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역사신문] 주문모 신부 순교

[사진설명] 한국 천주교회 첫 사목자인 주문모 신부는 1801년 5월31일 순교하기 전까지 6년 4개월간 사목하면서 교리서를 발간하고, 회장직과 명도회 제도 도입하는 등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림은 1794년 12월 조선에 입국한 주 신부가 서울 정동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보례를 주고 있다. <탁희성 화백 작>
1801년 5월 31일
한국 천주교회 첫 사목자인 중국인 사제 주문모(42,야고보) 신부가 5월 31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 서울 용산구 이촌동 성밖 한강변 노들('사남기'라고도 함) 연무장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참수, 순교했다.
주 신부의 순교로 1784년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10년간 성직자 영입운동 끝에 얻은 유일한 사목자를 잃게 됐다. 신자들은 "주 신부가 순교했으니 천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훨씬 더할 것"이라며 "털끝만큼이라도 실망해서는 안된다"며 서로 위로하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삼위일체대축일이었던 이날 주 신부는 감옥에서 무릎에 30번 매질을 당한 후 귀에 화살을 꿴 채 국사범과 중죄인들의 처형장인 새남터까지 끌려왔다. 그는 압송 도중 길가 좌우로 늘어선 구경꾼들을 둘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청해 군졸에게 술 한잔을 얻어 마셨다.
주 신부가 순교한 직후 청명한 하늘이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소나기가 쏟아지는가 하면 광풍이 일어 모래밭에 돌이 날리는 등 날씨 변화를 일으키더니 곧 비가 그치고 영롱한 무지개와 함께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 하늘 끝에서 떠서 서북쪽으로 흩어졌다고 현장을 지켜본 이들이 전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사들과 백성들은 "착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징조"라고 동요했다. 목격자 중 이재기는 "눌암기략"에, 황사영(27, 알렉시오)은 "백서"에, 신자들은 이날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참조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신미년 서한").
주 신부의 머리는 포졸들이 24시간 지키는 가운데 닷새 동안 거리에 효시됐고, 어영대장은 명에 의해 신자들이 그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암매장했다.
황사영은 "많은 평신도들이 주 신부가 순교 후 그 머리를 매어 단 다음에야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니 10년 동안이나 애쓴 정성이 하루 아침에 허사로 돌아가, 영혼과 육신이 다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며 "주 신부 순교로 이제 생사를 의지할 데가 없게 되니, 모두 상심하고 실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슬퍼했다.
<평화신문, 629호(2001년 6월 3일), 리길재 기자>
한국교회 첫 사목자 주문모 신부는 누구인가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1752년 중국 강소성 소주 출생으로 1780년경 북경교구 신학교에 입학 1791~1794년께 사제로 서품된 후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 천주교회 선교사로 임명받고 윤유일 바오로의 도움으로 1794년 12월 서울로 들어왔다.
조선 천주교회의 첫 사목자인 그는 1801년 5월 순교할 때까지 6년 4개월여간 사목하면서 조선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성사를 집전하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직접 가르쳐 한글로 된 교리서를 짓거나, 한문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해 보급하는 등 선교에 힘써 그가 입국하기전 4000여명에 불과하던 신자를 1만여명으로 크게 교세를 신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또 교리연구와 전교를 목적으로 하는 평신도 모임인 '명도회'와 '회장 제도'를 도입, 조선 천주교회의 제도적 기틀을 다지는 데도 힘썼다.
그는 이밖에도 18세기 말엽 한국 천주교회의 가장 중심적 인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교황청과 동양 포교상의 보호권을 교황으로부터 위임받은 포르투갈 국왕, 중국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에게 '수교조약' 등 외교적 절충을 통한 국제적 협상을 요구하는 등 한국교회를 세계에 알리는 외교적 노력도 했다.
<평화신문, 629호(2001년 6월 3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대박청래사건'으로 검거 열풍
1801년 6월
천주교 신자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박해를 종식시키고 선교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에 밀사를 파견, 서양 선교사와 함께 서양 선박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 조정을 경악케 했다.
'대박청래사건'으로 불리는 이번 사건은 주문모 신부와 6월1일 순교한 김건순(요사팟)의 심문 과정에서 그 사실의 일부가 밝혀졌다. 이에 조정은 대박청래(大舶請來) 사건에 개입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유중태, 윤지헌, 황심, 옥천희 등 연루자 체포작전에 돌입했다.
의금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대박청래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이전인 1794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경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파견하기 위해 400냥이라는 거금을 낸 유항검과 조선 천주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은 1794년 주 신부가 서양 선박을 타고 윤유일과 함께 입국하기 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1796년 북경에 황심(토마스)을 파견했을 때도 유관검 일행은 이미 서양의 큰 배가 와서 조정과 '일장판결'을 본 후라야 신부가 안전하고 천주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북경교구에 밝힌 것으로 드러났다.
대박청래는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면서 더욱 치밀하게 전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 신부는 1796년, 1798년, 1800년 등 3차례에 걸쳐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 황심과 김유산(토마), 옥천희를 파견, 조선교회에 대한 박해 상황과 조선인의 성품, 풍습, 법률, 정치, 종교 등에 관해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대박청래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 신부는 대박청래를 요구한 이유에 대해 "수학과 의술을 갖춘 선교사들이 수행하는 포르투갈 여왕의 사절(교황청으로부터 아시아 포교권을 위임받은 나라가 포르투갈이기 때문)을 조선 왕에게 파견하여 임금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와 우호 조약을 맺도록 간청하는 것이 조선에서 천주교를 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평화신문, 629호(2001년 6월 3일), 리길재 기자>
[신유박해 역사신문] 주문모 신부 형 집행 두고 조정 격론
1801년 5월 17일-6월
주문모 신부의 사형 집행과 관련해 김 대왕대비를 비롯한 조정 중신들 사이에 격론이 있었던 사실?밝혀졌다. 나라가 금하는 천주교의 최고 중심 인물을 처벌하는 데 있어 조정 대신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것은 주 신부가 중국인이기 때문.
김 대왕대비는 지난 4월24일 의금부에 자수한 주 신부가 심문과정에서 중국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때부터 조정 대신들과 주 신부 처리 문제를 한 달여간 신중하게 논의해 왔다. 일부 대신들이 "주 신부를 본국으로 돌려 보내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만, 영의정 심환지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용보, 영부사 이병모 등은 "그가 이미 조선에 입국한지 오래고 국법을 어겼기 때문에 어느 나라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 물어볼 필요가 없고, 속히 군문으로 하여금 일률(一律)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대왕대비는 "소국(小國)에서 대국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도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매우 불가한 일이며 군법을 쓴다면 함부로 대국 사람을 죽였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묻고 "모름지기 만분의 일이라도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김 대왕대비는 대신들의 중론이 주 신부 처형으로 기울자 5월15일 어영대장 신대현에게 주 신부를 군문효수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신대현은 병을 핑계로 3일간 출근하지 않자 김 대왕대비는 그를 사임시키고 18일자로 신대겸을 신임 어영대장으로 임명했다.
신대겸은 노론 출신으로 1765년 무과에 급제, 길주 목사, 평안· 함경 병사, 삼도 수군 통제사, 포도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신임 어영대장 신대겸은 김 대왕대비의 명을 받아 5월31일 주 신부의 군문효수형을 집행했다.
한편 조정이 주문모 신부를 사형체 처한 후 청나라에 발송한 토사주문(討邪奏文)에는 주문모의 의복이나 언어 및 외양이 조선인과 동일했고 외국인으로 알아보게 할 만한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 있다.
<평화신문, 629호(2001년 6월 3일), 리길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