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미리보는 교황청 수장 한국 천주교회 고문서들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행사의 하나로 오는 9월 순교자 성월에는 신유박해 관련 자료를 비롯해 한국 천주교회의 고문서들이 서울 합정동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전시된다. 전시될 자료들 가운데는 교황청에 소장돼 있는 '황사영 백서' 원본과 '1811년 신미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조선 교우의 서한'과 '1824년 교황 성하께 보낸 서한' 한문 사본 등이 포함될 예정이어서 관심을 끌고 있다.
현재 관계자들이 국내 전시를 위해 교황청과 다각도로 협의 중인 이 고문서들은 한국 천주교회 신앙선조들이 교구설정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연들이 고스한히 담겨있다. 이들 문서들이 지닌 교회사적 가치와 의미, 내용 등을 미리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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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는 70-80년 길게는 거의 200년만에 다시 조국에 돌아오는 이들 고문서들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 신앙 선조들이 자신들의 거룩한 피로 쓴 보배롭고 귀한 문서들이다.
목숨을 걸고 혼신을 쏟아 한자한자 정성껏 쓴 글들. 발각되면 곧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슴에 품고 엄동설한 국경을 넘어 걸어 중국 북경에 갔던 신자들. 이들 모두 개인적 부귀영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건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과 '교회재건',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였다.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위해 성직자 영입을 요청하고 있는 이들 고문서들은 사료적 가치도 상당히 높다. 황사영 백서는 교회 일부에서 '최초의 한국 순교자 열전'이라고 평가되고 있고, 신미년 서한은 조선 교우들이 교황께 보낸 첫번째 편지이다. 또 1824년 서한은 조선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문서이다.
이 고문서들이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념해 다시 한국에 선보이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의 전통적 신심인 순교 신심을 계승해 순교자의 영성과 정신을 기반으로 우리 민족과 세계 복음화를 위해 새 천년기를 열어가자는 사목적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신자들이 교회 고문서와 교회사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하는 데 큰 뜻이 있다.
■ 황사영 백서
[사진설명] 황사영 백서. 원본은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최초의 한국 순교자 열전으로 불리고 있는 이 백서에는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강완숙 등 30여명의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황사영 백서 원본은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 문서고에 수장돼 있다. 교황청이 황사영 백서 원본을 어떻게 입수해 소장하고 있을까?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황사영 백서는 황사영(1775-1801, 알렉시오)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 배론의 김귀동 집에 있는 토굴에 은신하면서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 위해 8개월(1801년 2-9월)간 신유박해 전개 상황의 자료를 수집해 그해 10월 29일 완성한 서한이다.
백서는 그 해 12월 2일 동지사 조윤대 일행에 낀 조선천주교회 밀사 옥천희(요한) 편으로 북경에 보내지기로 되어 있었으나, 황심(토마스)의 실토로 11월 5일(음력 9월 29일)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함께 압수됐다.
압수된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됐고 1894년 의금부 문서를 정리할 때에 교회측에 입수되어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해졌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 79위 시복식 기념으로 황사영 백서의 원본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했다. 백서의 원본은 이후 지금까지 교황청내 민속박물관 문서고에 수장돼 있다.
▲ 황사영 백서 내용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 세로 39.1㎝ 크기의 조선 비단에 총 1만3384자를 담고 있다. 백서 내용의 70%는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최창현, 정약종, 강완숙, 김건순, 유항검 등 30여명의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순교열전을 기록하고 있다. 또 박해에 의한 교회의 어려운 상황과 박해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하면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다섯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황사영이 제시한 교회 재건 방안은 △ 서양 국가들의 재정 원조 △ 북경 교구와의 연락 방안 △ 교황을 통해 청 황제에게 '청의 종주권'을 발동해 조선 정부에 외교적 압력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황사영은 이와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 청의 조선 감호책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조선의 국왕을 부마로 삼을 것과 △ 선교사와 함께 서양의 큰 선박이 조선에 와서 우호조약을 맺도록 하는 대박청래(大舶請來)를 제안하고 있다.
■ 교황 성하에게 보낸 신미년(1811년) 조선 교우의 서한
[사진설명] 1811년 신미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조선 교우들의 서한. 원본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수장돼 있다. 이 서한은 교황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첫번째 편지로 해상을 통한 성직자 입국을 간청하고 있다.
'신미년 서한'으로 불리는 이 편지의 원본은 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수장돼 있다. 황사영 백서와 마찬가지로 신미년 서한도 비단에 쓰여져 있다.
