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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2일 더블린에서 런던으로 가는 아일랜드 항공기에서 기괴한 하이재킹(공중 비행기 납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행기를 납치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로렌스 다우니(53세)」라는 사람의 요구사항은, “바티칸(로마 법왕청)은 ‘파티마 제3의 비밀’을 세상에 공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대체 이 파티마 제3의 비밀이란 무엇이길래 하이재킹 사건까지 벌어졌을까요?
지금(1994년)으로부터 약 77년 전,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빈촌 ‘파티마’에 성모 마리아가 눈부신 흰 빛을 뿜으며 출현하여, 이 마을에 사는 세 어린이 - 「루치아(10세), 야신타(7세), 프란시스코(9세)」 - 에게 나타나 인류 운명과 직결된 세가지의 대예언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매월 13일에 여섯 번을 계속하여 나타났다고 하는데, 눈보다 하얀 옷을 발끝까지 내려뜨린 영롱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이 세 소녀뿐만 아니라 약 7만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예언 가운데 제1의 예언(지옥의 생생한 모습, 1차대전의 종결)과 제2의 예언(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1942년에 교회당국에 의해서 공표되었으며, 파티마 제3의 예언내용은 성모의 고지(告知)로 1960년까지는 발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제3의 비밀을 처음으로 열어 본 사람은 비오 12세 교황으로서, 이 때는 1958년 가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1963년의 재위기간까지 예언의 비밀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으로 이 비밀의 전문을 읽은 사람은 바오로 6세(재위기간 1963~1978)로서 기록을 개봉하여 보고는,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실신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포르투갈의 갈멜 수녀원에서 홀로 엄격한 기도생활에 들어간 그 시절의 루치아 수녀(1994년 현재 87세)는, 계시받을 당시에 야신타가 영적 능력을 얻어서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고 합니다. [야신타와 프란시스코는 성모의 예언대로, 예언을 받은 2,3년 후에 감기로 죽었다.]
아, 가엾어라. 법왕님. 법왕님이 층층대를 내려오시며 수많은 시체를 넘을 때,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욕설을 내뱉었고, 법왕님은 손을 이마에 대고 울고 계셨다. (『충격의 파티마 대예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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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3의 비밀의 역사에 있어서 아직도 신비에 싸여 있는 이야기들을 여기서 다루고자 한다: 1957년, 성청은 그때까지 파티마가 소속된 레이리아의 주교관에 보관되어 있던 제3의 비밀의 원본을 요구했다. 누가 이 일을 지시했으며? 어떠한 의도에서 그랬을까? 그 사실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해 본 결과 본인은 그럴싸한 가정을 제시할 수는 있었으나, 어떠한 확신에도 도달하지는 못했다.
1957년, 3월 중순, 실바의 주교는 그의 보좌 주교인 베난시오 주교에게 그 귀중한 문서를, 그 당시 리스본에 주재하는 교황 대사인, 센토 주교에게 전달하는 책임을 위임하였다. 베난시오 주교는 그의 주교에게 로마로 그 원고를 보내기 전에 그 비밀을 읽고, 복사를 해둘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나이 많은 그 주교는 계속 거절하였다.
1983년 2월 13일 파티마에서 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베난시오 주교는 그 봉투를 빛에 비추어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봉투 안에 조그만 종이가 있음을 알 수가 있었으며, 그것의 정확한 크기도 측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3의 비밀이 매우 길지 않으며, 대략 20에서 25줄 정도로서, 제2의 비밀과 거의 같은 크기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제3의 비밀이라고 하면서 그 내용이 매우 긴 메시지들은 믿기가 어려운 것으로 단정할 수가 있다. 몇몇 사기꾼들은 그러한 것들이 파티마의 진짜 비밀이라고 대중을 속이려고 노력해 왔다.
