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내 성모 성지]

2006. 12. 3. 오후 9:51:34

글자

[한국내 성모 성지]


우리의 인자하신 어머니,
우리의 생명이시고 평화의 모후이신 마리아여,
아침에 첫 눈길을 당신께로 보내고
낮에는 당신 망토에 싸여 걷고,
저녁에는 당신이 굽어보시는 아래에서 잠들게 하소서

당신은 순진한 어린이들에게는 평화로운미소를 지으시고
투쟁하는 청년에게는 힘이 되시며
일하는 어른들에게는 빛이 되시고
천국을 기다리는 이에게는 위로가 되시나이다

평화와 기쁨의 샘이시며 실망한 이의 희망이신 마리아여,
이 세상의 모든 자녀들을 축복하소서.
(G. Alberi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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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신심(信心) 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에 대한 교회의 공경과 그 표현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합당하고 올바른 신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신앙 생활을 더욱 알차게 함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바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성모 공경은 근본적으로 신(神)인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 일체인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성모신심-004] - 한국내 성모 성지

[남양 성모성지]

남양 성지는 초대 교회 교우촌이자 처형지이며 우리 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바닷길이 열렸듯이 매일 썰물 때면 육지까지 바다가 열려 길이 생기는 제부도의 신비스런 광경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되어 있는데, 이 교우촌은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1991년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 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남양 성지는 성모 성지로 선포된 후 지속적인 기도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묵주의 기도 고리 운동은 현재 수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매일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15분간 5단을 바침으로써 24시간 내내 묵주의 기도가 이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또 1년에 두 차례씩 실시되는 피크로스(PICROS) 운동은 며칠 동안 도보 성지 순례를 하면서 끊임없이 묵주의 기도를 함으로써 희생과 고통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낙태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도 모임을 매주 토요일마다 마련하고 있습니다.

# 찾아가는 길

수원이나 안양, 군포 등지에서 대부도 방면으로 가려면 39번 국도의 비봉 사거리에서 306번 지방도로 들어서야 합니다. 비봉 사거리에서 약 7km가면 남양에 닿는데, 남양 농협 건너편에 있는 로사리오교를 건너면 남양 성지입니다. (영재네 홈페이지 http://user.chollian.net/~jcmans/index.htm)

[대구 성모당]

1911년, 대구교구가 조선대목구에서 분리, 창설되어 드망즈 주교님이 초대 교구장이 되셨을 때입니다.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새 임지에 며칠을 지낸 드망즈 주교는 1911년 7월 2일 대구대목구를 성모께 완전히 의탁하는 허원을 드렸습니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드망즈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배경과 함께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플로리아노 드망즈 아드라스의 명의 주교요, 대구의 감목은 하느님의 은총과 교황 성부의 은혜로, 여기 참석한 분들과 함께 새로 발족한 대구교구 7년의 지난날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앞으로 자녀로서의 신뢰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루르드의 성모께 바치며 이를 증거로 남기고자 합니다.

교황 비오 10세께서 이 교구를 설정하시어 우리는 이곳에 왔습니다. 새 교구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였으나, 작은집 하나도 지을 수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1911년 7월 2일 대구에 와서 처음 맞은 주일, 우리는 루르드의 성모를 이 교구의 주보로 모시고, 이 교구의 재정 관리자가 되어 주시기를 겸손 되이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허원을 하였습니다.

성모께서 교구기금을 사용치 않고 주교관과 선교사들이 회합과 휴양을 위한 집과 신학교를 짓고, 주교좌 성당답게 루르드의 성모성당을 증축하게 해 주시면 주교관 대지가 될 땅에 가장 닮은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고 허원하였습니다...이 허원은 1911년 7월 2일 공문으로 사제들에게 통보되었습니다. 천주의 성모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재정 관리인이 되어 주셨고, 세계 각처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허원의 소청뿐 아니라 전쟁 때문에 유지비마저 부족하던 교구의 기금을 쓰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첫째는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하였고, 둘째는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 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6년 말 소세(Saucet)신부가 중병으로 앓았고,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 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동굴 정지작업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좋으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전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습니다. 성모동굴은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가톨릭 청년회관, 그리고 대구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에 만들었습니다.

성모동굴의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뜨고 성모동굴의 크기는 물론 바위모양까지도 되도록 이면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흡사하게 만들었으며, 외부는 벽돌로, 굴 내부는 시멘트로,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으신 루르드의 성모 기념 동굴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성모상은 대구교구의 불란서인과 한국인 사제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마련되었습니다. 1918년 10월 13일 성신강림 후 21주일 교구내의 사제단과 신학생들이 참석하고 광장을 가득 채운 대구와 각처의 남녀 신자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먼저 성모동굴과 성모상을 축성하였고, 성모동굴 제단에서 대미사,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자료소스 : 성바오로딸 수도회 / 편집 : 정 데레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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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신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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