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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신부 6- 성경 1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고요? 그렇게 오래 된 책을 왜 사랑합니까? 성경을 계속 반복해서 읽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제가 성경이 지루하지 않으냐고 물으니까, 어떤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지루하겠습니까?”
저는 독서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지는 않습니다. 너무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저는 이해력과 기억력을 받았습니다. 제가 원해 이해력과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매 미사에서 성체를 영한 후 계속 저에게 이해력과 기억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기도했고, 어느 날 주님께서 은총으로 제게 이해력과 기억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닌 어떤 다른 책도 두 번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4 년, 그 후 신부 되고 피정 지도하면서 5 년 동안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께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십니다.
왜 성경이 중요합니까? 왜 성경을 읽는 것은 지루하지 않습니까? 성경의 각각의 말은 성령의 힘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온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고 들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실제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 과거, 미래가 같으신 분입니다. 알파요 오메가이십니다. 시작이요 마침이신 분이십니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믿음은 거짓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진리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의 믿음은 단단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증거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거짓된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결코 거짓된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실망하지 않습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말론 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 사이비 종교들은 거짓된 희망을 주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확고한 증거를 지니고 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확고한 증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믿음의 증거입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교회는 가르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제자들입니다. 누가 제자입니까? 배우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가 어떻게 완전하게 될 수 있는가를 배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게 되어라.” 무엇에 대해 완전한 것을 말합니까? 사랑에 대해서입니다. 사랑에 대해 더 완전해 지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제가 우간다에 있을 때입니다. 신자 가정에 각각 성경 한 권 씩을 사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가정 방문을 하면서 보니까 성경을 대문 앞의 의자에 올려놓았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들은 성경이 잡귀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에서는 기도 방을 따로 만들어 두는 집이 더러 있습니다. 그 방에 여러 성물들을 진열해 놓고 가운데에 성경이 펼쳐져 있습니다. 성경을 다만 펼쳐 놓은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읽는지는 잘 모릅니다. 성경을 펼쳐 놓은 것은 “나는 좋은 그리스도교 신자야!”라고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중요성을 부과해야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성경을 대문 앞에 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펼쳐 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눈 앞에 놓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이 잡귀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없습니다.
제가 작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에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가 신하들에게 좋은 방패를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칼로 잘라도 잘라지지 않는 좋은 방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칼로 잘라지면 목을 자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좋은 방패를 만들어서 가져왔지만 칼에 잘라져서 그들의 목도 잘라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어느 대장장이가 방패를 만들어서 임금에게 가져왔습니다. 임금이 말했습니다. “너도 죽고 싶으냐?” 그 대장장이는 자기가 만든 방패를 들고 다른 신하가 칼로 자르도록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 그는 그 신하의 칼을 방패로 막고 그 칼을 빼앗아 그 신하를 죽였습니다. 임금이 진노하여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대장장이는 말했습니다. “임금님, 이 방패는 보여주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에서 칼을 막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입니다. 칼을 막고 이기지 않았습니까?”
성경도 내가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적이 와서 우리를 해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유혹이 찾아와서 우리 목을 벨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칼과 방패로 유혹에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강력한 칼입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들려 줍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똑같이 치유를 받습니다. 피정을 받는 여러분만 치유의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정을 동반하는 저도 치유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에게 피정 지도하면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하게 답할 수 있습니다. 피정의 첫 수확은 바로 저의 회심입니다. 제가 피정 지도를 통해 강론을 하지 않았다면 저는 많은 것을 놓쳤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냥 매니저와 같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저를 사도로, 제자로 살게 해 주었습니다. 성 빈센트가 말했습니다. “강론의 첫 열매는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
히브리서가 전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을 치유해 줍니다. 피정에서 여러분이 기뻐하시는 것처럼 저도 기뻐합니다.
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그 물음에도 저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이미 회심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회심시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정통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히려 회교도인이나 이방인들을 회심시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바리사이들을 회심시키지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물 속의 돌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피정에 오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미나에는 오는데 피정에는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미나는 머리를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실은 가슴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어떻게 가슴을 채워 줄 수 있습니까? 창조주와 함께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가슴을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세미나는 머리는 채워 줄 수 있어도 가슴은 체워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묵상이 필요합니다.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교부들이 들려줍니다. “마음의 침묵 중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성경은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잘 모셔 두는 것보다 읽는 것, 공부하는 것,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려께서 어떻게 성경을 묵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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