1957년 4월 16일에, 봉인된 봉투가 로마에 도착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성청의 비밀" 서류라고 표시된 후에 교황 비오 12세의 사무실 내의 작은 금고에 보관되었다.[3] 이러한 사실은 저널리스트(언론인)인 로버트 세로우씨에게 파스칼리나 수녀원장을 통해서 알려졌으며, 그는 이러한 사실을 최근에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그 비밀을 읽었는가?
놀랄만한 일처럼 느껴지겠지만, 그 대답은 거의 확실히 아니오 이다. 알론소 신부처럼, 나는 이러한 결론에 대한 여러 가지 확고한 자료를 제시할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요한 23세때 교황청의 장관들이었던 오따비아니 추기경과 카포빌라 몬시뇰의 증언이 확실한데, 그들은 교황 비오 12세의 서거후 1년 뒤, 즉, 1959년에 그 봉투는 요한 23세 교황에 의해서 개봉되었는데 그때까지도 그 봉투는 여전히 밀봉되어 있었다고 우리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독자는 1957년 12월 26일에 루치아 수녀가 히야친따와 프란치스코의 시복 조사관이었던 프엔테스 신부에게 전했던 엄숙한 말을 이해하여야 한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매우 슬퍼하십니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성모님의 메시지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한자도 악한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선한자들은 메시지에는 귀를 귀울이지 않고 제 갈길로만 갑니다... 저는 그 비밀에 관해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교황성하와 파티마의 주교님만이 복되신 동정녀의 뜻에 따라 그것을 알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관여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오 12세께서는 의심할 여지없이 1960년까지 기다리기로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황님은 그 해가 오기 전에 돌아가셨다. 성교회를 위해서 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4]
모든 사람들의 뜨거운 기대
나이 많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1960년이 다가옴에 따라, 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약속된 그 비밀의 공개를 확신에 차서 기다렸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시겠지만, 1959년에 온 국가는 티없으신 성모성심께 봉헌하는 큰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개월 동안, 파티마의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망토 안에 열렬한 군중들을 이끌고, 가시는 모든 곳에서 성모님의 놀라운 은총, 뜨거운 열정, 회개의 기적, 비둘기의 기적[5], 등을 펴시면서 온 반도(이탈리아)를 종횡으로 다니셨다... 1959년 10월 13일, 그 나라의 모든 주교들은 이탈리아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봉헌했다. 불행하게도, 그 운동은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그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의 침묵과 신중성을 엿볼 수가 있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파티마 제3의 비밀을 읽으시고 공개하기를 거절하셨다. 우리는 교황 요한 23세가, 1957년 8월 17일, 카스텔그란돌포에서, 그 당시 교황청의 관리이던 필리페 몬시뇰을 시켜서 그에게 제3의 비밀이 든 봉투를 가져오게 하였음을 안다. 자, 여기서 우리는 가톨릭의 최고 수장인 교황성하께 그 비밀이 전달되었을 때 공식적인 특성을 띠었다는 것과 그 어떤 엄숙함이 그 주변에 감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그것은 파티마 메시지가 그 기간 중에 지녔던 위치를 알게 해 준다.
교황 요한 23세께서는 그 봉투를 즉시 개봉하지 않으셨다. 교황님은 "나는 그것을 나의 고해신부와 함께 읽기 위해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족하셨다. 카포빌라 몬시뇰은 "제3의 비밀은 수일 후에 읽혀졌다"라고 확실히 말했다. "그러나, 포루투갈어로 쓰여진 언어의 해석에서 생기는 어려움 때문에, 후에 마카오의 주교가 된, 국무원의 포루투갈어 번역자, 파울로 호세 타바레스 몬시뇰의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요한 23세는 그것을 교황청의 장관인 오따비아니 추기경에게 읽게 하였다.
자, 여기서 잠깐 주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적 계시"를 판단하는 일이 교계제도에 속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60년에, 성교회는 이미 파티마 발현이 하느님의 뜻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게다가, 그 발현은 그루너 사제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던 것처럼 논쟁할 여지가 없는 예언들과 태양의 기적으로 입증되었다.
