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중 제33주일2006. 11. 19.(나해)종말-영원과 순간 사이에서-이기락 신부님

2006. 12. 1. 오후 10:12:05

글자

종말-영원과 순간 사이에서

 

   북악산 산책로를 걷다 보면 가을의 절정은 오히려 지금인 것 같습니다. 색색의 옷으로 물들어 있던 나뭇잎도 다 떨어졌는데, 그나마 남아 있는 마지막 잎들을 떨궈내느라 나무가 시들고 생기를 잃어갑니다. 이미 떨어진 낙엽, 아직 남아 있는 나뭇잎. 봄날과 여름을 잊어버린 듯 깊은 침묵 속에 잠겨드는 나무. 늦가을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영원과 순간을 사색하기에 좋은 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할 때 충격적인 느낌이 스쳐가기도 합니다. 다니엘 예언서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종말론적인 세말(世末)에 관한 색채와 묵시문학적 이미지 때문이겠지요. 가장 큰 재앙을 말씀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제1독서의 다니엘서를 다시 읽는 것 같습니다. 기근, 전쟁, 재난, 종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 표징과 이적들, 정해진 때, 그리고 사람의 아들. 우리가 상상하기엔 너무나 엄청난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9·11테러와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 여름의 집중호우,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곳곳에서 재난의 조짐들이 보이고 또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말(世末)과 묵시(apocalypsis)’라는 어휘는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든 불확실함과 공포를 딛고서 정말 무엇인가를 다시 희망하게 하는 것은 제2독서의 히브리서 말씀입니다. 율법을 넘어서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당신 친히 제물이 되시어 단 한 번의 제사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없애시고 그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하시는 분. 종말의 때를 묵상하면 할수록 전능하신 하느님의 권능이 회오리바람처럼 몰려옵니다. 하느님은 두렵고도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 마지막 날이 하느님을 직접 만나 뵙는 즐거운 상봉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일상에 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무화과 잎이 연해지는 것을 보고도 여름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종말의 때는 올 것이며 그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요. 그 때 사람의 아들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그분의 사랑이 당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뭘 믿는지 모르고,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하는 어리석고 죄 많은 불쌍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악의 세력이 막강하여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여도 결국 세상과 역사를 지배하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충실히 믿는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므로 항상 ‘깨어 있어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구약성경의 묵시문학과 오늘 복음이 겨냥하는 목표입니다.

   이런 생각에 잠겨 걷고 있자니 날이 어두워져 아까 보았던 나무와 낙엽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평화가 밀려옵니다. 사람의 구별과 분별이 사라지는 시간. 그 시간은 또 다른 질서가 시작되는 시간이겠지요. 사람들의 온갖 분별과 인식을 넘어선 하느님의 가치와 질서로 채워지는 또 다른 세상. 생각하니 편안해집니다.

이기락 타대오 신부·가톨릭교리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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