애야.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한번 가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 하지만 너를 두고 가야하는 아비는 죽어서도 차마 눈을 감지 못 할 것 같구나. 기억하느냐? 아비의 책상 모서리에 오래도록 붙박여 있던 색 바랜 사진 한 장을. 네가 네살인가 나던 해이고 네 아우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하던 그 무렵이었을 게다. 벚꽃 흐드러지던 날 엄마랑 창경원엘 갔었지. 네가 더는 정신적 성장을 멈춘 채 어린 시절을 부여잡고 맴돌며 살고 있듯이 아비도 그때가 사뭇 그리워 빛바랜 사진을 그렇게 붙여 놓았던가 보다.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그 사진. 모르긴 해도 아마 네 어미가 치웠을 것이다. 깊은 한숨과 함께...

  그 시절 그 자리에서 너는 너무도 좋아라 했다. 사람들은 그런 네가 정말 잘 생겼다고 한번 씩 어루만지며 지나가곤 했었지. 아비는 그때 굳게 결심했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잘 키워내리 라고. 그 연장선상에 캐나다 이민이 있었던가. 어쨌든 어미와 아비는 낯선 이역에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했고 그 덕인지 계획보다 몇 해 앞당겨 터전과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너희들에게 칭찬은 커녕 솔직히 꾸지람 할 시간조차 없었음을 고백하마. 어쩌다 생각나면 돌아보던 너희들. 꼬작지근한 몸뚱이로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너희들의 모습에 이게 아니지 싶었을 때다. 어느 날인가 혼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네가 그제야 아비의 눈에 들어오더구나. 의사는 정신분열증이라 했다. 덧붙여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니 장래를 포기하라던... . 아비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돼. 무엇 때문에 정든 땅 두고 이 낯선 이역까지 왔는데... . 아비는 한동안 그 현실을 모질게 거부했다. 의사가 돌팔이라고. 그 인간이 미친 거리고. 그러다가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지며 하늘을 향해 간절히 물었다.
하느님, 왜 하필이면 내 아들입니까?

 아비는 죄가 많다.

돌이켜 보면 숱하다. 더구나 누가 뭐래도 아비는 네 앞에 큰 죄인이다. 이민 보따리처럼 어쩔 수 없이 따라와야 했던 너였기에 아비는 유죄다. 내몸 힘든 줄만 알고 어쩌다 마주치는 눈빛에 짜증만 잔뜩 담아 금방 죽을 것 같던 네 입을 굳게 닫게 했으니 아비는 분명 유죄다. 그것도 모자라 몹쓸 병에 걸린 너를 솔직히 누가 알까 부끄러워 꼭꼭 숨긴 한 많은 세월. 정말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이제야 알겠구나. 그러고도 아비라니...
차마 금수도 그러지는 않을진데. 돌이켜 보니 그런 작자는 아비자격도 없는 한 마디로 가짜였다.
 이제 네 나이 스물다섯. 그때 피맺힌 분노와 억울함이 그대로 멍울져 어둠속 수렁 세월을 13년이나 보냈구나.
 큰 애야. 그 동안 홀로 헛것에 놀라며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겠느냐. 이제라도 네가 그 한을 삭일 수 있다면 이 아비의 시신에 맘껏 침이라도 뱉으려무나.

 아비는 말한다.

비록 아비가 너에게 해준 것이라곤 눈썹 하나 달아준 것도 없지만 너를 통해 절실하게 알게 된 하느님이 있기에 아비는 살만했다고. 그 분은 너를 우리 집에 천사로 보내셨음을 비로소 깨닫게 해 주셨다. 그러니 누가 뭐래도 너는 아비의 거울이다. 문득 네가 천사로 보일 때 아비는 참으로 네 안에서 평안했었다. 모진 세상을 거부하는 너무도 착한 너로 인해.  언젠가 너 마저 이승의 인연이 다 하는 날 다시 만나거든 그땐 네가 꿈꾸며 살고 싶었던 대로 한껏 살아보자꾸나. 그런 너를 못난 아비로써 정말이지 꼭 보고 싶다.
그날 까지 너를 주님께 맡기며 기다리마.

 둘째야.

네가 가끔씩 아비에게 보내주던 이메일의 끝말. '아빠, 사랑해요.' 아비는 그 한 줄에 너를 믿는다. 네가 온다는 날이면 너를 기다리느라 창가를 떠나지 못하는 형을 잊지 마라. 그게 핏줄이고 사랑이다. 둘 다 뜨거운 것이니 길지 않은 생애 부디 그처럼 따스하게 살 거라. 그래야 네가 사는 세상 그 언저리도 따습다.

 나의 소중한 사람아.

이렇게 먼저 가게 되어 면목이 없구료. 사는 동안 당신에게 미안 했다는 말밖엔 더는 할 말이 없소. 다만 당신에겐 잠자리에 들어서도 손에 들려 있는 묵주 알이 있기에 믿고 떠나오. 끝으로 내 몸뚱일랑 한 줌 재로 만들어 아무데나 가까운 강물에 띄워주시오. 그리하면 내 이 참에 흘러흘러 살아생전 못 가 본 곳이나 다 가 볼 요량이오. 그러니 부디 미소 잃지 말고 더는 슬퍼하지 말기를.

이천오년 시월, 이역에서 떠돌이새


 

댓글 6

  • 2007년 10월 2일 오전 2:28

    몇번 읽고 또 읽어도.. 코 끝이 찡하네요..

  • 2007년 10월 2일 오후 1:12

    가슴이 뻐근해지는 글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정에 항상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 2007년 10월 3일 오전 12:02

    제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해 주신 명 작가의 글에 많이 많이 울었습니다...

  • 2007년 10월 5일 오후 7:13

    사랑,,길지않은 우리생애 부디 그처럼 따스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 2007년 10월 7일 오전 8:56

    눈물이 멈추질 않습니다. 절절한 자식사랑이 부모인 저자신을 돌아보게 하는군요.

  • 2007년 10월 7일 오후 2:38

    바오로형제님의 따뜻한 마음에 크렁거리던 눈물이 그만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전해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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