1811년 신미년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띤다. 신유박해(1801년)가 발생한 지 만 10년 되는 해로 조선 신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해 제2차 성직자 영입 운동을 본격화 하던 때인 것이다.
교회 재건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은 이여진(요한)과 그의 사촌 신태보(베드로), 홍낙민(루가)의 아들 홍우송, 정약용 등이다.
이들 교회 지도자들은 박해가 끝난 지 10년 만에 신입신자가 1만여명이나 될 만큼 성장하자 성직자를 영입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 교황 비오 7세와 북경교구장 수자 사라이바 주교에게 보내는 2통의 서한을 작성해 밀사 이여진을 통해 북경교구에 전달했다.
▲ 신미년 서한 내용
1811년 12월 9일(음 10월 24일)에 프란치스코와 조선의 다른 교우들 이름(발각 때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이름을 쓰지 않음)으로 작성된 '신미년 서한'은 신유박해 이후 10년간 조선교회의 상황을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 교황에게 조선에 성직자 파견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8가지 방안을 간절히 청하고 있다.
신자들은 △ 조선 전체가 서양 사람들의 수학 지식과 예술가의 재주를 우러러 보고 있어 학식있고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용맹한 선교사를 선발해 보내줄 것 △ 국경 수비가 엄격해 바닷길을 이용해 조선에 입국할 것 △ 교황께서 조선 임금에게 선물과 정중한 편지를 보내 신앙의 자유를 청해줄 것 △ 조선 근해에 무인도가 많이 있어 마카오에서 배를 한 척 보내 무인도를 조사한 후 가장 적당한 몇몇 섬에 자리를 잡아 주민들을 입교 시킬 것을 제안했다.
신자들은 또 박해로 인해 교우들이 모두 빌어먹는 처지에 빠져 있고 신자가 1만여명이 넘으나 아직 관할 주교가 없다면서 구원이 하루 늦으면 하루를 고생하며 이틀 늦으면 이틀을 괴로워할 것이니 하루 빨리 서양 선교사를 태운 서양 큰 배를 보내줄 것을 청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서한은 신유박해 순교자 45명의 명단을 북경주교에게 보낸다고 밝히고 순교자들의 공로에 의지해 조선 교우들이 천만줄기 피눈물로 영신적 구원을 하루 빨리 받기를 바란다고 끝맺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교황 비오 7세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퐁뗀블로에 감금돼 있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는 조선 신자들이 보낸 신미년 서한을 받아본 후 마카오 대표부의 포교성성 대표인 마르키니 신부와 남경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선교사 파견을 강구해 보도록 지시했지만 이 제안은 중국 교회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 1824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서한
[사진설명] 1824년 교황 성하에게 보낸 서한. 원본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채 한문 사본과 라틴어 번역본이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보관돼 있다. 이 서한은 조선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편지로 후손들까지 영속적으로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성직자들을 파견해 줄 것을 청하고 있다.
암브로시오와 조선 교우들이 1824년 교황에게 보낸 이 서한은 정하상(바오로)와 유진길(아우구스티노)가 북경 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이 서한의 원본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한문 사본과 라틴어 역문 만이 현재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 보존돼 있을 뿐이다.
이 서한은 1827년 교황 레오 12세에 전달됐으며, 서한을 읽은 교황과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깊이 감동되어, 추기경 회의를 소집, 1827년 9월 1일자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 서한을 보내 "급속히 그리고 영구적으로" 조선교회의 정신적 곤궁을 구제할 수 있도록 조선 포교지 사목을 위임했다.
카펠라리 추기경은 레오 12세에 이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성좌에 오른 후 1831년 7월 추기경회의에서 조선 포교지를 대목구로 설정을 의결하고, 1831년 9월9일 조선 대목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이처럼 1824년 교황에게 보낸 조선 신자들의 서한은 조선교구 설정에 결정적 불씨를 지핀 귀중한 고문서이다.
▲ 1824년 서한 내용
이 서한 내용 역시 목자 없는 조선 신자들의 영신을 위해 성직자를 파견해 줄 것과 후손들에게 까지 영속적으로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조선을 왕래할 수 있도록 서양 배로 조선과 우호조약을 맺을 것을 청하고 있다.
이 서한은 수려한 문체로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한편의 고백문이다.
"저희들은 죄많은 영혼을 성사의 집전으로 재생시키고 다시 뜨겁게 하여줄 신부들을 보내주십시오. 신부를 파견해 주시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큰 은혜요 크나큰 기쁨이 되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옵니다. 저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흘리신 성혈과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우러러 보나이다. 성하께서는 급박한 위험에서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구렁에서 건져주실 방법을 취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평화신문, 630호(2001년 6월 10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