루치아 수녀를 통해서 전달된 복되신 동정녀의 명에 따라서, 책임을 맡은 두 고위 성직자, 즉, 레이리아의 주교와 리스본의 총대주교는 적어도 1960년까지는 그 비밀의 전 내용을 밝히는 것을 공개적으로 수긍하였다. 15년 이상의 기간동안, 추기경, 주교, 그리고 갈람바 수사 신부, 바르타스 수사 신부 혹은 메시아스 다이아스 코엘로 신부와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전세계에 메아리 쳐진 이러한 반복된 약속을 부정하기 위하여 교회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선언도 발표되지 않았었다.
교황 비오 12세의 승낙을 받아 1942년에 공개된 처음 두 비밀은 하나의 관례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의 최고 권위자로부터 약속된 이 공개를 기대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최소한 교황님으로부터 완전하고 직접적인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었다. 뜻밖에도, 1960년 2월 8일, 갑자기 파티마 제3의 비밀이 공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 간단한 인쇄물을 통해서 알려졌다.
그것은 익명으로 되어 있었으며, 근원적으로, 아주 무책임한 결정이다. 그러한 계기가 되었던 이유는 무었일까? 그 바티칸의 성명서는 단지 불만족스럽고 모순되기 조차한 변명만을 늘어놨을 뿐이었다. 이 익명의 출판물은 더욱 변절적인 말로 끝맺고 있다:
"비록 성교회가 파티마 발현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치아 수녀는 동정녀 마리아께서 세 목동 어린이들에게 전했었다는 말씀들에 대한 진실성 보장을 회피하고 있다."[6] 그러므로, 분명히, 바티칸은 다니스 신부의 잘못된 견해를 바티칸 고유의 것으로 사칭했을 뿐아니라(이 모순된 논리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저자의 저서 제1권에 있다)[7], 이 성명서는 그 이상이다. 바티칸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타당한 이유없이 루치아 수녀의 진실성과 더 나아가서는 파티마 메시지 전체에 대해서 아주 수치스러운 의혹을 입혔다!
카포빌라 몬시뇰에 의하면, 로마의 여러 고위 성직자들이 논의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책임을 지고 있는 포루투갈 교회 당국자들이 전혀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베난시오 주교나 세레제이라 추기경의 의견이 로마 교회에 의해서 전혀 청취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참석 통보도 받지 못했다. 1960년 2월 8일자 발행의 한탄스러운 인쇄물을 다시 읽고 그리고 분석한 후에, 혹은 카프릴레 신부에 의해서 6월에 발행된 "가톨릭 문명"이란 비참한 기사를 연구하면서 한층 더, 사람들은 파티마에 관해 로마의 책임있는 교권자들에 의해서 발표된 많은 모순, 부정확성, 그리고 거짓말에 크게 실망하였다.
이것은 바티칸의 결정이 사도들의 여왕이시며,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의 뜻을 알리는데 얼마나 소홀하였는가를 여러분들에게 알려준다: 성모님께서는 그 비밀이 1960년까지는 밝혀져야 한다고 요청하셨는데, 결과는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것은 또한 파티마 발현에 크나큰 해악을 끼칠 것임이 자명하다.
어떤 이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심신이 놀랄만하게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감소되기 시작한 것은 "성모님의 비밀"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와같은 공개적 경시가 있은 후부터라고 말한다. 루치아 수녀의 말이 이전보다 더 귀에 와 닿는다: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매우 슬퍼하십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성모님의 메시지에 귀를 귀울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 실수는, 누군가 이야기를 해야겠기에 말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귀결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이유는, 파티마의 예언들과 요청들이 무시되는데 있어서, 온 세상 앞에서 조롱받고, 경시받으신 분은 다름아닌, 성모님이시며, 하느님 자신이셨기 때문입니다. 티없으신 성심을 지니신 어머니의 경고를 통해서 알려진 조건부적인 징벌이 참혹하고, 불가피하게 뒤따를 것입니다.
[자료소스 : 성삼위일체의 미카엘 수사 / 편집 : 정 데레사 수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