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규봉신부(전주교구)-
죽음은 상실이다. 죽음으로써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며, 자신이 세웠던 모든 계획이나 꿈까지도 포기하게 되고, 심지어 자신의 육신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죽음은 패배이다. 뜻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죽음으로써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만다. 죽음은 블랙홀이다. 기억, 의식, 정신 등 그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블랙홀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허무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그런데 죽음의 문제는 곧 삶의 문제이다.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삶의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죽음 다음의 세계가 없다면 삶은 의미가 없다. 착하게 살았으면서도 고통을 받은 사람이나, 악하게 살았으면서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모두 똑같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이 세상을 굳이 착하게 살 필요가 없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모든 것이 똑 같고, 삶 자체가 허무할 따름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삼키는 블랙홀이라면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죽음의 문제, 그것은 곧 삶의 문제이며, 누구도 삶을 허무로 돌릴 수는 없다. 죽음, 그것은 인간을 초월하지만,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죽음의 문제까지도 해결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어 당신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이를 미리 보여주셨다.
그리스도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그러나 부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어야 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부활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쳐야만 한다.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죽음과 부활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종교이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우리에게 멸망이나 절망이 아니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또한 부활이란 휴거를 부르짖는 이들의 헛된 믿음처럼 죽어서 땅 속에 묻힌 육체가 단순히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차원의 삶이다. 부활한 이들은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존재이며(로마 6, 4), 썩지 않는 몸과 영광스럽고 강하며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1고린 15, 33이하 참조).
교회는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인 11월을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정하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상 교회와 연옥에서 정화중인 연옥 교회, 그리고 천국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천상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교회는 서로 친교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들은 기도와 희생, 선행으로 서로 도울 수 있는데 이를 성인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함으로써 그들을 돕는 것이다. 죽은 이들과 우리가 별개로 떨어져 있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서로 일치하며 친교를 누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위령의 날인 오늘,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죽음은 더 이상 허무와 상실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임을 생각하자. 우리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며, 삶이란 죽음이란 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임을 생각하고, 삶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자. 우리에게는 부활의 삶, 하느님 나라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살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